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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35. 인천교구의 자립

by 세포네 2007.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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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말 교세 통계표에 의하면 인천 교구 관내 총인구수는 128만 938명이고 그 중 신자수는 7만 4,900여 명으로 복음화율은 6%였다. 같은 해 전국 복음화율 3,16%를 훨씬 넘는 교세였다. 교구 내 본당은 30개로 이 중 75%가 인천 시내에 집중, 관할지역이 좁다는 것과 함께 인천교구사목에 큰 이점이 되었다.

 

서구 문물을 제일 먼저 접할 수 있다는 지리적 여건이 수도 서울에 가까운 항만으로서의 교구 복음화에 잠정적인 바탕을 이루어 왔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여건들이 인천 교구가 산업 사회의 부산물인 인구의 유동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점진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온 잠재력이다. 

  1978년 인천 교구는 교구 설정 이래 최대의 염원이었던 자립을 이룩했다. 인천교구가 교구 설정 16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전국 제일의 복음화율과 교구자립을 계획보다 2년이나 앞당겨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일치를 향한 교구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교구의 이와 같은 노력은 1963년 인천 출신의 첫 한국인 사제(강의선 힐라리오)가 배출되면서 단행한 미사 예물 공유화로 시작되었다. 미사예물공유화로 사제생활수준의 극심한 차가 빚는 일체의 잡음을 없애주는 한편 사제와 사제 사이를 좁혀 주고 단결하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제들의 이런 일치의 모습은 신자들의 의식변화에도 크게 작용하여 모든 교회 활동에 대한 활발한 참여를 유발시켰다. 이후 인천교구는 매년 2명꼴로 사제를 배출했으며, 성직자에 비해 4배의 숫자에 달하는 수도자들의 역할도 교구 발전에 큰 몫을 했다.

1973년부터는 섬 공소에 대한 의료 지원이 끊어져 큰 마찰을 겪었지만 그 진통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치러내야 할 대가였다. 사실상 과거 도서 지역의 사목과 자선 사업은 끊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한 어업을 주생활 수단으로 했던 섬 지방의 사목에서 자선을 겸한 복음 전파는 섬 특유의 토속 신앙과 샤머니즘에 젖어 있던 주민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이었고 투자한 이상의 효과를 거두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 후반 교구에서는 도서 지역에 집중적으로 폈던 의료 봉사 사업의 운영권을 관할 군내의 적십자사와 보건소 등에 차례로 이관했다. 높아진 생활수준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무료 병원을 찾는 환자의 수가 대폭 줄어 무료 병원의 필요성이 희박해진 때문이었다. 교구의 이러한 단행으로 10년 이상씩 무상의 의료 혜택을 입었던 섬 주민들과의 마찰이 있었지만, 인천교구는 새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더 필요한 곳, 더 넓은 복음의 장소를 찾아 사랑과 봉사의 기수를 돌렸다. 

자립을 이룩한 1978년 인천 교구의 사목지침은 청소년 교리 교육과 예비자 교리, 그리고 신자 재교육 등 교육에 주력하였다. 이어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본당에서의 단체별 1회피정, 성서에 관한 강연회 연7회 실시와 성경 읽기 방법 시도, 지구 혹은 본당별로 1회 교회의 사회 정의를 주제로 강연회 갖기, 연1회 불우이웃 돕기에 참가, 가나 강좌 실시를 하는 것 등 다섯가지의 실천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40여명이 참석한 공동체 묵상회였다.

< 정리:홍보실  / 참고자료:인천교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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