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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2213

(16) 모세의 대변인 아론 아론, 17세기 러시아정교회 이콘 게티즈버그 연설(Gettysburg Address)은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연설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라는 대목은 미국 역사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되고 가장 위대한 연설로 평가된다. 명연설은 세상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고 국민을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 있다. 2004년 7월 미국 보스턴에서 3박4일 동안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치인들은 당원을 대상으로 연설을 했다. 보통 정치가들의 연설은 지루한데 정치신인 버락 오바마의 연설에는 기립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오고 단 몇 분 만에 무명에 가까웠던 오바마는 벼락스타가 되었고.. 2024. 4. 15.
12. 주교품을 받다 1829년 주교품 받아… 박해받고 있는 조선 교회 성모님께 의탁 방콕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내부. 샴대목구 부대목구장이자 갑사의 명의 주교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 6월 29일 샴대목구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에서 플로랑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교황, 샴대목구 부대목구장 주교로 임명 1829년 5월 8일 방콕에 도착한 서신 꾸러미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보낸 공동 회람뿐 아니라 레오 12세 교황(재위 1823~1829)이 서명한 3통의 소칙서(Brevis)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샴대목구장인 플로랑 주교에게, 나머지 2개는 저에게 보내온 소칙서였습니다. 레오 12세 교황이 1828년 2월 5일 자로 서명한 칙서들이 그제야 수신인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제게 “브뤼기에르 .. 2024. 4. 15.
11. 조선 선교를 자원하다 북경교구·파리외전 모두 조선 선교 거절… “제가 가겠습니다” 제22대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마카오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제안한다. 카펠라리 추기경은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 즉위해 조선대목구를 설정한다 포교성성, 북경교구에 조선 사제 파견 요청 교황청 포교성성이 직할 선교 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요청한 배경을 좀더 설명하겠습니다. 1818년 1월 6일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마카오에서 선종했습니다. 박해로 북경에 들어가지 못한 교구장 사라이바 주교를 대신해 총대리 포르투갈 라자로회 리베이로 누네스(Ribeiro Nunes, 1767~1826) 신부가 조선 교회를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추기경 회의를 .. 2024. 4. 15.
10. 방콕에서 조선 선교 관할 여부 묻는 소식을 듣다 “제가 이 일을 맡고 싶습니다. 제가 조선에 가고 싶습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샴대목구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주교관에 머물며 신학교 교수로, 본당 사목자로,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선교사로 2년간 활동했다. 1922년 방콕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Kraus, Johansen 1827년 방콕 도착 후 곧바로 선교사로 활동 1827년 6월 3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방콕 도착 후 곧바로 선교사로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저의 첫 소임으로 신학교 운영을 맡겼습니다. 무엇보다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전 프랑스 카르카손교구 대신학교 교수로 오랜 기간 재직한 바 있어 신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2024. 4. 15.
9. 리고르를 거쳐 방콕에 도착하다 마카오 떠난 지 6개월여 만에 첫 선교 임지 방콕에 도착하다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은 리고르 임금의 배려로 리고르에서 배를 타고 17일간의 항해 끝에 방콕항에 도착했다. 사진은 플로랑 주교가 거주했던 방콕 차오프라야 강 언저리에 있는 성 십자가 성당. 플로랑 주교가 활동하던 당시 성 십자가 성당은 목조 건물이었다. 구글 캡처 리고르 임금 배려로 방콕까지 배로 이동 탈롱(Thalon, 오늘날 파탈룽)에서 마침 순시차 이곳에 온 리고르 왕국의 임금을 예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300명의 호위병과 후궁 25명을 거닐고 저를 맞았습니다. 리고르 임금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없는 것 말고는 훌륭한 분입니다. 호감을 주는 인상이고 선의와 자애가 넘치는 분입니다. 그는 상냥하고 인기가 있으며 외국인들을 반깁니다. 정의를.. 2024. 4. 15.
8. 케다에서 탈롱까지 호위병과 함께 코끼리 타고 밀림 헤쳐가며 탈롱으로 향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케다에서 가톨릭 신자인 샴 왕국 대사의 도움으로 지역 관장인 리고르 왕자를 만나 스님과 똑같이 환대받았다. 폐허가 된 케다 렘부의 예수 성심 성당. Nutmeg books 페낭 도착 후 행선지 모두 뒤틀어져 1827년 1월 12일 페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한 프랑스인 선장이 타밸(Tavael)과 미얀마 남부 지역인 메르기(Mergui)를 거쳐 저를 샴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페낭의 선교사들은 이 제안을 환영했고 저 역시 동의했습니다. 페낭에 머무는 동안 장 바티스트 부쇼(Jean Baptiste Boucho)ㆍ바르브(Barbe) 신부가 사목하는 토종(Ta.. 2024. 4. 15.
7. 샴대목구로 파견되다 ‘조선 선교’ 마음에 품고 새 선교지 태국 샴대목구로 떠나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1826년 12월 마카오에서 선교지로 배속받을 당시 샴대목구는 샴과 케다(말레이시아 북서부 지역), 피라, 리고르 왕국의 모든 지역과 라오스 왕국 일부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림은 샴대목구 관할도. 구글 캡처. 동료 선교사 페코 신부 선종으로 임지 변경 저의 선교 임지가 확정됐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바루델(Jean-Louis Baroudel, 1801~1866) 신부는 제게 샴(태국)으로 떠날 것을 명했습니다. 저는 파리를 떠날 때 코친차이나 선교사로 내정돼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이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본부에서 파견될 때 장상으로부터 선교 임지를 통보받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처럼 교황 파견 .. 2024. 4. 15.
6. 마카오에 체류하다 조선 교우 성직자 영입 운동에 감복… “조선 선교는 저의 운명” 프란치스코 샤싱 주교. 1826년 10월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에 도착했을 당시 교구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1826년 10월 중순 마카오에 도착하다 저는 1826년 10월 중순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 아래 있던 마카오교구는 작은 형제회 출신 프란치스코 샤싱(Francisco de Nossa Senhora da Luz Chacim) 주교가 1804년부터 교구장으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또 포르투갈에서 파견된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예수회, 라자로회 수도자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마카오에는 교황청 포교성성 대표부와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의 거주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움피.. 2024. 4. 15.
5. 선교 보호권과 교황청 포교성성 스페인·포르투갈 선교 보호권 악용 폐단 없애려 포교성성 신설 교황 파견 선교 사제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넉 달 보름 동안 선교사 양성 교육을 받은 후 1826년 2월 5일 선교지인 코친차이나를 향해 출항했다. 샤를르 쿠베르탱, ‘출발’, 1868,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이 그림은 쿠베르탱이 성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위앵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자신이 참석했던 1864년 7월 15일 거행된 이들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의 파견식을 회상해 그린 작품이다 선교사 양성 교육 받고 선교지로 향하다 저는 1825년 9월 17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넉 달 보름 동안 선교사 양성 교육을 받은 후 교황 파견 선교 사제로 임명됐습니다. 그리고 1826년 2월 5일 보르도 항에서 선교지 코.. 2024. 4. 15.
4.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그리스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의 빛 비추는 선교사가 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카르카손교구에서 10년간 사제 생활을 한 뒤 33세로 1825년 9월 17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전경 1825년 9월 17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저는 1825년 9월 17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습니다. 사제수품 10년 차 서른셋 나이에 뒤늦게 ‘교황 파견 선교 사제’가 되려 합니다. 스물세 살에 사제품을 받고 카르카손교구 소신학교 교사로 3년간 생활한 후 대신학교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고작 스물여섯에 철학의장이 됐습니다. 이후 1818년 7월 19일 카르카손교구 명예 참사회 사제로 임명됐습니다. 저는 대신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 신학생들에게 늘 “하느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비신자들의 구.. 2024. 4. 15.
3. 1815년 사제품을 받다 교황 파견 선교 사제가 되기 위해 파리외방전교회로 떠나다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 나르본의 작은 마을 레삭 도드에서 태어났다. 사진은 오드 강과 오르비외 강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레삭 마을 전경.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부모님께 작별을 고하는 편지를 쓰다 “사랑하는 부모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제까지 지상에서 아낌없이 사랑해온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되었기에 부모님께 이 서한을 올립니다. 우리를 구원하고자 당신 독생 성자를 희생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두 분의 아들인 저를 요구하십니다. 어찌 그 희생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부족한 제가 양심을 깊이 성찰하면 할수록 은혜롭게도.. 2024. 4. 15.
2. 1824년 조선 교우들이 교황께 보낸 편지를 접하다 제가 주님의 선교사가 되어 조선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1824년 조선 교우들이 레오 12세 교황에게 쓴 편지의 라틴어 번역본. 이 편지를 번역한 움피에레스 신부가 마카오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그 내용을 전했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처음으로 자신이 조선 선교를 자원하겠다는 뜻을 카르카손교구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밝힌다 조선 교우들이 레오 12세 교황께 보낸 편지를 접하다 “중국 동북쪽에 조선이라 불리는 왕국이 있습니다. 지금 세기(19세기) 초반에 북경에서 개종한 어느 조선인 청년의 열성으로 천주교가 이 나라에 전래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자기네 동포들의 사도가 되어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습니다. 자신의 열성으로 그는 순교자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교회의 도움을 얻지 못한 신입 교.. 202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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