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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97

43.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발족 교황 바오로 6세는 사회 정의와 평화를 세계적으로 증식시키기 위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정한 ‘현대 교회에 있어서의 사목 헌장’의 요청에 따라 1967년 교황 직속의 ‘정의 평화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는 크리스챤 공동체로 하여금 그들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자기의 가정, 직장, 사회에서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주교 회의에서 가톨릭 구제 위원회 한국지부장인 캐롤 몬시뇰에게 한국 정의 평화 위원회의 설립을 위임하여, 1970년 8월 24일 대전 성모여고에서 전국 가톨릭 대표 24명이 참여하여 설립하였다. 인천 교구에서도 1976년 10월 30일 ‘한국 천주교 정의 평화 위원회 인천 교구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구장의 인준을 받고 김병상 몬시뇰이 초대 위.. 2007. 11. 18.
지역 주민과 함께 성장해온 만수3동 본당 1978년 초기의 만수3동 본당, 1983년 7월 만수3동 본당 축성식 지역 주민과 함께 성장해온 만수3동 본당 수인산업도로 국도변 왼쪽 언덕에 위치한 만수3동 본당은 지역민을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과 신자들의 자발적인 전교와 이웃돕기로 성장해왔다. 만수동 공소는 1970년대초 주안본당 신자인 한구성의 가정방문교리로 영세를 받은 남동구 지역의 농가 신자들이 만수초등학교 앞 작은 방에 모여 공소 예절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78년 8월 15일 만수동(현 만수3동)본당이 신설되었으나 주민들의 이주가 많아 성당 건축이 다소 늦어져 1983년 7월 9일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 만수3동 본당은 지역민 뿐만 아니라 교도소, 고아원, 양로원 봉사활동,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 전달 등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많은 활.. 2007. 11. 11.
42. 인천교구내 수도회 진출 현황 인천교구내에 수도회가 들어온 것은 교구가 설정되기 67년 전인 1894년 8월 18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부터 시작되었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는 인천본당(현 답동성당)주임 빌렘 신부의 요청으로 최초의 본당인 답동본당의 설립과 거의 동시에 인천 교구에 파견되어 답동본당, 인천교구의 변천과 역사를 같이해왔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본원 부지로 1949년 11월 21일 부천시 소사동에 전답, 임야, 적산 가옥을 구입하여 일구고 가꾸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방인수녀회로서 답동본당 주임사제이며 박문여자중고등학교의 이사장 대리 임종국 신부의 초청으로 1957년 3월 30일 박문여자중고등학교에 2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봉사하였다. 인보 성체 수녀회는 1958년 경기도 부천군 소사에 본원을 신축.. 2007. 11. 11.
아름다운 성 미술품으로 꾸며진 갈산동 본당 좌) 1977년 10월 26일 갈산동본당 축복식 우) 생일잔치를 하시는 요셉의 집 어르신들. 현재 20여명의 무의탁 노인(남)들이 기거하고 있다. 아름다운 성 미술품으로 꾸며진 갈산동 본당 갈산동 본당은 인천교구의 102개 본당 중에 유일하게 수도회에서 건축한 성당이다. 교구는 1976년 삼산동 261번지를 매입하여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성당 신축 및 사목을 위탁하였다. 이듬해 1월 성당 신축을 목적으로 노경삼 다니엘 수사 신부가 부임하여 모본당인 부평1동에 머물며 성전을 건축하여 10월 26일 축성미사를 봉헌했다. 농민이 주를 이루던 본당에 공단 근로자들이 전입하고 교세가 꾸준히 확장되어 79년 10월에는 수녀원을 건축, 수녀들을 초빙하여 전례와 주일 예비자 교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교세.. 2007. 11. 4.
41. 인천주보 1000호 발행 인천주보가 탄생하기 전에는 각 본당에서 주보를 자체 발행했다. 그러다가 교구민의 일치와 주보 편집의 전문성을 기하고자 1979년 11월부터 답동성당을 비롯한 16개 본당에서 자체 발행하던 주보를 통합하여 ‘인천주보’라는 이름으로 공동제작에 들어갔다. 그 당시 주보 발행 부수는 8,000부 정도로, 4.6판 4면 크기였기에 지면을 쪼개고 쪼개어도 담아야 할 내용의 원고 분량은 항상 넘치는 상황이었으므로 증면호를 자주 발행했다. 특히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과 최기식 신부 구속 사건에 대한 속보와 방청기를 담아내기 위해 당시에는 거의 격주로 8면을 발행하였다. 1980년 초반 인천주보는 인천 지역에서 관심을 모으는 홍보 매체가 되었다. 광주사태의 참극을 비롯하여 사회는 침묵을 강요당했고 언론은 .. 2007. 11. 4.
감사, 회심, 나눔의 공동체, 간석2동 본당 좌) 새성전건립전 주일학교, 우) 현재의 간석2동 본당 감사, 회심, 나눔의 공동체, 간석2동 본당 간석리의 간(間)자와 석암의 석(石)자에서 유래했다는 간석2동 본당은 동쪽에는 한국천주교회의 반석 이승훈의 묘소 터, 남쪽에는 한국순교복자 성직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인천시의 도시계획사업으로 주민이 증가하기 시작한 간석동에 처음으로 공소가 설립된 것은 주안본당이 설립된 후 1963년 이경희와 윤계천의 집에서 공소예절을 시작하면서였다. 신자수가 계속 늘어나자 1967년에 가정집을 전세로 빌려 공소예절을 하였고 후에 한국순교복자 성직 수도원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1974년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74년 2월 인천 교구에서 현 본당대지를 구입해주었으며, 신자들은 성전건립을 위해 기성회를 조.. 2007. 10. 28.
40. 인천교구와 1989년 제44차 세계 성체대회 좌) 1989년 6월 성체분배권 수여식, 우) 1989년 6월 답동성당에서의 성체성년미사 1989년 10월 4~8일 제4차 세계 성체대회(한국)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 1989년은 역사적인 해였다. 1989년 10월 4일부터 8일까지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제44차 세계 성체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3월 14일 제44차 세계 성체대회의 서울개최를 인준하였다. 한국천주교 주교단은 1988년부터 사목 지침을 성체 대회와 관련지어 정하고 성체대회 준비를 시작했다. 이에 인천교구 또한 ‘세계 성체대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인 1987년 11월 11일 ‘세계 성체 대회 준비 성직자·수도자 연수회’를 실시하고 교구 차원에서 성.. 2007. 10. 28.
120여년을 이어온 통진 본당 신앙 공동체 왼쪽) 1993년 10월 15일 새 성전 봉헌식, 우) 1968년 4월 21일 통진본당 견진 기념 120여년을 이어온 통진 본당 신앙 공동체 통진 본당은 서울과 강화 유적지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어 비교적 일찍 복음이 전파되었다. 1880년경부터 행주본당 신부가 양촌면 누산리공소에 방문하여 1년에 두 번씩 미사를 봉헌했으며 1920년경 양촌면 마산리로 이사온 민유식이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공소 설립의 싹을 틔웠다. 1948년 김포본당이 설립되자 통진은 그 관할 공소로서 복음 전파 활동이 활발해져 1965년 8월 5일 성당 축성식과 함께 김포본당으로부터 분리, 설정되었다. 본당 설립과 동시에 성체 수녀회 수녀 6명을 초청하고 전교사 7명을 확보하여 양곡, 누산, 대릉, 학운, 대명, 석정, 고양,.. 2007. 10. 21.
39. 내·외적 성장의 계기가 된 교구설정 25주년 1986년 6월 6일 교구설정 25주년을 맞아 인천 공설운동장에서 ‘모든 이가 하나 되기를’이라는 주제로 신앙 대회가 개최되었다. 교구설정 25주년 준비 위원회는 교구민들이 성년(成年)교구의 성인(成人)으로서 교구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기위해, 1986년 1월 6일부터 농어촌 본당 지도자 교육, 교구사목지침 및 예산지침 해설을 주제로 제2차 평신도 지도자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25주년이 일회적인 행사가 아닌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발전의 초석이 되도록 사회를 위한 투신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교구 사제단과 2만여 명의 신자가 참석한 신앙대회는 지난 반세기의 교구 공동체를 돌아보고 선교 3세기를 향한 전교구민의 일치된 마음이었다. 이날 신앙대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미사강론을 통하여 “인천교구는 4반세.. 2007. 10. 21.
열린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송림4동 본당 1988년 3월 교육관, 사제관 축성식 열린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송림4동 본당 초대 주임 버크 신부는 도화동 성당에 기거하며 분할될 지역의 신자들을 개별 면담하여 새 교회로 모아들였고 신자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여러 단체 결성을 통해 활발한 신심활동과 전교활동을 펼쳤다.1977년 성당 1층을 완공하여 축성식을 가졌으며, 교세의 팽창과 교리실 부족으로 1979년 4월에 2층 성당 기공식을 하여 그 해 10월 준공, 낙성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스미스 신부는 전신자들의 유대 강화와 신심 성장을 위해 새 영세자들과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고 성당 지하실에 무료 일일찻집을 운영하여 신자들과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많은 성과를 올렸다. 본당설립 10년만인 1986년 한국인 첫 사제로 부임.. 2007. 10. 14.
서해 5도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2007. 10. 7.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 숭의동 본당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 숭의동 본당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재개발 공사가 한창인 용현동과 경인철도를 지나 숭의동본당에 들어서면 담장을 대신하여 가지런한 자태의 성모님이 성전을 둘러싸고 있다. 성모님이 예수님의 고난을 가슴에 품은 듯한 형상의 십자가의 길은 언제나 열려있는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숭의동본당은 1969년 12월 15일 성녀소화데레사를 주보성인으로 답동, 도화동, 용현동본당으로부터 분가하여 설정되었고 초대 주임 머피(Arthur Murphy)신부가 부임하였다. 1970년 9월 12일 완공된 본당 건물은 인근 주민들과의 거리감을 좁히고자 일반 교회 건축 양식보다는 피정센터 구조양식으로 설계하여 각종 회의실과 특수 사목을 위해 활용되었고, 지역구조상 신자 연령층이 높고 주로 주.. 2007.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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