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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71

<그 후> (마지막회) 인생을 돌아보며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감사 또 감사 ▲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서울 혜화동 주교관 마당을 산책하는 김수환 추기경. 고단했던 삶의 뒤안길을 거니는 그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감사기도를 바친다. 내 나이 85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연히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66년 전인 1941년, 일본 상지대학에 갔을 때 학생 기숙사 사감이셨던 피스터 신부님은 나를 보고 기린아(麒麟兒)라고 하셨다. 행운아라는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말씀 그대로 나는 정말 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 비해 여러 가지 의미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기 위해 부모와 집 모든 것을 떠난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백배의 축복을 받고 내세에서는.. 2011. 3. 26.
<그 후> 7 - 에피소드 "사제의 길로 이끌어주신 어머니께 감사" 인생을 돌이켜보면 사람들 앞에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다. 그런데도 평화신문 독자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행여나 내 자랑이나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내 구술을 받아 정리하는 김 바오로 기자가 "오늘은 아주 쉬운 질문만 할테니 지체없이 즉답을 해주면 좋겠다"면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어떤 면을 찾아내려고 하는 건지 질문 내용이 하나 같이 쉬운 듯 하면서도 까다롭다. -늙으면 섭섭한 게 많다고 하는데? "노인네가 노여움 탄다는 말이 있다. 자식들 뜻은 그런 게 아닌데 그들 언행에 섭섭함을 느끼는 일종의 소외감이다. 나는 청력이 떨어져 보청기를 껴도 말이 잘 안 들릴 때가 있다. 이를테면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 자기들.. 2011. 3. 26.
<그 후> 6 - 추기경의 눈물 '황우석 사건' 보니 자괴의 눈물이... 난 눈물이 마른 남자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2005년 12월 중순이었다. 성탄절을 앞두고 평화신문과 대담을 하는 자리에서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진위 논란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다 그만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훔치는 사진이 일간지에도 실려 좀 당황스러웠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배아줄기세포 연구 논문의 조작 증거가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자 '황우석 신드롬'에 사로잡힌 국민들은 정신적 공황상태가 됐다. 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면서도 황 교수의 연구 성과에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사실이 아니기를….'하고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나 역시 참담한 심정이었다. 한 생명공학자의 연구 성과가 전 세계를 흥분케 하고, .. 2011. 3. 26.
<그 후> 5- 종교간 대화, 젊은이들에게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 선생 묘소를 참배하는 김 추기경. 대화, 화합하려면 내가 먼저 양보해야 2000년 5월 23일,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묘소에 참배했는데 이튿날 신문에 '가톨릭과 유교, 아름다운 만남'이라는 제목이 달린 내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조상 제사문제를 둘러싸고 유교 질서와 충돌해 피의 박해까지 겪은 천주교측 인사가 유교계 거목의 묘소에 찾아가 유교 예법으로 참배한 게 신선했던 모양이다.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심산상을 수상한 데 대한 답례로 그날 묘소에 가서 술을 붓고 예를 올린 것인데, 어느 신문은 "가톨릭과 유교가 해묵은 역사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화해했다"고까지 표현했다. 그런 긍정적 평가가 과분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가톨릭과 유교, .. 2010. 2. 14.
<그 후> 4- 나의 스승들 "저 같은 사람은 신부될 자격이 없습니다"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들어간 나를 거둬 사제로 키워준 고마운 스승들. 왼쪽부터 공베르 신부, 게페르트 신부, 장면 박사. 누군가 내게 한 평생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을 묻는다면 '신부가 된 것'을 꼽겠다. 소신학교 은사인 공베르(Gombert Antoine, 1875~1950) 신부님 말씀마따나 신부는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게 아니지만 여러 모로 부족한 내가 사제품을 받은 것은 일생 일대의 축복임에 틀림없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고 했다. 나도 인생 여정에서 많은 스승을 만났다. 특히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들어간 나를 거둬 신부로 길러준 스승들에 대한 고마움은 영원히 잊을 수 .. 2010. 2. 14.
<그 후> 3- 목자 잃은 북녘 양떼에게 달려가고팠지만... 여러번 방북 무산...양떼 위한 기도 영원히 어딘가에서 목자를 기다리고 있을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 애틋한 그리움과 슬픔이 밀려온다. 1991년 7월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장애인들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평화의 종을 울리고 있다. 내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 내 전부인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모습으로 오셔서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시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은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꺽지 않으시고, 심지의 불이 하늘거린다 하여 끄지 않으셨다. 심지어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2010. 2. 14.
<그 후> 2- 가난한 이들과 함께 못해... 용기가 없어서 '가난한 이들의 벗'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한다. 사진은 1990년 서울 용산 베들레헴의 집에 찾아가 성탄 밤미사를 봉헌하는 모습.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나고 두어 달 지났을 때다. 특강 요청을 받고 전남 순천에 내려간 길에 잠깐 짬을 내서 소록도에 들렀다. 소록도에 살고 있는 나환우 200여명과 미사를 봉헌한 뒤 그들의 뭉그러진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내 어찌 그들 가슴에 맺힌 한과 설움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펴놓고 복음으로 그들의 아픔을 위로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 2010. 2. 14.
<그 후> 1 - 사도 베드로처럼 통회의 눈물 쏟고 싶건만... 김수환 추기경은 아침식사를 마치면 숙소 마당을 두어 바퀴 산책한다. 지난해 가을, 건강을 기원하는 편지를 써갖고 부모와 함께 방문한 박지원(9)양과 낙엽 쌓인 마당을 걷는 김 추기경. 추기경 김수환(85).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은퇴한 지 만 9년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정겨운 벗이자 착한 목자로서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혜화동 할아버지'의 넉넉한 웃음과 힘있는 강론은 예나 지금이나 세파에 지친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가 된다. 2003년 5월부터 63회에 걸쳐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를 연재해 좋은 반응을 얻은 평화신문은 창간 19주년 특별기획으로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그 후'를 시작한다. 김 추기경이 은퇴 이후 삶과 신앙생활을 중심으로 들려주는 이 시리즈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큰 목자의 사상과 인.. 2010. 2. 14.
연재를 마치며 남은 삶 온전히 하느님께 맡길 터 인생을 하루에 비유하면 난 지금 해거름에 와있다. 정상에서 내려와 황혼 들녘에 서 있는 기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고향 풍경과 어머니 품이 느껴진다. 어릴 때 저녁이 가까워오면 신작로에서 서성거리며 행상나간 어머니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산등성이로 기우는 석양을 등지고 돌아오실 때가 많았다. 내 나이 82세. 하느님 곁으로 한발짝 한발짝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하늘나라에 가면 보고 싶은 어머니도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어본다. 요즘 병세가 위독한 선후배 신부님들 병문안을 가면 귀에 바싹 대고 이런 말을 되풀이한다. "하느님한테 맡기세요. 하느님한테 모든 걸 다 맡기세요." 이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 .. 2010. 2. 14.
은퇴 후의 생활 물러나자마자 석달 동안 미국, 캐나다 여행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혜화동 집무실을 찾아온 제주교구 한림본당 복사단 어린이들과 뜰을 거닐면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2002.11.16) 한평생 어떤 그리움을 가슴에 담아두고 살았다. 방랑시인 김삿갓처럼 바람따라 구름따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고 싶은 욕망이다. 바람같은 자유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한시도 떠나지 않은 것을 보면 내게 '방랑끼'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디를 가게 되면 운전기사와 비서신부가 항상 제 시각에 데려다준다. 혼자 비행기를 타더라도 도착지 공항에 어김없이 마중객이 나와 있다. 사람들 시선과 관심이 때론 불편할 때가 있다. 교구장 재직 시절에는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가끔 혼자 외출을 하곤 했다. 남방 차림으로 전철을 타고 수원에 있는 피정의.. 2010. 2. 14.
서울대교구장직 이임 30년 사랑과 함께 환송해 주는 신자들 보고 가슴 울컥 "추기경님 사랑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30년만에 서울대교구장 이임 감사미사를 마치고 명동성당을 나오자 성당 마당을 가득 메운 신자들이 김 추기경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공경하올 교황님, 곧 21세기가 시작됩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려면 서울대교구에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나이 탓인지 요즘 자주 피로를 느낍니다." 교황님께 제출한 교구장직 사임 신청서의 일부다. 서울대교구가 발전하려면 새로운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사임수락을 간청했다. 난 1998년 76세 나이로 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이 편지는 만 70세가 되던 해인 1992년에 써서 교황님께 보낸 것이다. 교구장 정년은 교회.. 2010. 2. 14.
명동성당 경찰병력 투입과 노동운동 예상 못한 '기습'에 한 뼘 성역마저 사라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김영삼 정부의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는 사제단. 타종교 성직자들도 가세해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1995년 6월6일 현충일 아침. 교구청 신부들과 둘러앉아 식사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공휴일 아침이라서 별 일이 없을 텐데 무슨 소란인가 싶었다. "추기경님, 명동성당에 경찰병력이 투입됐습니다.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이 모두 잡혀갔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그 보고를 듣고 입맛을 잃어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정이 착잡했다. '아~ 그나마 있는 한 뼘 성역(聖域)마저 사라졌구나. 김영삼 정부가 큰 실수를 했어. 큰 실수를…."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은 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 보름 넘게.. 201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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