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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97

여섯 세대의 교우 모임에서 시작된 가좌동 본당 ▲150년이상 된 성가정 상본(크기-가로 35cm 세로 48cm): 위의 상본은 가좌동 본당의 여섯 세대 교우 중 한 분의 소장품으로 6.25사변 당시에도 어떤 재산보다 소중히 보관해 온 것이라 전하였다. ▲1984년 8월 본당 승격 첫 미사 ▲1987년 5월 성전 신축 기공식 미사 여섯 세대의 교우 모임에서 시작된 가좌동 본당 100년 된 가재가 나왔다하여 가재올(올=마을)이라 불렸던 가좌동의 첫 신앙공동체는 1983년 진주아파트와 주공아파트 1단지에 살던 여섯 세대의 교우들이 54일 묵주기도를 시작하며 이루어졌다. 3km가 넘는 비포장 도로를 오가며 석남동 본당으로 미사참례를 해야 하는 불편함 속에서도 교우들은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고 주변의 본당으로 각자 미사 참례 다니던 교우들을 한 공동체로 모아 .. 2007. 5. 27.
19. 한국전쟁과 답동본당의 수난 1950년 79위 한국 순교 복자의 은경축을 맞아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은 시복 25주년 기념 사업으로 새남터에 순교자 기념탑을 세우고, ‘사회 질서 재건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한국 주교단이 발표한 최초의 대 사회적 성명서로,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권위, 공평한 분배 원리, 농촌 문제의 해결과 직접적 노동 공동체의 확립 등 7개 항목으로 교회사적,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성명서를 발표한 해에 국가와 교회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이미 북쪽에서는 교회의 수난이 시작되고 있었다. 1949년 5월 덕원교구를 비롯한 각 교구의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되어 총살당하고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고 외국인 선교사의 해외 추방이.. 2007. 5. 27.
부평지역 첫 공소로 설정된 산곡동 본당 ▲1960년 백마장 공소 앞에서: 앞줄 중앙이 1957년 신학원을 수료하여 공소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친 박양순 요안나 자매 ▲산곡동 본당 축성식 후 : 나 굴리엘모 주교님과 태의선 로마노 신부님, 축하공연을 펼친 어린이들 산곡동 본당은 1970년에 설정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해방이전부터 부평지역에 처음 생긴 공소로서 신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라틴어 미사와 일본어 강론이 강요되던 때에 백마장에 거주하던 7~8가구의 신자들이 한 교우의 집에 모여 주일모임으로 미사를 대신하며 신앙생활을 해 나갔고, 해방이 되자 정식으로 답동 본당 백마장 공소로 발족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산곡동 인근지역에 미군기지가 들어와 당시 공소예절에 참여하는 미군들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산곡동 본당은 일찍부터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 2007. 5. 22.
18. 인천가톨릭학생회의 전신, 용심회 본당 설립 이후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와 활동이 요구되던 때에 여성평신도 단체인 ‘성모회’, ‘가톨릭 소년’, ‘가톨릭 청년연합회’의 뒤를 이어 1948년 최초로 인천 가톨릭 학생 중심단체인 ‘용심회’가 발족되면서 인천 가톨릭 학생 활동이 시작되었다. 해방 후 최초로 실시한 평신도 활동은 가톨릭 청년회에서 전재민 구제를 목적으로 1946년 성탄절 명동합창단을 초빙하여 인천 애관극장에서 개최한 전재민 구호 자선 음악회였다. 성황리에 이루어진 이 음악회는 많은 호평을 얻었으며 가톨릭 청년회는 이 음악회를 통해 100,000원의 수익금을 모았다. 이러한 평신도 단체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어 전교와 사목에 많은 공헌을 하는 가운데 임종국 신부는 1946년 남자 중학생들을 주축으로 정식 복사단을 조직하였다.. 2007. 5. 22.
1950년대 피난민들 사이에 생겨난 석남동 공소 1950년대 피난민들 사이에 생겨난 석남동 공소 인천 석남동 지역에 복음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10여명의 교우들이 10평 남짓한 방에서 공소예절을 하면서부터였다. 1961년 교우들은 어려운 생활 형편이었지만 조금씩 힘을 모으고 부평2동 본당의 도움을 받아 흙벽돌을 쌓아 석남공소(현 사랑의 선교원 옆 산비탈)를 설립하였다. 소박하고 아름다웠다는 석남공소는 1961년 1월 13일 부평2동 본당 소속으로 정식 인가되었으며 그 후로 열흘 뒤인 1월 22일에는 이호남 바오로(석남공소 초대 회장)외 5명이 부평2동 본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공소초기에는 10여명 정도가 미사 참례를 하고 주일 헌금이 120원 정도였으나 점점 신자수가 늘어 1년 후인 1962년 공소확장시에는 72명으로 증가하였다. 밀밭과 .. 2007. 5. 13.
17. 임종국 신부 재임기간, 활발한 평신도들의 활동 1935년 보좌 신부로 부임하여 노쇠했던 드뇌 신부를 도와 사목하던 임종국 신부가 1937년 제5대 답동본당의 주임신부로 취임하였다. 한국인 주임신부로는 첫 취임이었다. 신자들은 한국인 본당신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임종국 신부는 본당 운영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1937년 6월 1일 평신도 단체로는 가장 먼저 성모회를 발족시켰다.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 시대에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평신도 사도직 운동을 전개하여 온갖 고난과 박해를 견디며 이 땅에 복음을 심고 키웠다. 그런데 조선교구 설정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사목하면서 점차 성직자 중심이 되고 신자들은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를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개화기부터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회복운동과 애국계몽적 성격의 교육 운동이 활.. 2007. 5. 13.
요리강령(要理綱領)과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요리강령(要理綱領)과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요리강령은 천주교 그림 교리서로서 프랑스 파리외본 출판사에서 간행한 원본을 한기근 신부가 번역하고 뮈텔 민주교가 감준하여 1910년 성서 활판소에서 간행하였다. 서문에서 ‘성교 도리를 묻고 대답함과 상본으로 풀어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책이 그림 교리서 임을 밝히고 있다. 전체 4편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제1편은 종도신경, 2편은 성사칠적, 3편은 천주 십계와 성교사규, 4편은 기구, 사말, 죄악, 덕행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모두 68폭의 그림과 해설을 실어 간행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진다. 위의 요리강령은 양곡의 누산공소(인천주보 4월 29일 1면 참조)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1956년 인쇄본이다. 천주성교예규는 한국 천주교회의 장.. 2007. 5. 5.
16. 애덕의 실천과 복음선포를 겸행했던 인천 해성병원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의료사도직 분야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고아원의 운영이었다. 당시의 고아원에서는 병약한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 이들에게 세례를 주며 간호했다. 1893년 장질부사가 인천 항구에서 번지기 시작해서, 아무런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쓰러지는 환자가 많았다. 답동본당 드뇌 신부는 가난한 자들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손수 간호하며 돌보기 시작했지만 환자수가 많아 본당 사목과 겸하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본당 일을 돌보는 수녀들의 힘을 빌려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약을 무료로 주거나 근소한 값을 받기도 하고, 집에 직접 방문하여 치료해주며, 위험한 이는 대세를 주는 등 진료소로서의 역할이 점차 커졌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인천분원에서는 189.. 2007. 5. 5.
양곡 지역 신앙의 시작, 누산공소 양곡 지역 신앙의 시작, 누산공소 양곡지역의 복음 전파는 1880년경 서울에서 온 ‘서울할머니’가 누산리의 부농 홍순공의 집에 머물며 시작되었다. 서울 공덕동에 살던 60여세의 ‘서울 할머니’란 별명의 여전교사는 홍순공과 이웃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행주본당에서 세례를 받게 하였다. 홍순공은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1900년경 ‘서울 할머니’와 함께 누산리에 24평의 건물을 짓고 누산공소를 설립하였다. 누산공소는 행주본당의 관할 공소로 설정되어 매년 봄, 가을 판공성사와 함께 미사가 봉헌되었다. 그 후 영등포 도림본당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김포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고 1987년 양곡성당 신설과 함께 양곡성당에 편입되었다. 양촌면 누산공소를 시작으로 1924년 초대 공소회장인 민유식에 의해.. 2007. 4. 29.
15. 연평지역에 신학문을 가져다 준 해성강습소 15. 연평지역에 신학문을 가져다 준 해성강습소 답동을 중심으로 인천 육지에서 복음화와 사회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질 무렵, 인근 섬 지역에서도 처음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교육을 통해 주민 의식이 계발되기 시작했다. 황해도 해주만 앞바다에 위치한 작은 섬 연평도에는 1917년 황해도 해주본당 전응택 바오로가 임야 관리인으로 오면서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 전응택 바오로는 가족과 함께 연평도에 와 20평의 초가에 공소를 마련하고 초대공소회장이 되어 당시 미신을 숭상하던 연평도의 어민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였다. 1920년 전응택 공소회장의 장남인 전덕규 요한이 입도함으로써 복음화사업과 교육, 문화사업이 활발하게 싹트기 시작했다. 전덕규는 당시 서울 백동에 자리잡고 있던 성 베네딕도 수도.. 2007. 4. 29.
박순집 증거자의 묘 위에 세워진 용현동 성당 박순집 증거자의 묘 위에 세워진 용현동 성당 현재 용현동 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1976년까지 용현동 교회묘지로 사용되던 땅이다. 이 묘원에는 신앙의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인천주보 2월 4일자 4면 참조)와 인천박문학교 설립자인 전학준 으제니오 드뇌 신부(답동성당 제 4대 주임)등 교회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분들의 묘소가 있었다. 1970년대에 경인고속도로 연장 공사가 벌어지면서 인천시에서 용현동 교회 묘지를 이장할 것을 공고하여 검단면 단하리와 마전리에 새로 조성되는 교회 묘지로 집단 이장하였다.(박순집 베드로의 묘는 이장작업이 본격화되기 전에 1970년 절두산 성지로 이장되었고 비석도 용현동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다 세웠다. 2001년 박순집의 묘는 절두산에서 다시 갑곶성지로 이장되었다.) 용현동 성.. 2007. 4. 22.
14. 답동 본당 드뇌 신부의 선교·교육·의료활동 14. 답동 본당 드뇌 신부의 선교·교육·의료활동 답동성당이 명실상부한 선교의 거점으로, 그리고 인천 지역의 역사적인 건축물로 떠오르게 된 것은 1904년부터 1937년까지 무려 33년간이나 주임신부로 활동했던 제4대 전학준 으제니오 드뇌(全學俊, Eugene Deneux)신부 때부터다. 드뇌신부는 1899년부터 본당에 거주하면서 제3대 주임 마라발 신부를 도와 사목을 함께 했던 터라 본당과 인천지역 사정에 누구보다 밝았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일본인들의 교회부지 침입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답동 본당 부지를 침범하여 일본식 건축으로 집을 짓고, 본당에서 경계표시로 설치한 돌 표지판을 뽑아내는 등 부지에 대한 분쟁이 많았다. 드뇌 신부는 건축 공사를 중단시키고 뮈텔주교에게 사정.. 2007.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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