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영성]/'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33 (33·끝) 마가자에서 선종하다 1835년 10월 20일, 조선 선교 꿈 이루지 못한 채 마가자에서 선종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 10월 7일 조선 국경 향해 서만자 출발 한 달만 걸으면 우리는 요동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요동 지방은 기온이 좀더 온화하지만, 주민들은 우리에게 거의 호감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 어떤 교우도 우리에게 임시 거처를 제공하려 하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돈을 낸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들은 유럽인들을 끔찍이도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좋건 싫건 외교인의 집에 거처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음력 11월 초에 우리는 장이 서는 국경지대 맨 끝 만주 봉황성 변문까지 갈 것입니다. 그러면 불가피하게도 수천 명의 외교인 가운데 외로이 있게 될 것입니다. .. 2024. 10. 6. 32. 조선을 향한 여정 준비 마치다 1835년 10월 7일, 꿈에 그리던 조선을 향해 서만자에서 출발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약속대로 중국 봉황성 변문에서 조선인 교우들과 만나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1835년 10월 7일 서만자를 출발하려 했다. 서만자에서 요동으로 가는 길 조선 국경을 향해 서만자를 떠나기로 계획 요동으로 보냈던 연락원들이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이들은 이미 50일도 훨씬 전에 서만자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보호해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왕 요셉은 기력을 되찾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습니다. 저는 1835년 10월 7일 수요일에 조선 국경을 향해 서만자를 떠나기로 계획했습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저는 7프랑을 주고 손수레와 비슷한 마차를 하나 장만했습니다. 또 140프.. 2024. 9. 29. 31. 헌신적인 왕 요셉 포교성성 장관에게 “요동 땅 동쪽을 조선대목구에 편입시켜 달라” 요청 서만자 교우들은 박해 동안에도 성당 건립 공사를 멈추지 않고 지속해 마침내 새 성당을 완공했다.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서만자에 머물고 있을 때 완공된 서만자 성당으로 지금은 헐리고 없다 죽은 줄 알았던 왕 요셉, 서만자로 돌아와 1835년 9월 3일 선박 화재 사건으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왕 요셉이 살아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달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심하게 아프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이미 알려드렸듯이 황제에게 바치는 쌀을 나르던 배 중 여러 척이 양자강에서 불에 탔습니다. 많은 뱃사공과 승객들이 화재로 죽거나 물에 빠져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고가 고의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100척 이상의 배에서 선원.. 2024. 9. 15. 30. 서만자 일대 박해 상황 모방 신부와 은신한 토굴 발각돼 산 위 낡은 오두막으로 다시 피신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1835년 6월 17일부터 23일까지 일주일간 박해를 피해 토굴에 은신했다. 오늘날 서만자의 가난한 주민은 언덕 비탈에 굴을 파 주거지로 이용하고 있다 총회장 “교우 밀고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박해의 위험이 닥치니 사람들의 됨됨이가 제대로 드러났습니다. 서만자 마을 지도자 두 명은 헌신적으로 모방 신부와 저를 도왔습니다. 저는 그들의 자비심에 감탄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닥친 위험만을 걱정하느라 자신들이 처한 위협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노출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희에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무 일도 아닐 것입니다”라고 진정시켜줬습니다. 하지만 이들 두 명의 지도자들과.. 2024. 9. 8. 29. 조선을 위한 요동대목구 필요성 확신 유럽인 선교사 잡으러 온다는 첩보 듣고 모방 신부와 토굴로 피신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가 프랑스와 마카오보다 안전하다고 했지만 늘 박해의 위협이 있었다. 사진은 문화혁명 때 반쪽으로 쪼개져 버려졌던 성직자들의 비석을 다시 세워놓은 서만자 성직자 묘역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 1835년 1월 북경에 온 조선 교우들과의 면담을 왕 요셉을 통해 잘 마무리한 저는 2월 8일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주재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그간의 일을 알리는 편지를 썼습니다. “조선 교우들은 올해 저를 입국시킬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들은 제게 약속했고, 국경에서 서로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식과 신호들을 알려줬습니다. ⋯이곳 서만자에서 저는 프랑스에서보다도, 마카오에 계신 신부님보다도 더 안전하게 있습니다.. 2024. 9. 2. 28. “선교사 1명씩만 조선에 받아들이겠다” 조선 교우들, “유럽인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겠다” 교황께 약속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조선 교우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1825년 1월 21일 보낸 편지로 책문 주막 대문에 ‘만신만복(萬信萬福)’이라 쓰고 수건을 들고 있으면 안내인들이 알아보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으로 모시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페레이라 주교에게 조선 교우들 입장 밝혀 1835년 1월 저의 전권 대리자인 왕 요셉과 면담을 마친 유진길(아우구스티노)·남이관(세바스티아노)·조신철(가롤로)·김 프란치스코 등은 저에게 담배 2갑과 부채 몇 자루, 두통약 몇 개를 선물했습니다. 저의 지시를 받은 왕 요셉은 조선 교우들에게 올해(1835년) 음력 11월 저를 조선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을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인 피레스 페레이라 .. 2024. 8. 25. 27. 교우 대표들에게 입국을 약속하다 “1835년 음력 11월에 주교님 입국을 책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책문과 압록강을 건너면 의주 변문이 나온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압록강을 건넜다면 반드시 의주 변문을 통과해야만 한양으로 가는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 의주 변문 모습 왕 요셉, 북경에서 조선 교우들과 면담 북경에서 저의 조선 입국을 훼방 놓은 방해꾼들을 쫓아낸 왕 요셉은 계속해서 조선 교우들과 면담했습니다. 왕 요셉 : “조선에 교우가 몇 명이나 됩니까?” 조선 교우들 : “수천 명이 되지만 정확한 숫자는 모릅니다.” 왕 : “그들은 모여 삽니까? 흩어져 삽니까?” 조 : “몇몇은 흩어져 있기도 하고 다른 몇몇은 모여 살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교우들만 사는 마을도 상당수 있습니다.” 왕 : “조선 교우들 가운데 하느님께 .. 2024. 8. 25. 26. 왕 요셉이 조선 교우들과 면담하다 “여러분은 저를 여러분의 주교로 받아들일 의향이 있습니까?” 서만자는 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20~30℃까지 떨어져 북경 인근에서 유일하게 눈이 쌓이는 혹한 지역이다. 이런 지형적 특성으로 2022년 북경 동계올림픽 당시 이곳에서 스키경기가 치러졌다.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10월 중순께 서만자 전경 선교사 선종하며 복음화 희망 사라진 달단 서만자가 있는 달단 지역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중국 북부 내몽고 지역을 일컫는 달단에는 몽골족·만주족·회족이 거주합니다. 만주족과 몽골족은 만리장성 너머에 있습니다. 만주족은 중국인들이 관동(關東)이라 부르는 북동쪽 요동에, 몽골족은 북서쪽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라마교를 믿고 있습니다. 모든 달단인은 외형상으로 중국인들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눈.. 2024. 8. 11. 25. 서만자에서 모방 신부를 만나다 조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완전한 자격 갖춘 두 선교사 극적 상봉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로 가는 만리장성의 마지막 관문인 장가구를 거쳐 고가영 교우촌 신자들의 도움으로 서만자로 갔다. 현 고가영 성당 전경 1년 6개월 만에 선교 사제 모방 신부 상봉 대동(大同)에서 서만자로 가는 만리장성의 마지막 관문인 장가구(張家口)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장가구만 통과하면 달단 곧 내몽고 지역입니다. 대동에서 장가구까지는 걸어서 6일이 걸렸습니다. 이 성벽은 중국과 달단을 물리적으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쪽 산비탈은 청나라에 속하며, 북쪽은 달단에 속합니다. 러시아인들이 북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이 관문을 지키던 관원들은 아무도 저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러시아 사람으로 알았던 모양.. 2024. 7. 28. 24. 만리장성을 넘다 북경으로 오는 조선 교우 만나기 위해 만리장성 넘어 서만자로 대주 성문은 태원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첫 관문이다. 산서에서 만리장성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대주 성문을 지나야 했기에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이 성문을 통과했을 것이다 기현 출발 일주일 만에 만리장성 남쪽 도착 1834년 9월 17일 왕 요셉을 북경으로 급하게 보냈습니다. 조선 교우들이 음력 9월에 북경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입니다. 저 역시 그들을 만나기 위해 9월 22일 서둘러 서만자로 떠났습니다. 그곳은 북경에서 가깝고, 제가 조선 교우들을 만나기 훨씬 수월한 곳입니다. 산서대목구장 살베티 주교·알폰소 신부와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살베티 주교는 내게 주려고 상당한 금액을 꾸어 보려고 했습니다. 저는 주교님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가중시킬.. 2024. 7. 21. 23. 앵베르 신부를 후임으로 추천하다 “조선을 위해서는 경험 많고 성숙한 유럽인 선교사들이 필요합니다” 모방ㆍ샤스탕 신부는 조선 교우들이 자신들을 맞이하지 않을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변문을 통해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잠입하자고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건의했다. 19세기 변문. 요녕성 박물관 모방 신부의 조선 밀입국 제안은 최후 수단 1834년 8월 31일 모방 신부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조선 교우들이 우리에게 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국경지대에 정착해 지형을 조사한 다음 조선 입국을 감행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반면, 샤스탕 신부는 다소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미 국경까지 가본 경험이 있어 부질없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국경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겪은 경험들을 회.. 2024. 7. 14. 22. 모방·샤스탕 신부, 북경에 도착하다 조선 교우들 “임금이 공개적으로 입국 허락하지 않는 한 영접 어렵다”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조선 선교를 지원했던 파리외방전교회 교황 파견 선교 사제 모방·샤스탕 신부는 1834년 조선 입국을 위해 북경에 도착했다. 당시 북경교구장 서리 페레이라 주교는 두 사제를 북경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모방 신부를 서부 달단으로, 샤스탕 신부를 산동으로 보냈다. 모방 베드로(사진 위)·샤스탕 야고보 신부 성인화 1834년 4월 1일 북경에 도착한 모방 신부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인 페레이라 주교의 협조 없이는 북경을 통해 조선 국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과 조선의 접경에 연락 거점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장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변문 근처에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협조할 .. 2024. 7. 7.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