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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97

37. 교구설정 20주년 기념 성체대회 1962년 한국천주교회에 교회제도가 도입되던 해에 인천교구가 설정되었다. 1981년 6월 6일 교구설정 20주년을 맞아 ‘모든 이가 하나되기를’ 주제로 성체대회가 개최되었다. 2만여 교구민이 참석한 가운데 교구설정 20주념 기념미사와 성체대회는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주한 교황대사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 서울대교구 총대리 경갑룡 주교,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와 교구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날 미사 강론을 통해 “교구설정 20주년과 교구장 임명 20주년을 맞은 나 주교를 비롯한 메리놀회 신부와 수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외방전교회원들에게 감사드린다.”면서 “인천교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빛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자”고 말했다. 이어 .. 2007. 10. 7.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큰 달걀성당’, 심곡본당 좌) 현재의 심곡성당, 우) 1976년 2월 멀리서 바라본 심곡성당. 150평 단층 건물로 성당 앞은 주로 포도밭이었다. ◀ 위) 1975년 5월 성전 기공식 후 첫삽을 뜨는 해리스 신부와 신자들, ◀아래) 심곡성당 머릿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큰 달걀성당’, 심곡본당 부천 전철역, 부천대학의 신관건물을 마주한 큰 길가를 조금 지나 들어서면 큰 달걀 모양의 심곡본당이 눈에 들어온다. 벌집처럼 들어선 주택가와 부천역의 번화함 속에 심곡성당은 도시의 사라져버린 곡선 형태의 건축양식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큰 알 형상으로 신자들에게는 더욱 의미깊은 성당이다. 1975년 4월, 주로 포도밭으로 이루어진 붉은 황토밭의 경사진 언덕에 단층의 시멘트 건물로 지어진 심곡본당은 소사본당으로부터 분할되어 1976년 1월.. 2007. 10. 2.
36.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및 신자 단체의 창립 교회내에서 평신도의 역할과 사명이 중요하게 부각됨에 따라 평신도들의 교회 참여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런 추세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자 1979년 3월 18일 인천 교구내 각 본당 평신도 대표 40명이 ‘인천 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창립 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6월 24일 첫 행사로 ‘주교 초청 간담회’를 개최하여 평협의 운영 문제를 토의하고, 10월 20일부터 이틀 동안 제1회 인천 교구 평협 연수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11월 17일 가톨릭회관에 평협 사무실을 마련, 체계적인 업무가 시작되었다.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의 결성을 전후로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교구민들의 의식이 고취되고 그 영향으로 많은 사도직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평협의 결성에 앞서 1979년 1월 15일 ‘성모 성심 꾸리아’가.. 2007. 10. 2.
무명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는 일만위 순교자 현양 동산 무명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는 일만위 순교자 현양 동산 9월 순교자성월을 맞아 갑곶성지와 함께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강화군 내가면에 위치한 일만위 순교자 현양 동산이다. 한국에는 적게는 만 명, 많게는 삼만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이 있다. 그중에서 우리가 이름정도라도 알고 있는 순교자는 100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교구에서는 지난 2002년 강화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위쪽 동산에 '일만위 순교자 현양 동산'을 조성하여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에게 봉헌하였다. 이곳에는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는 일만위 순교자 현양탑이 조성되어 있고, 순교자 현양당, 무명순교자상, 십자가의 길, 묵주연못, 성모당 등이 있다. 또한 지난 6월에는 한국교회의 크고 작은 일을 묵상.. 2007. 9. 23.
35. 인천교구의 자립 1977년 말 교세 통계표에 의하면 인천 교구 관내 총인구수는 128만 938명이고 그 중 신자수는 7만 4,900여 명으로 복음화율은 6%였다. 같은 해 전국 복음화율 3,16%를 훨씬 넘는 교세였다. 교구 내 본당은 30개로 이 중 75%가 인천 시내에 집중, 관할지역이 좁다는 것과 함께 인천교구사목에 큰 이점이 되었다. 서구 문물을 제일 먼저 접할 수 있다는 지리적 여건이 수도 서울에 가까운 항만으로서의 교구 복음화에 잠정적인 바탕을 이루어 왔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여건들이 인천 교구가 산업 사회의 부산물인 인구의 유동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점진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온 잠재력이다. 1978년 인천 교구는 교구 설정 이래 최대의 염원이었던 자립을 이룩했다. 인천교구가 교구 설정 16년.. 2007. 9. 23.
한국 천주교회 신앙선조들의 순교터, 강화 갑곶순교성지 한국 천주교회 신앙선조들의 순교터, 강화 갑곶순교성지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있어 강화에서 천주교 신자 치명지로 확실하게 명기된 곳은 진무영과 갑곶진두 두 곳이다. 강화는 1786년(정조10년)부터 역모죄로 강화에 귀향하여 살던 은언군(철종의 조부)이 그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영세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강화부(관청리 형방)에 배소되어 처형되었으며 황사영의 탄생지가 강화 대묘동에 있고 갑곶 해안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해로(海路) 여행지로 알려져 있는 등 한국천주교회와 많은 연관을 맺고 있는 지역이다. 무엇보다 직접적인 천주교 탄압이 강화도에서 이루어진 계기는 대원군에 의해 전개된 병인양요로서 이때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살해되었고 3명의 선교사는 청국으로 탈출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의 조선에 대한 .. 2007. 9. 16.
34. 서해 도서지역의 의료 활동 인천교구 활동을 맡게 된 메리놀 회원들은 특히 서해 도서지역 개발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전기 및 상수도 시설과 낙후된 문화 시설을 갖추어 주고 병원 설립과 병원선으로 의료 혜택을 주고 섬 주민들의 소득 증대에도 관심을 가져 간척 사업을 벌임으로써 지역 사회 개발에 선봉적 역할을 하였다. 1959년 5월 백령도 본당에 부임한 부영발(Edward Moffett)신부는 ‘복자 김 안드레아 병원’을 설립하여 섬 주민 뿐 아니라 백령도에 주둔하고 있는 공군 장병들에게도 무료 진료를 해 주었다. 1961년 김 안드레아 병원은 서울 가톨릭 의대 의료반에 사회적 위생 조사를 의뢰하여 13,000여 명의 도민 중 3,200명을 X-ray촬영한 결과 평균 16,3%의 비율로 결핵에 감염되어 있음을 밝혔다. 또한 13,0.. 2007. 9. 16.
지역민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성장한 부평4동 본당 ▲ 좌측부터 1. 마리아 데레사 여학생 회관(1965년) 2. 1959년 설립된 부평1동 공소의 첫 영세식 기념(1960년경) 3. 성심중학교 제3회 졸업기념(1978년) 지역민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성장한 부평4동 본당 1964년 7월 인천교구의 열두 번째 본당으로 설립된 부평4동 본당은 지역민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부평지역 신앙의 밑거름이자 친근한 터전으로 성장해 왔다. 제1대 주임으로 부임한 태의선 신부는 당시 부평지역이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유흥가가 밀집되어 여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아버지가 기부한 4천 달러의 기금으로 마리아 데레사 여학생관(독서실)을 신축하였다. 또한 1973년 불우 청소년들을 위해 설립한 부평성심재건학교는 현재까지 성.. 2007. 9. 9.
33. 가톨릭교육이념을 실현하는 교육 기관의 설립 ◀ 사진: 신학교 전경 가톨릭의 교육이념을 실현하고자 교구에서는 1900년 9월 1일 개교107년의 역사를 지닌 박문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1937년 3월 1일 개원한 70년의 역사를 가진 박문유치원과 1940년 4월 27일 박문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에 남학생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개신교에서 운영하던 영화중고등학교를 1962년 교구가 인수하였다. 학교가 위치한 제물포에서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를 향해 출발한 것을 기념하고, 가톨릭적인 교육 기관으로의 면모를 쇄신하려는 의도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주보로 ‘대건’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62년 3월 17일 부천 소명여자고등학교와 1962년 10월 인보기술학교를 병설하였고, 1963년 12월 16일 성심여자대학이 설립인.. 2007. 9. 9.
신자들의 근검절약 정신과, 섬지역 인재양성기관의 초석을 가져온 연평도 좌) 1959. 4. 22. 새 성전 축성 기념 우) 1950년대 해성유치원 아이들 신자들의 근검절약 정신과, 섬지역 인재양성기관의 초석을 가져온 연평도 성당 황해도 해주만 앞바다에 위치하고 옹진과 해주에서 피난온 실향민들로 구성된 연평도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1917년 해주에서 임야 관리로 섬으로 들어온 전응택(바오로)였다 (4월29일자 인천주보 4면 참조). 섬지역으로 무속 신앙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지만 전응택의 열심한 전교활동으로 많은 도민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또한 1922년 전응택의 장남 전덕규(요한)는 제2대 임야 관리인 강재규(베네딕도)와 협력하여 연평도 개척사업과 함께 인재양성을 위한 해성 강습소를 열어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39년 초가 강당 20평을 헐고 함석집으로 .. 2007. 9. 2.
32. 인천교구 설정 후 본당 증설과 수도회 진출 1962년은 한국 천주교회 교구 발전사에 있어 획기적인 해였다.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도입됨으로써 그 때까지의 모든 포교지 교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그 해 3월 10일 인천교구도 대목구에서 교구로 설정되어 많은 본당과 공소가 증설되기 시작했다. 1962년 9월 18일 화수동본당, 1963년 8월 15일 주안본당(현 주안1동 본당)과 독쟁이(용현동)본당이 설립되었고 오류공소가 같은 해에 설정되었다. 이어 1964년 초 그동안 초가를 개조하여 공소로 사용하던 중 격증하는 교세로 난관에 이르렀던 김포본당 마송공소가 본당신부와 해병여단 군종신부의 주선과 지원을 받아 신축 공소의 기지를 마련하였고, 1964년 1월 용현동본당 송도공소, 7월 14일 부평1동본당이 설정되었다. 1965년 9월 28일.. 2007. 9. 2.
섬지역에 꽃피워진 신앙, 대부 본당 좌) 상동 공소를 짓고 첫 미사후 기념 촬영 / 우) 남3리 공소 흙 벽돌 건물 앞에서 섬지역에 꽃피워진 신앙, 대부 본당 대부도는 내륙과의 접촉이 어려운 지역으로 문화혜택을 접하기 어렵고 새 문물의 보급도 더딘 섬이었다. 1950년 6.25사변으로 황해도와 그 연안지역의 피난민들이 연평도와 대부도로 이주하게 되었고 당시 한국에 체류 중이던 선교사들과 각 본당 주임으로 있던 외국인 신부들이 모국과 세계구호 단체에 구호양곡을 요청하였다. 구호물품을 타러 온 사람들에게 ‘교리문답’을 나누어 주며 교리를 암기하도록 하고 찰고(면담/교리 구두시험)를 통해 세례를 주었다. 그래서 그 당시 ‘밀가루 신자’라는 신조어가 나올만큼 구호양곡 배급은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했다. 1959년 대부도 첫 공소로 설립된 흥성리.. 2007.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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