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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60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7)신자들 만나기 위한 최양업의 사목 여정 멀고 험한 길… 한 명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5개 도에 걸쳐 있는 127개 공소 관할 2년 동안 3100㎞ 넘는 거리를 순방 도앙골에서 작성한 첫 서한 시작으로 전국 교우촌에서 쓴 14통 편지 통해 신자들 상황과 사목 여정 알 수 있어 최양업 신부가 교우촌을 순방하는 모습. 양업교회사연구소 제공 185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은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충청도에 있는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를 방문한 뒤 전라도 지역에서부터 사목 순방을 시작했다. 귀국 후 처음으로 서한을 쓴 교우촌은 충청남도에 있는 도앙골이다. 이후로도 최양업은 충청도를 비롯해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의 교우촌에서 14통의 서한을 썼다. 1859년 10월 12일에 쓴 서한에서 최양업은 “저의 관할 구역은 다섯 도에 걸쳐 있고,.. 2022. 2. 20.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6)가난한 백성 돌보는 예수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평등정신 바탕으로 애덕 구현에 힘써 여성 활동에 제약 많았던 유교 사회 여성 신자들은 더욱 큰 어려움 겪어 고달프게 일해도 가렴주구에 시달려 늘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들 삶을 통탄 비위생적인 용수 개량 요청하는 등 신자들 위해 할 수 있는 일 찾아나서 ▲ 최양업 신부가 교우촌 신자들과 미사 봉헌하는 모습. 양업교회사연구소 제공 신앙 지키다 비극 당하는 여성 신자들에 대한 비통함 유교 문화권인 조선에서, 여성들은 혼자서 집 밖에 나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낯선 남자를 만나기만 해도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최양업이 사목할 당시 여성 신자들은 사제에게 성사를 받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동해야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여성 신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비통함을 느꼈을 최양업.. 2022. 2. 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5) 13년 만에 귀국한 최양업 “궁핍한 신자들 도울 능력이 없어 가슴 미어집니다” 10개월간 쉬지 않고 사목방문 매진 산 속에 숨어 사는 신자들 만나며 비참하고 가련한 삶에 깊이 통감 평생토록 사제를 만나고 싶어했던 교우촌 신자들의 모습 서한에 묘사 “드디어 오랫동안 소망하던 때가 왔습니다.” 사제가 돼 13년 만에 귀국한 최양업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15살에 조선을 떠나 28살 청년이 돼 돌아온 최양업.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신자들이 처한 참혹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천대받고 목숨을 잃는 신자들을 본 최양업의 심정이 어땠을까? 귀국 후 10개월 만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최양업의 편지에는 신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제로서의 비장함이 배어 있다. 비참하고 궁핍한 신자들의 삶, 가슴에 새기.. 2022. 2. 2.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4) 최양업의 성소가 성장한 못자리를 찾아서 낯선 풍경 곳곳에서 만나는 조선 신학생의 자취 조국으로 돌아갈 기약 없는 타국생활 낯선 환경 속에서도 신학공부에 매진 귀국 실패 후 소팔가자에서 부제수품 쉬자후이 예수회 본부에서 수학하며 “신부님들에게 많은 신세” 편지에 언급 지금은 비행기로 4시간이면 도착하는 마카오. 185년 전 최양업과 2명의 신학생은 5000㎞가 넘는 길을 걸어 7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한다. 두 계절을 쉬지 않고 걸으며 16살 소년 최양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국으로 돌아갈 기약이 없는 답답한 시간들을 버티며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하느님에게 의지했을 최양업. 그의 성소의 씨앗이 단단히 뿌리내렸던 여정을 다시 밟아본다. ■ 마카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대목구를 북경교구에서 분리하고 파리외방전교회에.. 2022. 2. 2.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 7년에 걸친 귀국 여정, 실패와 좌절 속에서 순명을 기억하다 조선의 복음화 향한 간절한 마음 하늘에 닿아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 받는 중에도 포교에 대한 열망으로 귀국을 염원 부제수품 후 수차례 시도했으나 실패 상해서 사제품 받은 그해 12월 입국 7년 만에 조선 신자들을 만난 감격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 담겨 경기도 남양 출신 최방제(프란치스코), 충청도 홍주 다락골 출신 최양업(토마스), 충청도 면천 솔뫼 출신 김대건(안드레아). 1836년 12월 2일, 모방 신부가 지내던 서울 후동(현 중구 주교동ㆍ산림동) 사제관에 모인 신학생 3명은 성경에 손을 얹고 ‘조선 천주교회의 장상이 되실 분들에게 순종하고 순명할 것’을 서약했다. 조선교회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된 세 사람은 십자고상 앞에서 맹세한 이 서약이 조선의 복음화를 위한 씨앗이 되길 간절히 바랐을 것.. 2022. 2. 2.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2) 귀국을 위한 고된 여정 가운데 사제가 된 최양업 조선의 가련한 신자들 위해 희생하기로 다짐하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에 대한 애통함과 고국으로 갈 수 없는 답답함 토로 하느님께 바라는 희망으로 의지 다져 메스트르 신부와 조선으로 가던 중 전라도 고군산도 부근 이르러 난파 상해로 돌아가 순명 새기며 사제수품 1844년 12월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소팔가자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다. 1845년 8월 최양업보다 먼저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위해 떠났다. 이후 여러 차례 귀국로를 탐색했지만 1846년 병오박해 소식과 함께 조선 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최양업.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이전해있던 홍콩으로 돌아간 최양업은 1847년 4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네 번째 서한을 부친다. 애통한 가운데 한줄.. 2022. 2. 2.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 신앙의 씨앗, 싹을 틔우다 15세에 마카오로 떠난 소년… 신앙만이 그를 지켰다 성인 최경환·복자 이성례의 장남 신학생으로 선발돼 고국 떠나 공부 마카오에서 5년 동안 가르침 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 보내 한 해에 7000리.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지금으로 따지면 1년 동안 2700여㎞에 이르는 거리를 걸으며 신자들과 만났다.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신자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 미어지는 가슴을 움켜쥐었던 최양업 신부. 그의 발자국에는 하느님을 향한, 그리고 조선의 신자들을 향한 깊은 사랑이 서려있다. 특히 최양업 신부가 남긴 20통의 서한에는 한국 신자들을 향한 그의 사랑과 사목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22년 한 해 동안 최양업 신부의 서한을 .. 2022. 2. 2.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8) 최양업, 제작하다 우리말로 쉽게 노래처럼 교리 암송하도록 ‘천주가사’ 작성 교리 쉽게 풀어주는 내용으로 가사 양식 활용해 토착화 시도 간결하고 짧은 4·4조 구조 정말 최양업 작품인지에 대해 명확한 기록 남아있지 않지만 천주가사 통해 신앙선조들이 당시 지녔던 믿음 짐작 가능 어려운 것을 쉽게 외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노래로 외우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구구단을 외우거나, 선조들이 어린 시절 「천자문」을 배우듯이 어린 아이들도 노래를 활용하면 어려운 내용을 쉽게 배울 수 있다. 신앙선조들이 교리를 배울 때도 이런 방법이 큰 도움이 됐다. 바로 천주가사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은 천주가사를 제작해, 어려운 교리를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 우리말로 더 쉽게 익히는 교리 “한글은 교리 공부하는 데 매.. 2021. 5. 9.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6) 최양업, 서품받다 첫 방인사제 탄생 위해 국내외 수많은 기도와 지원 모여 특유의 재능과 덕행으로 기대 한몸에 받은 최양업 신부 프랑스 전역 성소후원 활발 조선 신자들도 목숨 걸고 활동 선발된 신학생 유학 지원 힘써 우리나라 첫 방인사제의 탄생, 바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탄생은 주인공인 김대건과 최양업의 공적이 주목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의 탄생이 있기까지는 김대건과 최양업 뒤에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원한 수많은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잘 조명되지 않는 듯하다. 최양업이 서품을 받던 그 시간에 드러나지 않게 성소를 후원했던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 사제서품에 대한 간절함 “지극히 무능하고 가난한 제가 날마다 지극히 존엄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미사성제를 드리고, 온 .. 2021. 3. 28.
[탄생 200주년] <4·끝>배론성지에서 만난 최양업 신부 교우촌 찾아 밤새워 걷던 길 위에서 선종한 ‘땀의 순교자’ ▲ 드론으로 찍은 배론성지 전경. 왼쪽에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과 조각공원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황사영 백서 토굴, 성 요셉 신학당, 숲에 가려진 최양업 신부 묘소와 교구 성직자 묘역이 있다. 배론성지 제공 ▲ 가경자 최양업 신부 묘소. 묘소 앞 오른쪽에 1942년 12월에 제천의 신자들이 세운 묘비가 있고, 왼쪽에는 최 신부의 시복시성 기도문이 새겨진 빗돌이 있다. ▲ 최양업 토마스 신부 조각공원 앞쪽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상.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 맞는 삶을 산 목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지만, 최양업(토마스) 신부 또한 그 고백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 2021. 3. 28.
‘땀의 증거자’ 최양업 신부 영성 기억하며 시복·시성 기도 모아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국 천주교회가 최 신부 시복ㆍ시성에 기도를 모았다. 한국 교회는 최 신부 탄생일(3월 1일)을 하루 앞둔 2월 28일 전국의 모든 본당에서 최 신부 시복 기원 미사를 일제히 봉헌했다. 특히 서울대교구는 2월 28일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최 신부의 시복 기원 미사를 봉헌하고, ‘땀의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기억하며 시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이날 미사는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에 따라 참여 인원을 250명으로 제한했다. 염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최양업 신부의 이름인 양업(良業)을 우리말로 풀면 ‘선한 업적’이라는 뜻인데 그의 삶도 이름과 같았다”며 “두 번째 조선인 사제의 삶은 한국 교회 발.. 2021. 3. 10.
[탄생 200주년] <3> 배티와 최양업 신부 - 5개도를 돌다 배티 소신학교 운영하고 한글본 천주가사·교리서 펴내 ▲ 지난 2011년 배티성지에 조성된 최양업 신부의 성당 겸 사제관.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도 겸했던 이 건물은 초가집 형태의 방 두 칸, 부엌 한 칸짜리 집으로, 충청북도 지정문화재(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돼 있다. ‘길 위의 목자’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려는”(1847년 4월 20일 자 4번째 서한) 희망으로 최양업 신부는 걷고 또 걸었다. 박해를 피해 “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는 골짜기에 흩어져 사는”(1851년 10월 15일 자 8번째 서한) 교우촌을 찾아들었고 또 새벽같이 길을 떠났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염원하며 걷는 그 길은 “그리스도의 용사들”, 곧 순교자들과 함께 걷는 길이기도 했다. 전국 교우촌 돌며 .. 2021.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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