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영성]/성경 속 인물68 68.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조토의 . 이탈리아 파두아 스크로베니 경당 프레스코화 2014년 8월 18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명동대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마지막으로 로마로 귀국하는 사목방문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사가 끝나기 전 교황님 제의실로 가는 데 경찰 통제선 안쪽에서 한 어머니가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이 나에게 손짓했다. 가서 들어보니 어머니가 교황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꼭두새벽부터 기다렸는데 입장하실 때 교황님이 다른 쪽을 향해서 인사를 하셔서 안수를 못 받았다고 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간절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제의실로 가서 기다렸다. 미사가 끝나고 교황님께서 복사단과 함께 들어오셨다. 한여름의 빡빡한 한국 사목방문 4박5일의 일정을 다 마친 교황님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 2025. 5. 1. 67. 세관에 있는 마태오를 부르신 예수님 렘브란트의 예수님과 마태오가 처음 만난 장소는 세관이었다. 마태오는 세리였다. 유다인에게 세리라고 하면 창녀에 버금가는 죄인이었다. 세리는 유다인 사회에서는 배척을 받는 직업으로 같은 유다인들에게 두 배 내지 세 배의 세금을 징수하는 등 부당한 이익을 취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로마제국의 앞잡이와 같은 일을 하는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의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했고 겉으로는 내놓고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경멸했다. 당시에 로마의 징세 제도에서 세리들은 미리 담합을 벌여 다음 해의 세금 징수권을 따냈다. 세리로 등용된 이들은 자신이 사용한 돈 이상으로 이익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통행세가 많은 비중을.. 2025. 5. 1. 66. ‘천둥의 아들’ 충직한 제자 야고보 루벤스 세계 어디서나 간호사가 되면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물려받자는 뜻에서 '나이팅게일 선서'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나이팅게일(1820~1910)은 간호사로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54년 크림 전쟁으로 부상병이 많이 발생하여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녀는 이 뉴스가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확신을 갖고 야전병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여성이 전쟁터에 가서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은 없어 나이팅게일의 부모님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거의 잠도 자지 않은 채 부상한 병사들을 돌보았다. 늦은 밤에도 램프를 켜서 들고 부상병들을 간호하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이런 봉사의 모습은.. 2025. 5. 1. 65. 간음하다 붙잡혀 죽게 된 여성 렘브란트 구약시대에 여성은 남자의 재산목록 중 하나로 매매가 가능한 존재였다. 그래서 여성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격리되었고 철저히 아버지나 남편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최근에도 이슬람 지역에서 여성이 몹쓸 짓을 당하고 집에 오면 가족 중 오빠나 사촌들에게 피해를 당한 여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명예살인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가장(家長)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딸이나 아내, 친척 여성을 살해하는 범죄로 매년 5000여 명이 명예살인으로 목숨을 잃고 있고, 실제로는 그 이상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악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있었다.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아내나 남편이 아닌 자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은 십계명의 제6계명에서 금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간음의 심각성을 알리며 간음을 우상 숭배 죄의 표상으로.. 2025. 4. 13. 64. 가장 용맹스럽고 멀리 복음을 전한 토마스 카라바조의 인류 최고의 의사로 칭송받는 슈바이처(1875~1965)는 “생명을 북돋워 주는 것은 선이고, 생명을 부수고 가로막는 것은 악”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의사, 신학자, 음악가, 사상가로 당대의 최고 천재였다. 다재다능한 그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질병으로 혹독한 고통당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의사가 되어 이들을 위한 진료에 평생을 바쳤고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52년 노벨상을 받았다. 슈바이처는 노벨상을 탔을 때에도 그 상금을 모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사용했다. 마흔이 다 된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반대가 심했다. 편안하고 여유 있게 일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난데없이 아프리카로 가는 슈바이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온갖 독벌레와 세.. 2025. 4. 6. 63. 진리를 찾는 진실한 사람, 바르톨로메오 루벤스의 학과 예술이 발달했던 아테네에서 거지꼴을 한 노인이 거리에서 큰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노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며 사는가?”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표현했다. 부자나 관리, 유명 인사가 되겠다고 자신의 꿈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노인은 “돼지가 되어 즐기기보다는 사람이 되어 슬퍼하겠네. 사람은 먹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먹는 것이니까”라고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였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에게 찾아왔다. 그때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부패한 정치가와 학자들을 비판하며 올바르게 .. 2025. 3. 30. 62. 열혈당원이었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시몬 프란체스코 모라티 .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 소재. 출처 위키미디어 독립운동가 중에서 이봉창 의사(1900-1932년)는 처음으로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한국인의 용기를 드러낸 인물이다. 오사카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어려운 생활이 일본인의 식민정책에 연유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1931년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스스로 찾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드디어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애국선서식과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슬퍼하는 김구 선생을 오히려 위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봉창 의사는 사전답사를 하고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2025. 3. 23. 61. 마지막까지도 사랑을 설교했던 사랑의 사도 요한 루벤스의 서울 성북동의 고즈넉한 언덕에 유명한 길상사가 있다. 본래는 대원각(大苑閣)이란 이름의 건물이었다. 주인이었던 김영한 선생은 평생을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 그녀는 20살 때 23살의 청년 시인 백석(白石) 백기연을 만났다. 젊은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서로 똑똑해서 대화도 정말 잘 통했다.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백석의 집안에서 기생(妓生)인 자야를 반기지 않았다. 백석은 자야와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만주로 도망하기로 했지만 자야가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재인 백석의 앞길을 자신 때문에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백석은 6·25전쟁 후 사회주의자로 북쪽에 머물며 문학의 꿈을 펼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공산당의 압력으로 결혼하고 가정을 이뤘다. 그 소식을 .. 2025. 3. 16. 60.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바오로의 회심 발랑탱 드 불로뉴 ‘1654년 11월 23일 밤의 회심’이라 불리는 파스칼(1623-1662)의 초월적인 체험은 지금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는 말을 남긴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은 39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인류에 남긴 영적 유산은 무척 크다. 파스칼은 11세 때 이미 ‘음향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썼고, 16세 때 유명한 수학 논문을 발표했던 천재였다. 현재 사용하는 컴퓨터의 전신인 전자계산기를 발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회개 사건은 하느님의 세례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이 초월적인 체험 이후로 파스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쾌락에 빠진 방탕한 생활을 완전히 끊고 신앙을 생활의 신조로 삼는 그야말로 새사람이 되었다. 그는 회심한 후 매우 어렵게 지내.. 2025. 3. 9. 59. 예수님께 베드로를 소개한 동생 안드레아 루벤스 예전에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님과 함께 그리스 성지를 순례할 때였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파트라이 지역에 가까워지자, 옆에 앉은 염 추기경님은 많이 상기한 듯 보였고 눈가엔 이슬이 살짝 비쳤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파트라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도시에 들어서자, 곳곳에 많은 X자 모양의 십자가가 눈에 띄었다. 안드레아 사도가 스승과 같은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이 없다고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묶여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X자 모양의 십자가는 ‘성 안드레아 십자가’로 알려져 있다. 염 추기경님은 어두운 성당에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 말없이 기도하셨다. 밖에 나오면서 평소에는 감정을 잘 안 드러내는 염 추기경은 눈가가 촉촉해져 “여기를 평생에 꼭 한번 오고 싶었어. 이제야 .. 2025. 3. 9. 58. 주님에 대한 사랑이 바위처럼 단단했던 베드로 루벤스의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은 중요한 가톨릭 성지 가운데 하나이며, 로마 여행의 랜드마크가 된 곳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종교와 예술, 역사가 어우러진 세계적인 순례 장소요 박물관이다. 교회에 따르면, 기원후 67년에 순교한 로마의 초대 주교인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이 건립됐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4세기이래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현재의 대성당 건설은 1506년 4월 18일 시작되어 한 세기 넘는 공사 끝에 1626년 완료되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돌’ 또는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petra)에서 유래했다.(마태 16,18 참조) 성 베드로는 순교 때 스승과 같을 수 없으므로 머리를 아래로 두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유해는 바티카누스 언덕 위.. 2025. 2. 23. 57. 예수님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 여성 제자들 라파엘로의 여자대장부로 불리는 복자 강완숙(골룸바)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역할이 컸다. 강완숙은 결혼 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리스도교 신앙에 이끌렸다. 강완숙은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국교회의 초석을 세우는데 노력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는 신자들의 옥바라지를 하다 자신도 옥에 갇히기도 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강완숙은 모든 교회의 대표인 ‘여회장’으로 임명됐다. 당시의 양반사회에서는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강완숙은 전교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완숙은 같은 신자의 고발로 관가에 잡혀갔다. 관리들은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 2025. 2. 16. 이전 1 2 3 4 ··· 6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