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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60

<12>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서쪽으로 낸 조그마한 봉창에서 햇살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경환은 가만히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범구가 천천히 말했다. ‘올해는 무사히 넘기려나 모르겠습니다…또 사람사냥질이나 없어야 할 터인데.’ ‘그걸 누가 짐작하겠습니까.’ ‘미물 같은 제 생각으로는 야속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우리네 사정을 천주님이 모르실 리 없으신데, 어쩌자구 보고만 계시는지…’ ‘허어, 안 할 소리. 더 때를 기다리라는 뜻이겠지요.’ ‘죄송스럽습니다. 회장님 앞에서.’ ‘아직 주님께서 마련하신 때가 아니라는 뜻이라 생각하십시다. 제 생각에, 보미 일은 부모가 속 끓인다고 달라질 일도 아닙니다. 자식이 내 마음처럼 되는 것이라면 부모노릇 마다할 사람이 없지요. 그렇기만 하다면야 누가 자식을 두고 애물이라 했겠습.. 2008. 7. 27.
<11>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무 껍질이 두꺼우면 겨울이 춥다면서요?’ 뒤뜰에 움을 만들고 갈무리했던 무를 꺼내들고 들어오며 보미가 말했다. ‘무 뿌리가 길어도 겨울이 춥다고 한단다. 겨울 나려고 그것들도 다 준비를 한다는 말 아니겠니.’ 겨울이 추운 거야 사람 힘으로 어쩌랴만, 양업이가 길에서 고생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성례는 몰래 한숨을 지었다. 두부를 만드느라 부엌에서는 뿌옇게 김이 솟아올랐다. ‘사람 들어오는 건 몰라도 나가는 건 안다더니, 도련님이 안 계시니까 집이 빈 거 같아요.’ 긴 주걱으로 콩물을 저으며 보미가 말했다. 아궁이 앞에 앉아 튕겨 나오는 불똥을 피하면서 성례가 보미를 올려다보았다. ‘집에 없다 생각하면 왜 그렇게 허전한지.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네가 보기에도 집안이 썰렁하니?’ ‘있던 사람이 없으니.. 2008. 7. 20.
<10>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10) ‘여자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놓인 자리가 너르고 퍼졌으면 편하게 한 평생을 살고, 놓인 자리가 고랑창에 돌밭이라도 이렇게 사는 건가 보다 하면서 살아. 믿으면서도 살고 속으면서도 살아, 에미 한세상도 그렇게 갔다. 그렇다지만… 사람인데, 나라고 왜 가슴에 열불이 없었겠냐.’ 그러면서 어머니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고 했다. ‘눈 맞아서 남녀가 정분이 나서 살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니. 저 좋은 남자랑 깨소금 콩콩 찧어가면서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이 어느 아낙에겐들 없겠느냐 말이다. 가슴에 품고 썩혀서 고목나무 만들 사람이라면, 그럴 만한 사내라면, 가거라. 가서 한번 살아나 보거라. 세상살이가 둘밖에 더 있겠니. 살다 보니 정이 들거나, 먼저 정분이 나서 같이 살거나.’ 그렇게 살았다. 범구 하.. 2008. 7. 13.
<9>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9) 얼어붙은 평양을 빠져나온 발길은 밤이 깊어서야 주막에 닿았다. 양업이 작은 주막에서 포개잠을 자고 일어나던 그날 아침, 수리산 깊은 산속에서는 범구가 딸 보미를 앞세우고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산을 내려다보는 범구의 가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쓸며 간다. 돌아보면, 이야기가 강물 같다. 강물만 같을까, 아암. 강물로 치자면야 넘쳐나는 강물이지. 범구는 멀리 지붕들이 오순도순 얼굴을 마주하듯 소복하게 엎드려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양업이 부모네와 얽힌 인연을 어찌 말로 다하랴. 풀어놓으면 명주실 타래보다 더 긴 인연 아닌가. 조그만 보퉁이 하나를 들고 앞서 가고 있는 보미의 머리채가 너플거린다. 녀석, 양업이네 집엘 간다면 저리 좋을까. 아주 발바닥에 돛을 달았구나. 범구는 덧옷 속주.. 2008. 7. 6.
<8>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8)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 속에 서흥을 지났다. 그날은 다들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봉산을 지나던 날은 한결 추위가 심해져서 사이사이 주막에 들러 몸을 녹여야했다. 언 길에서 연신 미끄러지는 건 유 신부였고, 차득이를 놀려먹다가 제풀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일행을 웃게 만든 건 한선이었다. 을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봇짐을 다시 지고 끙끙거리며 일어서는 한선을 보고 을수가 말했다. ‘옛말에 그른 거 있더냐. 헤엄 잘 치는 놈 물에 빠져 죽고, 나무에 잘 오르는 놈 떨어져서 죽는다더라. 앞을 봐라. 어린 도련님들도 화살같이 가는데 나잇살이나 처먹는 네가 그래 자빠지고 있냐.’ 주룩주룩 모래를 흩뿌리듯이 내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그들은 걸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싸락눈이 따끔거리며 얼굴을 때려 양업은 귀를.. 2008. 6. 29.
<7>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7) 연경으로 가는 사신들의 행차가 금천을 지날 때 비변사의 감찰관들이 짐을 검사하는 곳이 월정의 주막거리였다. 역관인 유진길의 도움을 받으며 동지사 편에 끼어 연경으로 갈 때마다 이곳 관리들의 수작에 치미는 화를 참아야 했던 하상이었다. 무엇이든 꼬투리를 잡아 발길을 붙잡고 값나갈 물건들을 뒤졌는데, 그렇게 빼앗긴 금붙이가 관졸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건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면 다 아는 예삿일이었다. 을수나 한선이와 헤어져 마을로 들어가 짐검사를 받아야 할 차득이는 벌레 씹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차득이 자네는 똥 좀 밟고 오게나.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한선이 또 그런 차득이의 염장을 질러댔다.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더니…’ ‘자네가 무슨 짐이 있다고 겁을 먹어. 돈 될 거라고는 미.. 2008. 6. 22.
<6> 제1부 신부의 어머니 - 먼 길(6) 다음 날이었다.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변하면서 날이 밝아왔다. 채비를 마친 하상이 대건과 양업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가는 길이 험하니 특히 조심들을 해야 한다. 그 험하다는 청석골을 넘어야 하고, 금천으로 가자면 월정이라는 데를 지나가야 하는데 거기를 지키는 관졸들이 아주 못되기로 소문이 나 있어.’ 새벽바람이 차다. 말을 할 때마다 하상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대건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청석골이면 꺽정이가 있었다는 거기지요? 꺽정이 있던 데가 어떤 덴지 잘 봐 둬야겠다.’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처음 듣는 소리라 아무래도 궁금했던 양업이 대건에게 다가서며 속삭이듯 물었다. ‘대건아. 꺽쟁이가 뭔데?’ 어렸을 때 마을 앞 냇가에서 잡히곤 하던 꺽쟁이라는 못생긴 물고기가 있기는.. 2008. 6. 15.
<5> 제1부 신부의 어머니 - 먼 길(5) 새벽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얼음이 밟히는 소리가 바작거렸다. 눈이 녹으며 길이 파인 곳마다 종잇장 같이 얇은 얼음이 얼어 있었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모여 바작거리면서 참나무 불똥이 튀는 소리를 냈다. 양업을 비롯한 소년들을 데리고 하상이 먼저 길을 서둘렀다. 주막을 나서자마자 몸을 파고드는 찬 기운에 양업은 몸이 오그라드는 것같다. 겨우 마을을 빠져나왔을 뿐인데 벌써 콧등이 시렸다. 어둠이 걷히지 않는 새벽길을 그들은 조심스레 움직였다. 먼 어딘가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길을 걸을 때는 흰 것을 조심해라. 대체로 흰 걸 밟으면 미끄러지거나 넘어진다.’ 하상이 나직하게 말했다. 흰 것이라… 대건이 검은 땅만을 밟으며 훌쩍 앞장을 서서 걷기 시작했다. 콜록거리.. 2008. 6. 8.
<4> 제1부 신부의 어머니 - 먼 길(4) 나지막하게 엎드린 초가집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올랐다. 비탈진 산골의 저녁은 빨랐다. 해가 기우는가 하자 어느새 방안이 어두컴컴해졌다. 부엌으로 나와 불을 지피며 보미는 밖을 내다보았다. 갔다. 멀리 갔다. 갔을 테니… 지금쯤은 어디를 걷고 있으려나. 처마 끝마다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어제는 쌓인 눈을 얼리면서 춥고 바람까지 불었다. 비탈에는 겨우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로 빼꼼하게 길이 뚫려 있었다. 그 길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문풍지가 울었다. 오늘도 눈 온 뒤끝의 추위가 이어지려니 했다. 그런데 한낮이 되면서 낙숫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엔가 고드름을 길게 키워놓았다. 처마 끝을 따라 창을 꽂아놓은 것 같다. 자신의 팔만한 고드름을 내다보며 보미는 싸아 하게 아려오는 가슴을 쓸어안았다.. 2008. 6. 1.
<3> 제1부 신부의 어머니 - 먼 길(3)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대건을 바라보며 아버지 제준은 잠시 말을 잊었다. “우리 집안이 천주님을 만나 너까지 벌써 4대가 되었구나. 30여 년이 바람 같아. 네 증조부께서 옥사하신 지도 어느새 20년이 넘으니.” 긴 침묵이 방안을 감쌌다. “따로 당부할 말이 어찌 없으랴만, 너는 오직 윗대 어른들이 그토록 무참하게 돌아가신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잊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의 줄기가 면면히 네게 흘러들고 있음을 잊지만 않는다면 네 발길이 헛놓이는 일은 없을거다.” “아버님의 기대, 어그러뜨리지 않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제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건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어머니가 걱정입니다. 아기자기 정이 많으신 분이라. 제 생각에 얼마나 또 가슴을 태우실까 생각하면 저는 그게 제일 마.. 2008. 5. 25.
<2> 제1부 신부의 어머니 - 먼 길(2) “너를 이렇게 보내니 … 나는 한없이 기쁘구나 천주께서 이다지도 널 크게 쓰시기로 하셨으니 아비의 이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느냐 우리 한 몸 되어 주 섬기며, 큰 사랑으로 살아가자” 아침 햇살 눈부시다. 정하상의 집은 눈에 덮여 은빛으로 빛나며 아침을 맞았다. 밤새 내린 눈 위로 칼날이 꽂히듯 쏟아지는 햇살이 찬란했다. 가지마다 하얗게 눈을 얹고 서 있는 오동나무 위에서 까치가 울었다. 너까래로 마당의 눈을 치우던 을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오동나무를 쳐다보았다. “저런 하릴없는 녀석 봤나. 이놈아, 오늘 같은 날 무슨 소식이 올 게 있다고 아침부터 울어대냐.” 나무 뒤편으로 이어져나간 지붕과 담 위에서 부서지고 있는 아침햇살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먼 길을 생각했다. 햇살 속으로, 눈.. 2008. 5. 18.
제1부 신부의 어머니 (1) 먼 길 “천주님 사도로 조선 땅에 울리는 종이 되거라”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살아야 한다” “네가 마지막까지 가야 할 먼 길의 뜻 가슴에 새겨라” 눈이 내린다. 길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말들이 달려오는가. 바람에 불리면서 흰 갈기가 휘날리듯 함박눈이 쏟아진다. 눈은 어느새 집 뒤쪽의 넘실거리는 준령을 하얗게 뒤덮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잎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구불거리며 뻗어 있던 길도, 지난 번 내렸던 눈이 녹으면서 산비탈에 줄무늬를 만들었던 밭이랑도 이미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들어가라고 손을 젓던 남편 경환의 모습도 이미 없다. 내일이면 신학교가 있다는 먼 남의 나라 땅으로 떠나는 아들을 보러 남편은 눈 덮인 한양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나라고 가슴을 지지는 듯한 기.. 2008.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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