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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97

48. 인천교구 제2대 교구장 최기산 주교 착좌 2002년 4월 25일 인천교구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1999년 11월 10일 인천교구 부교구장으로 임명된 이후 나 굴리엘모 주교를 도와 인천교구를 사목하던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가 제2대 인천교구장으로 착좌했다. 이에 앞서 교구에서는 41년간 인천교구를 위해 헌신한 초대 교구장 나 주교를 위한 감사미사를 17일 사제단, 19일 교구 직원, 22일 전신자들이 참여하여 각각 봉헌했다. 나 주교는 1961년 인천교구 설정과 함께 교구장으로 착좌하여 ‘선교’에 중점을 둔 사목으로 2만 3천 명에 불과하던 신자수를 36만으로 성장시켰다. 행사 당일 모래바람이 심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과 내외빈이 참석하여 인천교구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했다. 당시 최기선 인천시장, 유정봉 김포시장 등 지역사회 유지.. 2008. 1. 6.
47. 인천교구 성소후원회 교구 성소후원회는 성직자와 수도자의 양적·질적 성장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 성소자 계발과 양성을 위해 필요한 재정적 지원, 성소후원회의 신심 생활의 성장을 격려하는데 그 설립목적을 갖고 1981년 5월 10일 발족하였다. 1981년 5월 10일 최기복 신부를 지도 신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982년 12월 30일 후원회원 1,800여명, 신학생 46명이었던 것이 1990년 4월 후원회원 12,000여 명(6.7배), 신학생 106명(2.3배)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는 성소후원회가 10여 년을 지내오는 동안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한 지도 신부들(이학노, 이찬우, 최기산, 박찬용)과 수녀들(전 마리마텔, 양 아나다시아, 김 마리아, 김 로즈마리)의 노고에 대한 주님의 보답이라 할 수 있다. 성소 .. 2008. 1. 6.
22평의 계사(鷄舍)를 빌려 시작한 십정동 본당 ▲ 1985년 임시벽돌로 처리된 성당에서의 미사 1983년 계사에서 보내는 성탄절(초대주임 황상근 신부) 22평의 계사(鷄舍)를 빌려 시작한 십정동 본당 80년대 초 십정동 지역은 솔밭과 논, 염전이 대부분이었으나 인천시의 도시 계획으로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다. 1983년 9월 1일 주원본당에서 분당하여 920명의 신자수로 십정동 본당이 설립되었다. 설립 후 십정동 본당 신자들은 본당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협동심과 따뜻한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었다. 본당 설립 15일 만에 사목회를 구성하고, 문순녀(데레사) 자매의 도움으로 22평의 계사를 빌려 9월 4일 첫 주일미사를 봉헌하였다. 또한 교리실이 없어 신자들의 집에서(강 비비안나, 노 바오로) 주일학교 및 예비자교리를 시작했다. 그 해 성탄절에는 골조공.. 2008. 1. 6.
평신도 활동의 모범을 보인 삼정동 본당 평신도 활동의 모범을 보인 삼정동 본당 삼정동 본당은 1971년 5월 부천군 오정면 삼정리 327번지의 대지 1769평을 매입하여 2층 건물을 착공하면서 그 터전을 일궜다. 그리고 그 해 9월 12일 소사 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오정 본당’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총 신자 수 637명으로 시작한 이 곳은 1973년 2월 여월리 공소 건설과 함께 그 규모가 확대되었고, 1974년 6월 성전 기공식을 갖고 1975년 2월 완공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한 제1대 심바오로 주임신부에 이어 제2대 오미카엘 신부가 부임하면서 명도회, 청년회, 복사단이 결성되었고 청년회를 주축으로 ‘천지의 모후’라는 이름의 주보가 자체 발행되기도 했다. 그 후 70년대 후반 본당 내에 230권의 도서가 .. 2008. 1. 6.
시흥지역의 등대 역할을 하는 신천본당 좌측) 성전 위에 계시는 예수성심상 우측 위) 1960년대 초 신천리 공소, 아래) 1980년 5월 11일 새성전 기공식 시흥지역의 등대 역할을 하는 신천본당 신천본당이 자리 잡고 있는 시흥시 신천동은 병인박해 때부터 대골 공소를 설립하여 신앙을 지켜온 정춘화, 윤선기 등 신앙선조의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대골, 새말 공소 다음으로 신천리 공소가 탄생했다. 1977년 철거민들의 정착촌 ‘복음자리’ 마을이 신천리에 형성되자 공소신자들은 이들과 협력하여 교구에 본당 설립 인가를 청하였고, 1979년 2월 심곡본당 소속 신천리 공소에서 신천본당으로 승격했다. 1980년 5월 11일 새 성전 기공식을 갖고 1984년 완공하였으며, 본당 설립 후 연평균 150명이 입교하는 등 꾸준히 신자 수가 증가하여 1987년 .. 2007. 12. 16.
46. 인천교구의 과거와 현재 인천은 약 4백2십만의 인구로 동북아의 관문이며 서해의 관문 황해권 중심항만 도시로, 나라에 큰 외침(外侵)이 있을 때에는 전화(戰禍)를 많이 입었기에 일찍부터 복음의 씨가 전해졌다. 1961년 인천대목구 설정당시 교구의 관할지역은 인천시, 부천군 도서(육지제외), 강화군, 김포군, 황해도 옹진군을 포함했다. 당시까지 1명의 주교와 15명의 신부가 탄생한 지역을 관할하게 된 인천 교구는 답동, 송림동, 부평(현 부평2동), 김포, 강화 등 5개 본당과, 메리놀회가 전교하면서 설립된 도화동, 북성동(현 해안), 연평도, 백령도본당을 포함하여 총 9개 본당을 관할하게 되었다. 1962년은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제도가 도입된 해로서 의미가 큰 해였다. 이어 한국 가톨릭 교계 제도의 설정에 따른 각 교구의 설정 .. 2007. 12. 16.
45. 인천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발족 평신도사도직 협의회는 ‘평신도 사도직 교령’에 근거를 두고 구성된 평신도의 협의 기구로서, 복음선포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하는 활동을 펼치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인간 구원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단체는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지도로 구성된 명도회이다. 1968년에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발족되었고 이어 전국 각 교구와 본당에도 구성되어 교회발전에 기여해오고 있다. 인천 교구에서는 1967년 2월 28일 교구 사목 위원회가 구성되어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전개했다. 이어 1979년 3월 18일 인천시 중구 답동 3번지에서 각 본당 평신도 대표 40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열고 회칙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2007. 12. 16.
‘섬김과 믿음의 공동체’ 여월동 본당 좌) 현재의 여월동 본당 / 우) 1975년 세례 후 첫영성체 기념 섬김과 믿음의 공동체’ 여월동 본당 지형이 반달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여월(如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여월동을 중심으로 원종동과 성곡동 교우들은 공소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삼정동 본당 주임 쉬미트 신부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1973년 교구에서는 공소부지 185평을 마련해주어 50여 평의 아담한 여월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공소 초기에는 20여명의 신자수로 시작되었지만,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으로 10년 후 800명의 신자수로 확장되어 1983년 10월 18일 여월동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옥슬리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본당승격 1년여 만인 1984년 12월 23일 성전건립공사를 완공하였다. 2006년 9월 17일 새 .. 2007. 12. 16.
지역사회에 열린 성당, 소사3동 본당 좌) 성전 건립 기공식(1988년 4월 24일) / 우) 하비에르 문고(교육관 1층) 지역사회에 열린 성당, 소사3동 본당 부천시는 서울과 인천의 중간에 위치한 서울의 위성도시이자 공업도시로 1970~80년대 한참 인구증가율이 높았다. 이에 늘어나는 신자수를 감당할 수 없어 1985년 1월 26일 소사본당과 역곡본당에서 분당하여 소사3동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세구 신부는 본당 신축 위원회를 조직하고 신설본당의 큰 과제인 성당 신축을 위해 힘썼다. 이웃본당의 지원과 독지가들의 성원, 알뜰한 집행, 신자들의 3개년에 걸친 신립금 납부로 1988년 4월 24일 기공식을 갖고 1년 2개월만인 1989년 6월 21일 새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 ‘지역사회에 열린 성당’, ‘봉사하는 성당’을 추구.. 2007. 12. 16.
100여년의 신앙 역사 안에 세워진 영종본당 좌) 현재의 영종본당 (뒷편 중앙이 성전) 우) 공소시절부터 미사 30분전에 33번씩 울려퍼지는 50여년된 영종본당의 종 100여년의 신앙 역사 안에 세워진 영종본당 자연도(紫燕島)라고 하며 인천시에서 해로로 약 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영종본당에는 약 100년전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송산(松山)과 돌팍재 등지에 천주교 신자가 살고 있었다. 1903년 답동본당의 영종공소로 설립된 후 답동본당의 신자수 증가로 1955년 송림동 본당 관할 공소로 편입 되었다. 공소에 수녀가 먼저 파견되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신자들이 마음을 모아 공소를 건축하였다. 1965년 3월 본당으로 승격, 첫 주임으로 시노트 신부가 부임하여, 어디든 신자가 있는 곳이면 그곳에 공소를 설립했는데, 이때 설립된 공소가.. 2007. 11. 25.
44. 1968년 인천교구 꾸르실료 출범 꾸르실료란 ‘복음화를 위한 단기 교육’과정으로 강습이나 피정과는 구별된다. 이 운동은 1940년대 스페인의 주교인 후안 에르바스(Juan Hervas) 주교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꾸르실료 운동은 1967년 5월 꾸르실리스타인 주한 미 평화봉사단장 케빈 오노넬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인천교구에는 1968년 1월 25일 인천 박문여고에서 남성 제1차 꾸르실료가 열렸고, 여성 제1차 꾸르실료는 이보다 8년 뒤인 1976년 7월 29일 ‘인천기도의 집’에서 실시되었다. 꾸르실료에서 강조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신심보다는 은총의 신심이다. 꾸르실료(cursillo) 운동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 가지 단계의 방법을 사용한다. 제1단계(the precursillo stage)로 환경이 다른 사람.. 2007. 11. 25.
염전밭에 일군 신앙, 주안5동 본당 염전밭에 일군 신앙, 주안5동 본당 1906년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제염을 생산했던 ‘주안염전’. 주안5동 본당의 뿌리를 다진 신자들은 당시 염전 인근에 살며 천일제염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1962년 주안공소 설립당시 주안공소 ‘염전 구역’으로 불리웠다. 1960년대 말 염전이 폐지되고 주안5동 일대는 공단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인천경제의 초석이 된 주안 산업 공단이 설립되고 많은 신자들이 이주해 오자 염전구역 신자들은 본당 설립 이전인 1973년부터 레지오를 창단하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해왔다. 1980년 4월 629명의 신자로 설립된 ‘염전 본당’은(1983년 ‘주안5동 본당’으로 명칭 변경) 초대주임 반유리 신부와 신자들의 일치된 노력으로 본당 설립 3년만에 신자수가 2배 이상 증가하여 1490명이.. 2007.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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