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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97

25. ‘소사의 빛’이라는 뜻을 가진 소명가정실습학교 25. ‘소사의 빛’이라는 뜻을 가진 소명가정실습학교 1950년 6.25 전쟁 후 빈농의 농촌마을 소사 땅에는 굶주림과 함께 배우고 싶어도 배울 길이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찾아왔다. 이에 소사본당 신성우 신부가 주머니를 털어 대학생 몇 명을 불러 성당 지하에서 야학을 계획하여 문을 열었.. 2007. 7. 15.
선학동본당 천장화 ‘구원과 심판’ 선학동본당 천장화 ‘구원과 심판’ 선학동본당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천장화 ‘구원과 심판’이 성당 제단 바로 위 둥그런 10m 높이의 대형돔에 그림엽서 8000장을 붙여놓은 크기의 8000호 규모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천장화 우측에는 한복차림의 김대건 신부와 순교자들이 천국으로 .. 2007. 7. 8.
텬쥬셩교공과(天主聖敎功課) 텬주셩교공과 -2권(제일 오른쪽)은 1887년 인쇄본 텬쥬셩교공과(天主聖敎功課) 1862년 간행되어 1969년 새로운 기도서인 ‘가톨릭기도서’가 나오기까지 100여년 간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공식 기도서로 사용된 책이다. 공과란 넓은 뜻으로는 매일의 기도를 뜻하고, 좁은 뜻으로는 주일기도와.. 2007. 7. 1.
24. 지역 주민을 위한 의료봉사에서 출발한 부평 성모자애병원 24. 지역 주민을 위한 의료봉사에서 출발한 부평 성모자애병원 1952년 인천의 두 번째 본당으로 설립된 부평본당과 함께 1955년 설립된 부평성모자애병원은 전쟁의 상처로 치유의 손길이 절실히 요구되던 당시, 고아들과 지역주민들을 위한 의료활동으로 부평지역 발전과 교세확장에 많은 .. 2007. 7. 1.
주안동본당(현 주안1동)의 활발한 빈민구호사업 주안동본당(현 주안1동)의 활발한 빈민구호사업 본당 설립 직후부터 시작된 주안동본당(현 주안1동)의 빈민구호사업과 무료진료활동은 복음선교의 중요한 몫을 차지했으며 당시 극빈자들의 생활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본당 설립 이전의 주안공소는 1926년 초대 공소회장 정성봉씨 댁(.. 2007. 6. 24.
23. 1955년 송림동 본당 설립 23. 1955년 송림동 본당 설립 한국전쟁의 참화에도 불구하고 인천지역의 교세는 날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인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던 지역에도 본당은 답동 본당 하나 뿐이었다. 임종국 신부는 많은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1954년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이듬해인 19.. 2007. 6. 24.
신자들의 힘을 모아 이룩한 장정리 공소(하점 본당) 신자들의 힘을 모아 이룩한 장정리 공소(하점 본당) 1958년 강화본당이 설정되고 전교활동이 한창 활발할 무렵, 강화 인근 곳곳에도 서울에서 내려온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교우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지역에는 1965년 장익진 바오로가 이충구의 자택을 빌려 .. 2007. 6. 17.
22. 인천에서 두번째로 설립된 부평본당(현 부평2동) 1952년 3월 부평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며 인천의 두 번째 본당으로 탄생하였다. 부평공소는 일제시대 조병창에 근무하던 직원과 노무자들 중 교우들을 위해 1941년 12월 28일 제물포본당(현 답동본당)의 공소로 설정되었고 당시 신자수는 20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점차 증가하여 1945년 해방 때에는 50여명을 헤아렸다. 그 뒤 부평공소의 본당승격을 추진한 것은 황해도 연안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김영식(베드로) 신부였다(왼쪽 사진). 김영식 신부는 연백 본당에서 보육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나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으로 피난한 김영식 신부는 전쟁으로 고아 수가 급증하자 다시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부산 피난 시절 미군 부대의 세탁소 일을 도와 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2007. 6. 17.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 송도의 신앙공동체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 송도의 신앙공동체 조선교회 초기 송도지역 함박리(1914년 부천군, 1940년 인천부로 편입, 1977년 연수동으로 됨)에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으며 송도 점말(조개고개)의 옹기를 굽던 흔적으로 보아 옛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송도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 옥련동) 전 송도공소 회장이었던 나금옥(베네딕도)의 조부가 1907년 대원군 시대 박해를 피해 고향 나주에서 피난길에 올라 이곳 점말에 정착하며 이 지역 신앙의 싹이 되었고 박동철(베드로) 등 공소 지도자들의 아낌없는 노력으로 송도지역의 신앙공동체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 이전 청학, 연수 지역은 도시 변두리 어촌이면서 농촌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 신자수는 구교집안 출신을 포함해서 15-20세대에 불과했으나 .. 2007. 6. 10.
21. 한국 최초의 사회사업 전문학교, 구산후생학교 1950년대에 들어서자 학리(學理) 탐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많은 학교들이 있었지만 당시 무엇보다 필요했던 전쟁 후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사회사업을 펼치는 등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교육하는 곳이 없었다. 윤을수 신부(왼쪽 사진)는 1956년 8월 독일 뮌헨에서 개최된 세계 사회 사업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가 서구의 사회 사업 구조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 사업이 보육원이나 양로원과 같은 소규모적인 것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사회 사업, 즉 지역 사회 개발면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에 우리 나라에도 그러한 사회 사업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느끼고,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사업가 양성을 목적으로 1956년 9월 1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벌응절리 산 4번지에 ‘구산 후생학교’와 .. 2007. 6. 10.
순교터에 피어난 신앙, 강화 성당 ▲1961년 강화 성당 영세식 - 2대 모토마 신부님과 함께 ▲그리스도 왕 의원(上), 구호물자 배급(下) 순교터에 피어난 신앙, 강화 성당 강화는 갑곶성지, 진무영성지, 황사영 생가 터 등 순교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중 성지로 개발되지는 못했지만 최인서, 장치성 등이 순교한 진무영 순교터는 강화성당에서 불과 100m 거리에 있다. 예로부터 해로(海路)를 통해 타지인들의 왕래가 잦았던 강화지역에는 비교적 일찍 복음이 전래되었다. 병인박해 얼마 후 1871년 이 아가다의 전입으로 신앙이 시작되었고 이 아가다의 딸 김부엉 루시아는 1918년 드뇌 신부의 중매로 영종도에 사는 안 베드로와 혼인하여 강화읍 대산리 3번지에서 본격적으로 전교를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후 흉년이 겹쳐 가톨릭 구제회에서는 .. 2007. 6. 3.
20. 한국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여학교, 박문여자중고등학교 학교 명(名)이 논어 박학어문(博學於文)에서 온 것으로 학문을 널리 배워 도에 이르는 인재를 배출하고자 하는 교육철학에서 비롯하였다는 박문여자중고등학교는 1940년 인천 소화고등여학교로 개교하였다. 설립자 고(故) 석계(石溪) 장석우 선생은(왼쪽사진) 1870년 2월 4일 경기도 강화군에서 출생하여, 젊은 시절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사업에 성공하자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하였다. 장석우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신문명을 배우게 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민족의 과제라고 여겼고, 더욱이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일제의 교육침략정책이 극에 달하던 시대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1940년 4월 27일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냈다. 하지만 재단 이사장은 일본인으로 하며 설립자는 .. 2007.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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