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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10

[그때 그 순간 40선] 15. 앵베르 주교의 사목활동 앵베르 주교, 제사 음식 나눔·전통 혼례 인정… 우리말 기도문 새롭게 번역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1837년 겨울 조선 땅을 밟은 첫 주교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모방 신부가 조선에 첫발을 딛고, 그 해 겨울 세 신학생을 유학 보내면서 대신 중국에 있던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1년 후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Imbert) 주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주교로서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 후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하기까지 조선 교회는 3명의 선교사가 이끄는 대목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앵베르 주교의 사목 방침은 어떠했을까? 앵베르는 사제 수품 후 중국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되어 12년간 사목활동을 하면서 티베트와의 국경에 모팽(Moupin) 신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2024. 4. 15.
[그때 그 순간 40선] 13. 브뤼기에르 주교와 조선대목구 설정 <하> 선교 염원했던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96년 만에 조선 땅 밟다 중국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관 담당 의사 마티뇽 박사가 1897년 11월 29일 마가자 부락을 방문해 찍은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사진. 마티뇽 박사는 이 사진을 당시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냈다. 이로써 무덤 위치를 알게 된 뮈텔 주교는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를 서울로 옮겨 용산성당 성직자 묘역에 안장한다 1835년 10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835년 10월 20일에 중국 마가자(馬家子) 교우촌의 펠리쿠(別拉溝) 지역에서 선종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모방 신부가 ‘피엘리쿠(Pielikeou)’로 적고 있는 이 지역은 현재의 내몽골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송산구(松山.. 2024. 4. 2.
[그때 그 순간 40선] 12. 브뤼기에르 주교와 조선대목구 설정 <중> 그레고리오 16세 교황, 파리외전에 선교 맡기고 조선대목구 설정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서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 1835년 9월 28일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 포교성성,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 제안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조선 선교의 제안을 받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는 현실적으로 그 일이 실행 가능한지 먼저 파악하고,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신중히 결정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파리 본부의 입장은 우선 조선 선교지를 맡기에는 선교사 인원이 부족하고 재정적 후원도 불확실하며, 가장 큰 문제는 조선에 들어갈 방법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의 운용방식은 단일 총장제에 의한 최종 결정방식이 아닌, 회칙에 따라 본부 지도자들과 각 지역 대목구장 주교들의 협의로 운영하는.. 2024. 3. 24.
[그때 그 순간 40선] 11. 브뤼기에르 주교와 조선대목구 설정<상> 브뤼기에르 주교 “제가 조선에 가겠습니다” 선교 의지 피력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 마침내 교황청에 전달된 조선 교우들 편지 1811년과 1825년 전후로 보낸 조선 교우들의 편지는 마침내 교황청에 전달되었고, 그러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또한, 1816년 이후 정하상(바오로)의 중국 북경 왕래와 유진길·조신철 등의 활동은 마침내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과 1834년 1월 중국인 유 파치피코(여항덕) 신부의 입국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미사와 성사의 은혜를 받고 싶은 신자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런데 여기 조선대목구가 설정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교사가 있었다. 바로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 2024. 3. 18.
[그때 그 순간 40선] 10.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 “신부님을 보내 주시어 저희 교우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신유박해로 하나뿐인 목자 주문모 신부를 잃은 조선 신자들이 1811년 성직자 영입을 청하기 위해 북경교구장(수자 사라이바 주교)과 교황(비오 7세)에게 보낸 편지. 이른바 ‘신미년 서한’이라 불린다. 신유박해 당시 극형에 처해져 목숨을 잃은 신자들 수와 그들의 생전 공적 등을 담았다. 특히 주문모 신부·강완숙·윤점혜·이순이·정약종·최필공·황사영 등 7명과 더불어 박해 당시 성인처럼 시종일관 굳세고 바른 자세를 보인 순교자 43명의 행적을 실었다 북경 주교·교황에게 성직자 파견 다시 청원 목숨을 건 피난생활을 하면서 겨우 교우촌을 일구어 가며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은 찢긴 기도서를 찾고, 다듬어 기도의 삶을 이어가면서, 다시금 성사를 받을 .. 2024. 3. 10.
[그때 그 순간 40선] 9. 교우촌과 목자 없는 신앙생활 목자 잃은 교우들, 산속에 숨어들어 교우촌 이루고 믿음 지켜 한국교회사연구소 등에서 보존하고 있는 「텬쥬셩교공과(천주성교공과)」 필사본과 목판본·활판본 등 원본들. 「천주성교공과」는 1862년 목판으로 인쇄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로 1969년 「가톨릭 기도서」가 나올 때까지 100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기도서로 사용됐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주문모 신부 순교로 다시 목자 없는 교회로 1801년의 박해로 조선 교회는 하나밖에 없는 목자였던 주문모 신부를 잃었다. 교우들의 삶을 한마디로 ‘기도와 성사생활’이라고 할 때, 이제 반쪽인 성사(聖事)는 거행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참된 성사를 위해서 수없이 북경을 오가며 선교사를 요청했건만, 6년이라는 짧은 활동 끝에 순교로 끝을 맺고, 조선 교회는.. 2024. 3. 3.
[그때 그 순간 40선] 8. 신유박해(1801년) ‘무부무군(無父無君)’ 명분으로 천주교 대박해… 다시 목자 없는 교회로 신유박해 당시 처형장인 서소문 밖 네거리로 끌려가는 순교자들을 묘사한 닥종이 인형. ‘박해 이야기’를 주제로 한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정미숙 수녀의 작품으로, 2013년 2월 서울 중림동약현성당 내 서소문순교자기념관에서 전시됐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첫 번째 대박해 1801년 신유박해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첫 번째 대박해로, 1801년 1월 10일(음)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하여 12월 22일(음) ‘척사윤음’으로 종결되었다. 흔히들 박해의 원인을 사회·정치·종교적 이유로 설명한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은 단 한 가지의 이유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맞물려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처.. 2024. 2. 25.
[그때 그 순간 40선] 7. 주문모 신부의 생애와 사목활동 조선 파견 첫 선교사 주문모 신부, 양떼와 함께 기꺼이 순교 서울대교구 새남터 순교성지에 있는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흉상 한국 천주교회에 공식 파견된 첫 선교사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공식적으로 파견된 첫 선교사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다. 그는 중국 강남 소주부 곤산현 출신이었다. 20세에 혼인한 적이 있지만 3년 만에 자녀 없이 부인을 잃었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다가 이를 포기하고 북경에서 신학을 배우고 구베아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42세의 늦은 나이에 조선 선교사로 파견된 해가 1794년 겨울이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인길이 마련한 집에서 6개월간 조선어를 배우면서 성무활동을 거행하다가 밀고되어, 피신 생활을 하다가 주로 강완숙의 집에 머물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교우들과 만났다. 따라서.. 2024. 2. 18.
[그때 그 순간 40선] 6.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입국과 북산사건 주문모 신부 대신 잡혀간 최인길, 윤유일·지황과 함께 순교 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키려고 가짜 신부 행세를 한 최인길 마티아. 그림=탁희성 화백 1794년 12월 중국인 주문모 신부 입국 ‘진산사건’의 여파로 윤지충·권상연 외에도 고난을 겪은 이들이 있다. 먼저 한국 천주교회의 공동체를 함께 시작했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심문을 받고, 처음에는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다. 그러나 팔십 노모가 더는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이른바 겉으로는 서학에서 떠났다고 하는 ‘입술 배교’를 하게 되었고, 유배지는 충청도 예산현으로 바뀌었다. 그는 심문 중에 얻은 상처로 인해서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종하였다. 그리고 제사 거부에 동참한 이들로 정약종과 정철상 부자, 윤지충의 동생 윤지.. 2024. 2. 4.
[그 순간 40선] 5.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주교구 초남이성지 성해 안치실에서 현시 중인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복자(사진 가운데)와 권상연 야고보 복자(왼쪽), 1791년 신해박해 순교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복자의 유해. 가톨릭평화신문 DB 구베아 주교의 ‘조상제사 금지’ 사목 지침 윤유일(바오로)의 두 번에 걸친 북경 파견과 구베아 주교의 사목 지침은 그동안 의문시되었던 조상 제사 금지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구베아 주교가 보내준 사목 서한은 남겨져 있지 않지만, 그가 교황령을 근거로 조상 제사 금지를 명했으므로 정확한 지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자의 사당(祠堂)에서 공자를 공경하며 예식, 의례 그리고 제사를 거행하는 것은 용인되어서.. 2024. 1. 28.
[그때 그 순간 40선] 4. 정미(1787년) 반회(泮會) 사건 구베아 주교, 모든 성사 거행 중단과 조상 제사 금지 지시 「송담유록」에서 1787년 정미반회 사건을 다룬 대목 1787년 반촌에서 천주교 서적 연구하다 발각 평신도 성직제도가 한참 비밀리에 실천되고 있을 때, 한양의 성균관 근처 김석태의 집에 모여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다가 유생 동료들에게 들킨 사건이 있었다. 이를 1787년 김석태의 집이 있던 반촌(泮村)에서 모임을 했다고 하여, 반회(泮會) 사건이라고 부른다. 1787년 겨울,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여문(儷文: 4,6구로 이루어지는 변려문)을 짓는다는 핑계로 김석태의 집에서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하고 젊은이들을 유혹하여 설법(說法: 강론이나 설교를 가리키는 말을 당시에는 불교의 설법으로 표현함)을 하였다. 유생 동료였던 이기경이 그들의 여문을 보니.. 2024. 1. 22.
[그때 그 순간 40선] 3. 평신도들로만 이뤄진 성직제도 지역별로 평신도 성직제도 운영, 미사 집전하고 성사 거행 한국 천주교회 초기 미사를 인형으로 재현한 모습. 서울대교구 가회동성당에서 전시 중이다. 출처=서울 가회동본당 홈페이지 주교 역할 이승훈, 미사집전자 10명 선발 김범우의 명례방 공동체에서의 집회는 최소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강론이 이루어지는 말씀의 전례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인다. 이벽이 “설법(說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강론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을사추조 적발사건(1785년)이 있었던 후, 이 집회는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에 대한 그리움과 열정은 말씀의 전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성사(聖事)의 거행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를 실행하는 데 주도했던 이승훈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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