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영성]/신 김대건·최양업 전71 (71·끝) 가경자 최양업 최양업 신부 시복, 우리의 기도에 달렸다 ▲ 기도 없이는 시복이 어렵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위해 한국 교회 신자들은 많이 기도해야 한다. 사진은 가경자 최양업 신부 초상화. 최양업 신부 시복 시성은 오랜 염원 “저와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최양업 신부가 1854년 11월 4일 동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최양업 신부는 스승 신부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항상 자신과 조선 교회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이 간절한 바람대로 지금은 최양업 신부를 위한 열성적인 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심사가 현재 교황청 시성부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은 한국 교회의 오랜 염원이다. 순교자가 아닌 최양업 신부는 .. 2022. 11. 20. (70) 최양업 신부의 선종 착한 목자 최양업 잃은 슬픔, 조선 교회를 덮다 ▲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 배론 신학교에서 68㎞ 떨어진 한 교우 집에서 선종한 후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초 베르뇌 주교 주례로 배론에 안장됐다. CPBC 제작 드라마 ‘탁덕 최양업’ 중 최양업 신부가 과로로 결국 쓰러진 장면이다. 교회 재건을 위해 몸을 바치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최양업 신부가 1860.. 2022. 11. 13. (69) 조선대목구 신학교 조선 신학교 책임자 최양업, 학생 3명 페낭 유학 보냈으나 … ▲ 배티는 첫 조선대목구 신학교가 있던 유서깊은 교우촌으로 최양업 신부는 1853년부터 1856년 여름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하고 신학생들을 양성했다. 사진은 복원한 배티 신학교. 배티에 자리한 조선대목구 신학교 최양업 신부가 책임을 져 배티에서 신학생을 양성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부고속도로 진천 IC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백곡저수지를 거쳐 구수 삼거리에서 안성 방향으로 서운산 자락을 타고 약 7㎞를 가다 보면 왼편에 배티 성지가 나온다. 도로명 주소로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이다. 배티 교우촌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경기도와 내포 지방 그리고 경상도 일원에서 피신한 신자들에 의해 형성됐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2022. 11. 6. (68) 동정 생활 실천 조선 시대 박해와 위협에도 믿음의 열정으로 정결 지킨 신자들 ▲ 왼쪽부터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부부, 최필제 베드로, 조숙 베드로, 권천례 데레사, 황석두 루카. 동정 생활을 하는 교우들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는 당대 신자들의 생활상뿐 아니라 신심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글이 있다. 최 신부는 편지에서 교우들을 소개할 때 순교자들은 이름과 세례명을 밝히지만, 살아있는 신자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성과 세례명만 쓴다. 예를 들어 회장 하 아우구스티노, 양반 출신 안나, 14살 된 바르바라, 동정녀 김 아가타 등이다. 최양업 신부와 선교사들의 편지를 살펴보면 당시 조선 교회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동정 생활을 하는 교우들이 적지 않았다. “이제 막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 중 한 명은 36세이고 혼인을 했지만.. 2022. 11. 6. (67) 조선 시대 성물 “조선 교우들 위해 묵주나 묵주 만들 도구라도 보내주시면…” ▲ 최양업 신부는 교우촌을 방문할 때 교우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줄 묵주와 성물 등을 챙겨갔다. 사진 속 묵주는 기해박해 무명 순교자의 무덤에서 발굴한 묵주로 당시 조선 교회 신자들 가운데 꽤 많은 이들이 묵주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려준다. 최양업 신부는 교우촌을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지 않았다. 신자들에게 기쁨과 희망이 될 묵주와 성물을 형편이 되는 한 바리바리 싸들고 가 신자들에게 건넸다. 또 비신자에게 직접 전교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천주교에 관해 궁금해 찾아온 이에게 최 신부는 교리서와 기도서, 교리문답책을 선물했다. 비록 묵주를 제외한 성물은 그냥 주지 않고 구매를 원하는 신자들에 한해 비용을 받고 전달했지만, 교우들을 사랑하는 사.. 2022. 10. 19. (66) 페레올 주교 선종 조선인 사제 양성 힘쓰며 14년간 헌신한 페레올 주교, 하늘나라로 ▲ 미리내성지 김대건 성인 경당 앞에 있는 페레올 주교의 묘. 조선 교회의 별이 지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장 조제프 장 밥티스트 페레올(Jean Joseph Jean Baptiste Ferreol, 1808~1853) 주교가 선종했다. 1853년 2월 3일 밤 10시께 서울 주교관에서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페레올 주교는 1852년 3월 말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낸 직후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병에 걸려 고생을 했다.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었다. 당시 조선 교회 성직자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신자들을 만나러 가야 할 곳이 많아서 눈과 얼음이 덮인 산들을 가로질러 매일같이 걸어 다녀야 했기에 오래지 않아 녹초가.. 2022. 10. 19. (65) 한글 기도서와 한글 교리서 그리고 천주가사 편찬 한글 기도·교리서 편찬에 앞장서고 천주가사로 호교론 펼쳐 ▲ 최양업 신부는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겼다. 사진은 「천주성교공과」 절두산순교성지 소장본. ▲ 세례·견진·고해·성체성사 등 4가지 근본 교리를 154조목으로 나눠 문답식으로 설명한 「성교요리문답」. 한문본인 이 교리서를 최양업 신부가 우리말로 옮겼다. ▲ 최양업 신부는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 섰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 천주가사 중 공심판가를 옮긴 필사본. 가톨릭평화신문 DB 한문 기도문 음으로만 읽어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돼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 2022. 10. 9. (64)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하) 해발 900미터 산골 교우촌에서 110리(약 43km) 걸어온 신자들에게 성사 ▲ 최양업 신부는 멍에목 교우촌 신자들이 화재로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요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 인근에 사는 지체 높은 양반 조씨를 입교시켰다고 한다. 사진은 속리산 지맥인 구병산 능선 북쪽 골짜기에 자리한 멍에목 성지. 멍에목 멍에목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개된 최 신부의 사목지이다. 최 신부는 이 편지에서 양반 조씨가 멍에목 신자들에게 감명을 받아 세례를 받게 된 사연을 소개한다. 최양업 신부가 신원을 밝힌 영세자는 조씨가 유일하다. “그는 천주교를 한낱 지극히 사악하고 반란을 선동하는 종교로만 알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 2022. 10. 2. (63)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중) 박해 피해 동굴서 교우들과 생쌀 먹으며 숨어 지내기도 ▲ 죽림은 최양업 신부가 경신박해를 피해 3개월간 숨어지내며 마지막 편지를 쓴 교우촌이다. 사진은 CPBC가 제작한 드라마 ‘탁덕 최양업’의 죽림굴 장면. 불무골 불무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 2통의 편지를 쓴 곳이다. 최 신부는 이곳에서 14일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15일 홍콩 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최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자신이 그동안 수집한 순교자들의 자료들을 그해 3월 25일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돼 주교품을 받은 다블뤼 주교에게 모두 드렸다고 했다. 다블뤼 주교는 내포에서 조선 교회 순교사를 편찬하고 있었다. 최 신부는 또 같은 편지에서 “올 한 해 동안 저는 2867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했고, .. 2022. 10. 2. (62)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상) 전라·경상·강원·충청·황해 5개 도와 100여 개 교우촌 사목 ▲ 최양업 신부가 18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쓴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충북 진천 문봉리 동골 교우촌 터. 현재 이곳에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무아의 집이 있다. 최양업 신부는 1850년 1월부터 1861년 6월 15일 선종할 때까지 만 11년 6개월을 조선에서 사목했다. 최 신부의 주요 사목지와 편지를 쓴 교우촌을 3회에 걸쳐 정리하려 한다. 5개도 돌며 성사 집전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은 후 만주 요동 차구에서 약 7개월 동안 베르뇌 신부의 보좌로 사목했다. 1849년 12월 말 귀국 후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와 경기도 일부, 강원도 지역을 사목했다. 최 신부.. 2022. 9. 18. (61)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서양 선교사들 사이에서 외로웠던 유일한 조선인 사제, 최양업 동료 사제가 될 수 없었던 최양업 “저는 제 동료 신부들이 올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그랬듯이 4500명의 고해성사를 듣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망가뜨리고 일을 비효율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몇몇 교우촌을 방문하지 않고 놔두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만주대목구 베르뇌 부주교가 비오 9세 교황으로부터 제4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직후 1855년 1월 22일 만주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장상 바랑 신부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만주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알려질 만큼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은 헌신적이었다. 비록 서양 선교사들이 자신을 망가뜨리게 하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단정 지을지라도 최양업 신.. 2022. 9. 4. (60) 최양업의 부모와 가족 최양업을 보면 부모 최경환·이성례의 삶과 신앙이 보인다 ▲ 최양업 신부의 가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전수자로서 조부모의 역할과 부모가 가정 안에서 신앙의 지킴이요 교리교사로서 모범된 삶을 살야야 함을 증언해 준다. 성화는 최양업 신부의 가정을 그린 심순화 화백의 작품으로 당고개 성지에 전시돼 있다. 최양업 신부에게 있어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따랐던 인물이요, ‘전부’였다. 최 신부는 특히 아버지의 두터운 신심과 헌신적인 선교 활동,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 등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을 그대로 흡수했다. 최 신부는 1851년 10월 15일 절골 교우촌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부모와 가족에 관해 밝힌다. 최 신부는.. 2022. 8. 28. 이전 1 2 3 4 ···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