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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15

15. 떡메질 설 떡국, 복을 나누며 간절한 한 해 소망 담은 축제의 음식  나이를 더해주는 설 떡국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던 우리 조상들의 간절한 한 해 소망을 담은 음식이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리를 방문해 떡을 만들고 있는 가족을 촬영했다.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설날 아침 밥 대신 떡국 올리고 차례 지내 곧 ‘설’이다. 순우리말인 설은 한 해의 첫날, 곧 새해를 맞는 날을 뜻한다. 한자로 정초(正初)·원일(元日)·원단(元旦)·정조(正朝)·세수(歲首)·세초(歲初)·세시(歲時)·연두(年頭)·연시(年始) 등으로 표현된다. 설이란 말은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쓰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한식·단오·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 2025. 1. 26.
14. 할머니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삶과 신앙 굳건히 지켜온 ‘옆집의 성인들’  노르베르트 베버, ‘묵주를 든 처네 쓴 할머니’,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신앙 전수자이자 지혜 전해주는 영적 스승 조부모, 특히 할머니는 집안에서 ‘신앙의 전수자’다. 아울러 가정에 지혜를 전해주는 ‘영적 스승’이시다. 구교우라면 항상 묵주기도를 하고 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또 묵주기도뿐 아니라 아침저녁 기도와 삼종기도 등 모든 기도를 할머니에게서 배웠고, 늘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를 추억할 것이다. 할머니의 간구로 집안에 성직자·수도자가 배출됐고, 신앙의 명맥이 이어졌다. 그래서 할머니는 가정 교회의 으뜸 교리교사다. 할머니.. 2025. 1. 19.
13. 국수 생일이나 잔칫날·제삿날 먹으며 기쁨과 슬픔 함께 나눈 국수  노르베르트 베버, ‘독상을 받은 신부의 손님들’, 1911년 5월 21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리,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잔칫상과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오른 국수 우리 민족은 예부터 국수를 잔칫날 함께 나눠 먹으면서 기쁨을 나눴고, 상가에서 음복하며 먼저 세상을 떠난 이를 추모하고 슬픔을 달랬다. 돌·생일·회갑 등 태어난 날과 혼례 등을 축하하는 잔칫상에, 또 제사상 제수로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음식이 바로 국수였다. 국수는 고려 시대 송나라에서 들어왔다. 스님들이 송나라를 왕래하면서 국수를 들여와 절간 음식으로 먹었고, 이후 상류사회 잔치와 제사 음식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밀을 .. 2025. 1. 12.
12. 노인 신앙의 눈으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기품있는 노인들 일상 포착  노르베르트 베버(?), ‘노인’, 유리건판, 연도 및 촬영지 미상,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신앙과 삶의 품격 온몸에 배어있는 노인들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 신부는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이라고 정의했다. 곧 향주덕의 삶, 하느님을 향한 삶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인 것이다. 그러면서 라너 신부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아 얻게 하는 것은 실상 이념이나 고상한 말이나 자아 반영이 아니라, 이기심에서 나를 풀어주는 행위, 나를 잊게 해주는 남을 위한 염려, 나를 가라앉히고 슬기롭게 해주는 인내 등”이라고 했다... 2025. 1. 1.
11. 찰고(察考)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찰고 때 ‘요리문답’ 술술 암송  황해도 청계본당 팔상공소 신자들이 본당 주임인 빌렘 신부에게 찰고를 받고 있다. 노르베르트 베버, ‘찰고’, 1911년 5월 22일 팔상공소,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요리문답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불호령 1909년 성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해 1911년 서울 백동수도원을 설립하기 전까지 조선대목구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교황 파견 선교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한국인 성직자도 있었다. 1911년 당시 한국에서 사목하던 한국인 신부는 불과 15명이었다. “독일인 새내기 선교사들은 신자 7만 1252명, 프랑스인 사제 41명, 한국인 사제 15.. 2024. 12. 29.
10. 성 베네딕도회 백동수도원 1909년 한국에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에 수도원 건립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백동수도원 건립을 위한 정지 작업을 하고 있다. 유리건판, 1910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뮈텔 주교, 성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요청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한국에 처음으로 진출한 남자 수도회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한국 교회 안에서 교육을 담당할 수도회를 애타게 찾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애국계몽운동으로 그리스도교계 사립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이 시기 개신교 주도로 세워진 사립학교 수만 해도 전국에 5000여 개나 됐다. 개신교가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한 주된 이유는 선교였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간섭을 받.. 2024. 12. 15.
9. 여인의 일상 다듬이·절구·맷돌질하는 여인들… 사랑 깃든 일상의 숭고함 드러내  노르베르트 베버,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해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해주에서 만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 아궁이에 콩대나 싸리나무를 태우면 타닥타닥 소리가 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소리가 마치 곡식 영그는 소리와 같다 해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한 해 농사의 대풍을 기원하며 오곡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땠다. 또 정초부터 집집이 아궁이에서 나는 이 요란한 소리로 집안의 잡귀를 몰아냈다. 이를 ‘액막음’이라 불렀다. 이처럼 아궁이는 곡기가 드나드는 곳이어서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과 천지의 기운이 드나드는 주방과 함께 집을 짓고 관리할 .. 2024. 12. 8.
8. 베짜는 여인 황해도 청계리 교우촌 여인들의 베짜는 모습 생동감 넘치게 포착 노르베르트 베버, ‘베짜는 여성’,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11년 5월 유서 깊은 청계리 교우촌 방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리에 자리한 유서 깊은 교우촌을 1911년 5월 방문했다. 이곳은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자란 곳이다. 황해도는 일찍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고광성은 평산 출신이고, 황 포수는 봉산 출신이다. 1819년 기묘박해 순교자 고 바르바라와 고 막달레나는 재령 사람이다.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고순이는 고광성의 딸이다. 하지만 황해도 땅에 복음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자라나기 .. 2024. 12. 1.
7. 북한산 1925년 홍수로 유실된 북한산 ‘산영루’ 마지막 모습 사진에 담아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크뤼거 독일 총영사와 함께 1911년 6월 5일 북한산 산행을 하다 잠시 쉬고 있다. 유리건판, 1911년 북한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독일 총영사 크뤼거 초청으로 북한산 산행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6월 5일 독일 총영사 크뤼거 박사의 초청으로 북한산 산행을 했다. 크뤼거는 1907년 6월 6일 부임해 1914년 서울 주재 독일 영사관이 철수할 때까지 총영사로 활동했다. 그는 고종과 순종 황제 등 대한제국 고위층과 친분을 쌓으며 순종이 영사관 직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외교 업무보다 자국의 통상 이익을 챙기는 데.. 2024. 11. 24.
6. 혜화문 백동수도원 숙소에서 손 내밀면 닿을 듯한 한양도성 ‘혜화문’ 성벽 노르베르트 베버, ‘혜화문’, 유리건판, 1911년,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일제 강점기 한양도성 성벽과 성문 훼손 한양도성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 1396년부터 쌓기 시작해 세종 임금이 1422년 중수했다. 처음에는 돌과 흙을 섞어 성을 쌓았으나 세종이 전부 돌로 개축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보수되고 또 새로 쌓아 시기와 지형에 따라 성벽 모양이 다양할 뿐 아니라 높이도 5~10m까지 차이가 난다. 한양은 8개 산이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다. 안쪽 동편에는 ‘낙산’으로 불리는 타락산이, 서편에는 인왕산이, 남편에는 ‘남산’.. 2024. 11. 24.
5. 전통 상장례 <하> 십자가와 성경 든 복사단과 사제 뒤엔 성당 묘원으로 향하는 행상 노르베르트 베버, ‘상여’,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상주의 지위에 따라 상여 모양 달라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전통 상장례에 지관(地官)의 역할이 큰 것에 놀라워한다. 지관은 음양오행설의 풍수에 기반해 집터와 묘터를 정하거나 길흉을 평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시대부터 활동했고, 조선 왕조에서는 지관을 과거로 선발해 전문적으로 양성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모든 계층에 풍수가 성행했으며 과거를 통해 선발 양성된 이를 지관이라 했고, 민간에서 생업을 겸하며 풍수를 보는 이를 지사(地師)라 구분했으나 일반적으로 지관이라 통칭했다. 풍수가·풍.. 2024. 11. 24.
4. 전통 상장례 <상> 거친 삼베로 만든 상복 입은 상주, 짚자리 위에서 문상객과 맞절노르베르트 베버, ‘상주’,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주자가례」 관혼상제 규범에 따라 상장례 ‘상장례(喪葬禮)’라는 말이 쓰인 것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다. 정확히 이 용어가 처음 언급된 것은 세종 10년 1428년이었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은 사대부에서 백성까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관혼상제 규범에 따라 일상의 의례를 치렀다. 이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성행했던 불교식 화장은 점차 사라지고 매장이 일반화됐다. 이후 일제는 조선의 관혼상제례를 인위적으로 바꾸려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단속) 규칙’을.. 2024.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