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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10

10. 성 베네딕도회 백동수도원 1909년 한국에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에 수도원 건립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백동수도원 건립을 위한 정지 작업을 하고 있다. 유리건판, 1910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뮈텔 주교, 성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요청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한국에 처음으로 진출한 남자 수도회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한국 교회 안에서 교육을 담당할 수도회를 애타게 찾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애국계몽운동으로 그리스도교계 사립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이 시기 개신교 주도로 세워진 사립학교 수만 해도 전국에 5000여 개나 됐다. 개신교가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한 주된 이유는 선교였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간섭을 받.. 2024. 12. 15.
9. 여인의 일상 다듬이·절구·맷돌질하는 여인들… 사랑 깃든 일상의 숭고함 드러내  노르베르트 베버,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해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해주에서 만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 아궁이에 콩대나 싸리나무를 태우면 타닥타닥 소리가 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소리가 마치 곡식 영그는 소리와 같다 해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한 해 농사의 대풍을 기원하며 오곡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땠다. 또 정초부터 집집이 아궁이에서 나는 이 요란한 소리로 집안의 잡귀를 몰아냈다. 이를 ‘액막음’이라 불렀다. 이처럼 아궁이는 곡기가 드나드는 곳이어서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과 천지의 기운이 드나드는 주방과 함께 집을 짓고 관리할 .. 2024. 12. 8.
8. 베짜는 여인 황해도 청계리 교우촌 여인들의 베짜는 모습 생동감 넘치게 포착 노르베르트 베버, ‘베짜는 여성’,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11년 5월 유서 깊은 청계리 교우촌 방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리에 자리한 유서 깊은 교우촌을 1911년 5월 방문했다. 이곳은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자란 곳이다. 황해도는 일찍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고광성은 평산 출신이고, 황 포수는 봉산 출신이다. 1819년 기묘박해 순교자 고 바르바라와 고 막달레나는 재령 사람이다.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고순이는 고광성의 딸이다. 하지만 황해도 땅에 복음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자라나기 .. 2024. 12. 1.
7. 북한산 1925년 홍수로 유실된 북한산 ‘산영루’ 마지막 모습 사진에 담아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크뤼거 독일 총영사와 함께 1911년 6월 5일 북한산 산행을 하다 잠시 쉬고 있다. 유리건판, 1911년 북한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독일 총영사 크뤼거 초청으로 북한산 산행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6월 5일 독일 총영사 크뤼거 박사의 초청으로 북한산 산행을 했다. 크뤼거는 1907년 6월 6일 부임해 1914년 서울 주재 독일 영사관이 철수할 때까지 총영사로 활동했다. 그는 고종과 순종 황제 등 대한제국 고위층과 친분을 쌓으며 순종이 영사관 직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외교 업무보다 자국의 통상 이익을 챙기는 데.. 2024. 11. 24.
6. 혜화문 백동수도원 숙소에서 손 내밀면 닿을 듯한 한양도성 ‘혜화문’ 성벽 노르베르트 베버, ‘혜화문’, 유리건판, 1911년,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일제 강점기 한양도성 성벽과 성문 훼손 한양도성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 1396년부터 쌓기 시작해 세종 임금이 1422년 중수했다. 처음에는 돌과 흙을 섞어 성을 쌓았으나 세종이 전부 돌로 개축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보수되고 또 새로 쌓아 시기와 지형에 따라 성벽 모양이 다양할 뿐 아니라 높이도 5~10m까지 차이가 난다. 한양은 8개 산이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다. 안쪽 동편에는 ‘낙산’으로 불리는 타락산이, 서편에는 인왕산이, 남편에는 ‘남산’.. 2024. 11. 24.
5. 전통 상장례 <하> 십자가와 성경 든 복사단과 사제 뒤엔 성당 묘원으로 향하는 행상 노르베르트 베버, ‘상여’,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상주의 지위에 따라 상여 모양 달라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전통 상장례에 지관(地官)의 역할이 큰 것에 놀라워한다. 지관은 음양오행설의 풍수에 기반해 집터와 묘터를 정하거나 길흉을 평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시대부터 활동했고, 조선 왕조에서는 지관을 과거로 선발해 전문적으로 양성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모든 계층에 풍수가 성행했으며 과거를 통해 선발 양성된 이를 지관이라 했고, 민간에서 생업을 겸하며 풍수를 보는 이를 지사(地師)라 구분했으나 일반적으로 지관이라 통칭했다. 풍수가·풍.. 2024. 11. 24.
4. 전통 상장례 <상> 거친 삼베로 만든 상복 입은 상주, 짚자리 위에서 문상객과 맞절노르베르트 베버, ‘상주’,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주자가례」 관혼상제 규범에 따라 상장례 ‘상장례(喪葬禮)’라는 말이 쓰인 것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다. 정확히 이 용어가 처음 언급된 것은 세종 10년 1428년이었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은 사대부에서 백성까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관혼상제 규범에 따라 일상의 의례를 치렀다. 이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성행했던 불교식 화장은 점차 사라지고 매장이 일반화됐다. 이후 일제는 조선의 관혼상제례를 인위적으로 바꾸려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단속) 규칙’을.. 2024. 11. 24.
3. 전통 혼례식 <하> 100년 전 소박하게 살던 우리 선조들 삶의 모습 정갈하게 담아 노르베르트 베버, ‘교배례’, 1925년 함경남도 내평,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교배례에 이어 술잔 주고받으며 혼인 서약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의 전통 혼례 과정을 이어간다. “신랑이 초례상 상차림 앞에 무사히 도착했다. 상 뒤에는 중년의 수모(手母) 둘이 신부 양쪽에 서 있다. 신부는 길게 펼쳐진 활옷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평생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신랑을 지금도 보지 못한다. 신부가 손을 이마에 올리고 수모들의 부축을 받으며 신랑에게 세 번 깊이 절한다.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하면 수모는 신부의 팔을 붙들고 신부를 일으켜 세운다. 이제는 신랑이 절할 차례.. 2024. 10. 27.
2. 전통 혼례식 <상> 사모관대 혼례복 입은 신랑, 흰말 타고 말없이 신부집으로 초행노르베르트 베버, ‘신랑의 초행’, 1925년 함경남도 내평,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1925년 갓 결혼한 신혼부부 혼례식 연출 선교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우리의 전통 혼례를 촬영했다. 그는 먼저 1911년 5월 21일 안중근(토마스) 의사 일가가 살고 있던 황해도 청계동성당을 방문해 그 집안의 혼례식에 초대받아 촬영했다. 그리고 1925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성당을 방문해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사례비를 주고 혼례식을 연출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의 전통 혼례식을 볼 수 있어 매우 들떴다. 그는 .. 2024. 10. 21.
1. 연재를 시작하며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선교사가 본 100년 전 조선의 모습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소멸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를 글과 그림·사진과 영상으로 담아 유럽에 소개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 박물관에 비치된 베버 총아빠스 사진. 창틀 앞에 놓인 그의 사진이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선교 문화적 시선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독일 선교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 한자어 ‘사진(寫眞)’을 우리말 그대로 옮기면 ‘진실된 것을 베끼다’라는 뜻이다. 곧 인물이나 사물의 형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풀이다. 영어로는 ‘Photography’라고 한다. 이는 헬라어 ‘φωτοs(포토스, 빛)’와 ‘ζραφη(그라페, 그림)’의 합성어로 우리말.. 2024.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