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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신자들의 근검절약 정신과, 섬지역 인재양성기관의 초석을 가져온 연평도

by 세포네 2007.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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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1959. 4. 22. 새 성전 축성 기념     우) 1950년대 해성유치원 아이들

신자들의 근검절약 정신과, 섬지역 인재양성기관의 초석을 가져온 연평도 성당

 

황해도 해주만 앞바다에 위치하고 옹진과 해주에서 피난온 실향민들로 구성된 연평도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1917년 해주에서 임야 관리로 섬으로 들어온 전응택(바오로)였다 (4월29일자 인천주보 4면 참조). 섬지역으로 무속 신앙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지만 전응택의 열심한 전교활동으로 많은 도민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또한 1922년 전응택의 장남 전덕규(요한)는 제2대 임야 관리인 강재규(베네딕도)와 협력하여 연평도 개척사업과 함께 인재양성을 위한 해성 강습소를 열어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39년 초가 강당 20평을 헐고 함석집으로 새로 건립한 30평의 규모가, 1953년 6월 20일에 60평으로 증축되었고, 사제관과 해성유치원을 세웠으며 1957년 6월 15일 본당승격을 대비하여 전답 7천 평을 매수하여 1958년 10월 15일 강당을 120평으로 증축하였다. 

연평공소신자들은 1957년 12월 성당 신축이 확정되자 성당 건축을 위해 직접 해변에서 돌을 운반하여 외벽을 쌓고, 성당 내부 벽 역시 산에서 채석한 자연석으로 쌓아 이중벽으로 된 현대식 콘크리트 돌집 성당을 건축하였다. 1958년 10월 20일 강주희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성당 신축공사를 맡아 이듬해 1959년 4월 22일 노기남 주교 주례로 새 성당을 축성하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연평도 신자들은 외부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남성 신자들의 금연과 금주, 여성신자들의 절미운동으로 기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로 많은 주민들이 육지로 떠나 신자수가 감소되자, 안타깝게도 1975년 이후에 덕적본당을 거쳐 도화동본당, 주안1동 본당 관할 공소로 이관되었다가, 1998년 2월 10일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어 아름다운 섬지역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연평도 지역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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