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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정원]4061

작아지는 삶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작아집니다 꿈도 작아지고 욕심도 작아지고 미움도 작아집니다 살아가면서 작아지는 삶! 작아지면서 어른이 되고 작아지면서 겸손이 되고 작아지면서 사랑이 됩니다 시와 그림=김용해(요한) 시인 2024. 4. 15.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통 거치시며 인내하고 순명해 부활하신 예수님 사랑 실천해 숭고한 의미 되살리길 마티아 프레티 ‘의심하는 토마스’ (1656~1660년).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그분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토마스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 2022. 4. 24.
욥에게 예수님이 오랜만에 올려봅니다~~~ 오늘 첫째 독서는 욥기로 가장 고통받은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의 고통은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치는 고통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고통이 차례로 오는데 첫 번째는 그의 소와 나귀들이 약탈당하고 그의 머슴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양 떼와 머슴들이 벼락을 맞아 죽임을 당하였으며, 세 번째도 그의 낙타와 머슴들이 칼데아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만 해도 견딜 수 없는데 욥은 더 나아가서 아들딸들이 돌풍에 집이 무너져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는 참변을 당합니다. 돌풍에 의한 거라면 사람에 의한 게 아니니 하느님께서 죽이신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욥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라는 그 유명한 말을 남기지.. 2021. 2. 7.
성소를 살아가는 사람들 연중 제2주일은 성소가 주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는 성소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주제를 잡았습니다. 이렇게 주제를 잡은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사무엘이나 주님의 첫 제자들뿐이겠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는 귀하기에 부르시고 누구는 보잘것없는 자이기에 부르지 않으시는 분이 아닐 거라는 저의 믿음 때문이고 오늘 사무엘기의 다음 언급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어린 사무엘처럼 신앙적으로 어리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시는데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줄 모르는 사람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불러주셔서 사는 것임에도 성소인 줄 모르는 채 살 수 있겠다는 성찰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도 생활이나 사제.. 2021. 1. 17.
다 지나가는 것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세상은 지나간다고 오늘 독서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세상이 우리를 지나가는가요? 독서가 그리 말하지만 실은 우리가 세상을 지나가고 세상은 계속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요? 실제로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세상은 남아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아픈데 다른 이들은 건강한 것이 괜히 야속한 것처럼 나는 죽어가는데 세상은 여전한 것이 야속하고 심지어 그런 세상에 분노를 터트리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세상이 지나간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지나간다는 것은 나에게 머물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욕망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니, 지나가게 욕망을 내가 놔야 합니다. 지나가는 욕망을 내가 붙잡고 있어서는 안 .. 2020. 12. 30.
주님의 귀환과 우리 의식의 귀환 오늘은 대림절의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대림절이란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기인데 주님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오셨고 그러니 우리는 구약의 사람들처럼 구세주께서 아직 아니 오신 것처럼 기다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대림절은 주님께서 아니 오셔서 기다리는 대림절이 아니고, 이 땅에 오셨지만 내게서는 떠나셨기에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인데 이 떠나심을 오늘 주님께서는 '주인의 먼 길 떠남'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먼 길을 떠나셨을까요? 당신 볼 일이 있으셨기 때문일까요, 우리 때문일까요? 혹시 그것이 주님께서 오시건 말건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거의 틀림 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의 .. 2020. 11. 30.
우리를 왕이 되게 하시는 왕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형제로 삼으신다는 것이 오늘 그리고 이번 그리스도 왕 축일이 제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축일은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차지하셨음을 축하하는 축일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겠다는 우리의 믿음과 충성과 사랑을 고백하는 축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왕 축일이 이 세상 임금의 축일과 다른 점입니다. 이 세상 임금들은 자기가 기를 쓰고 왕권을 차지한 것이지만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추대는 그리스도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고 난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것이나 제자들이 주님께서 왕이 되기를 바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빵의 기적 후 주님을 왕으로 .. 2020. 11. 24.
인생 결산 연중 33주일의 복음은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면서 우리가 산 인생을 하느님과 셈하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과 인생 결산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산 인생이 과연 칭송받을 만큼 잘 산 인생인지, 야단맞아도 쌀만큼 잘못 산 인생인지 셈하는 내용이며 그것도 다른 분이 아니라 하느님과 셈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우리는 인생을 왜 하느님과 결산할까요? 내 인생이니 그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것이 신앙인인 우리에게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를 살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요, 살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신 분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는 그 뜻하신 .. 2020. 11. 15.
지혜에는 여러 가지 지혜가 있습니다 연중 제32주일의 주제는 지혜로서 1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 그리고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지혜에는 여러 가지 지혜가 있습니다. 신 김치 먹는 법이나 콜라를 이용해 창을 닦거나 녹슨 볼트를 푸는 법을 아는 것과 같은 생활의 지혜라는 것이 있지요. 인터넷을 뒤지니 1300가지의 생활의 지혜 모음집까지 있더군요. 이런 생활의 지혜를 많이 알고 있으면 쉽게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고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요. 이런 지혜.. 2020. 11. 8.
주님께서는 새로운 하루와 더불어 또 다시 건너갈 것(Pascha)을 바라십니다! 너나 할것 없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습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현실과 암담하고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겪게 되는 근심과 걱정,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런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서 4장 6~7절) 탈출구도 없을뿐더러, 사방이 높은 담으로 가로막혀, 밤잠도 제대로 못이루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랍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현실 앞에, 입만 열만 불.. 2020. 10. 4.
나의 사랑의 역사 그 옛날 제가 소신학교에 가 있는 관계로 오랜만에 만난 저의 고향친구가 오늘 우리가 들은 코린토 서간의 사랑찬가를 줄줄이 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너 세례 받았니?'라고 물으니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이 내용이 너무도 좋아서 자기가 외우고 있노라는 거였습니다. 이토록 신자가 아닌 사람까지도 좋아하고 저 역시 좋아하는 말씀인데도 저를 돌아보니 이 말씀을 제가 직면하기보다 피해왔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그랬을까 성찰해보니 거울이 우리 모습을 그대로 비추듯 이 사랑의 찬가가 저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전히 두렵지만 저의 사랑의 역사를 오늘 서간의 말씀에 비추어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옛날에 저는 사춘기 때 잠깐 이성에 대한 사랑을 .. 2020. 9. 16.
지상의 시선을 천상의 시선으로 바꿀 때 가능한 용서 용서를 쉽사리 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게 되는데, 그런 우리 자신을 우리는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참 악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가 오히려 착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면 용서란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을 사람을, 막말로 하면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을 주님 말씀 때문에 그래도 용서하려는 것이니 사실은 참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렇긴 하지만 용서란 마음이 착한 것만 가지고 되지 않고, "저마다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만 된다는 오늘 주님 말씀처럼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야지만 되는 거라는 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용서의 관건은 나의 마음이 사랑으로 차오르게 되는 것이고, 용서 안 되는.. 2020.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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