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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섬지역에 꽃피워진 신앙, 대부 본당

by 세포네 2007.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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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상동 공소를 짓고 첫 미사후 기념 촬영 / 우) 남3리 공소 흙 벽돌 건물 앞에서

 

 

섬지역에 꽃피워진 신앙, 대부 본당


대부도는 내륙과의 접촉이 어려운 지역으로 문화혜택을 접하기 어렵고 새 문물의 보급도 더딘 섬이었다. 1950년 6.25사변으로 황해도와 그 연안지역의 피난민들이 연평도와 대부도로 이주하게 되었고 당시 한국에 체류 중이던 선교사들과 각 본당 주임으로 있던 외국인 신부들이 모국과 세계구호 단체에 구호양곡을 요청하였다. 구호물품을 타러 온 사람들에게 ‘교리문답’을 나누어 주며 교리를 암기하도록 하고 찰고(면담/교리 구두시험)를 통해 세례를 주었다. 그래서 그 당시 ‘밀가루 신자’라는 신조어가 나올만큼 구호양곡 배급은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했다.

1959년 대부도 첫 공소로 설립된 흥성리 공소도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의 구호사업이 계속되면서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흥성리공소가 모태가 되어 상동공소, 영흥공소, 남3리 공소 등이 생겨났고 이중 영흥공소는 훗날 영흥성당으로, 상동공소는 대부성당으로 발전했다.  

1959년 5월에 설정된 상동공소는 초기에는 4명의 영세자뿐이었지만 몇 개월 사이 많은 예비신자들이 모집되었고 (현)대부초등학교 정문 앞 9평가량의 초가 한 채를 구입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이에 감격의 기쁨을 공소에 가서 성체조배로 대신하였으며 더욱 열심히 전교활동을 펼쳐 신자수는 30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후 장요한 신부(답동성당 6대 주임)는 대지 1,170평을 매입하여 상동공소를 지었다.

이렇듯 생활이 어렵던 1950년대에 4명의 교우로 시작된 상동공소는 1992년 10월 15일 공소설립 33년만에 대부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대부본당은 예비신자 모집과 가정방문을 통한 냉담자 회두 및 외짝 교우 입교를 위해 신자 모두가 합심하여 전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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