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3> 제1부 신부의 어머니 - 먼 길(3)

by 세포네 2008. 5. 25.
728x90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대건을 바라보며 아버지 제준은 잠시 말을 잊었다.

“우리 집안이 천주님을 만나 너까지 벌써 4대가 되었구나. 30여 년이 바람 같아. 네 증조부께서 옥사하신 지도 어느새 20년이 넘으니.”

긴 침묵이 방안을 감쌌다.

“따로 당부할 말이 어찌 없으랴만, 너는 오직 윗대 어른들이 그토록 무참하게 돌아가신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잊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의 줄기가 면면히 네게 흘러들고 있음을 잊지만 않는다면 네 발길이 헛놓이는 일은 없을거다.”

“아버님의 기대, 어그러뜨리지 않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제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건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어머니가 걱정입니다. 아기자기 정이 많으신 분이라. 제 생각에 얼마나 또 가슴을 태우실까 생각하면 저는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립니다.”

“자식을 둔 부모 마음이야 다 같겠지. 업보라 생각해야지. 네 위의 형을 잃었을 때도 어찌나 낙담을 하는지 혼이 나가는 줄 알았던 사람이다. 그런데다 너를 또 슬하에 두지 못하고 멀리 보내니 그 마음이 오죽하겠냐만.

그래도 어느새 컸다고 네 동생이 누이랑 같이 어미 마음을 다독거리더구나. 저희들이 알아서 형 몫까지 하고 있을 테니 염려 마시라고.”
“난식(蘭植)이가 속은 깊으니까요.”
“그 애들이 너를 참 자랑스럽게 알아.”
제준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데레사 당고모한테는 따로 인사 드렸느냐?”
“네, 아버지.”
외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면서 신부의 처소를 보살필 사람을 찾을 때 교우들이 한입으로 천거한 사람이 대건의 당고모인 데레사였다. 그후 데레사는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하상의 동생 정혜와 함께 신부 모시는 일을 해 왔었다.

열일곱 살이라는 좀 늦은 나이에 손연욱 요셉과 정혼을 했던 데레사였다.

어찌 저렇게 사람이 반듯한지. 물동이 하나를 이고 가도 그 뒷모습을 보며 마을 아낙네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던 데레사였다. 그러나 순조 24년(1824년)에 남편 요셉은 믿는다는 그것 하나 때문에 잡혀가 끝내는 해미 옥으로 숨을 거뒀다.

남편을 잃고 난 후에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만큼 반듯한 몸가짐으로 정절을 지켜온 데레사는 혼자 몸이 되어 가난한 살림에 시달리면서도 얼굴에 수심의 그늘이 없었다. 일주일이면 세 차례씩 대재(大齋)를 지키며 고행에 마음을 바쳐 생활했고 기도나 묵상에도 열심이면서 늘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당고모를 대건은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대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아버님. 인사드리겠습니다.”
우뚝 선 대건이 몸을 엎드리며 큰 절을 올렸다. 아들의 땋아 내린 머리채와 어깨를 내려다보며 제준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부디 몸을 낮추고 은인자중하거라. 짧게 생각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면서.”
“네, 마음 다잡고, 아버님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네 서슬 푸른 기상은 애비가 일찍이 아는 거다만, 다만 걱정은 네가 몸이 약하다는 거 그거 하나로구나. 늘 기도하마. 아들을 바라보는 제준의 눈길이 따스하게 떨린다. 잔병치레가 많고 아픈 곳이 떠나지 않던 아들이었다. 키는 컸지만 얼굴은 황달에 걸려서 누런데다가 늘 속이 쓰리다고 배를 쓸고 있지 않나, 툭하면 골이 아프다고 머리를 들지 못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아들이었다.

제준이 먼저 일어섰다.
“그럼 이제 나가자. 다들 기다릴 텐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길을 걷고 돌아오던 치장이 동생 방제의 어깨를 감싸며 문밖을 지나가고 있었다.
“너 또 그 좋은 머리로 다른 아이들보다 너무 앞서 가지 말아. 덧니가 달래 덧니냐. 튀어나와서 덧니지.”
“그렇지도 않아, 형. 다들 잘 해. 라틴어 공부해 보니까 알겠는데, 늦게 시작한 대건이가 어느새 쑥쑥 따라오는데 뭐.”
“나이가 한 살이 많아도 네가 형이니까, 동생들 잘 보살펴라.”
“저 믿는 데가 있어요. 양업이는 참 꼼꼼하지요. 게다가 기가 세기로는 대건이가 셋 중에 으뜸이거든요. 서로서로 덮어 주고 메워가고 그러면 우리 셋이 무서울 게 없을 텐데요.”
치장이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려서부터 한 번 들으면 잊는 법이 없이 총명한데다 성품이 밝아서, 형인 치장이 오히려 기대면서 둘은 좋은 친구처럼 지내온 사이였다. 이제 신학교로 향하는 동생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떠난다. 정하상, 조신철, 이광열이 일행의 앞에 서서 길을 잡을 테고 한선이와 을수가 짐꾼과 함께 뒤를 따를 것이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뒷담에 소담하게 쌓인 눈을, 그 눈 위에서 부서지고 있는 햇살을 바라보며 권진이는 툇마루 기둥에 몸을 기댔다.

짙은 눈썹 밑으로 큰 눈망울에 또 눈물이 차올랐다. 울고는 있었지만 가늘게 떨리고 있는 입술은 무르익어서 제 풀에 떨어진 능금 빛이었다. 그 얼굴에는 어디에도 속기가 없었다. 기둥에 기댄 가냘픈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몸매가 가을날 널어놓은 비단 한 폭이 말라가며 하늘거리는 듯했다.

화사한 얼굴이었다. 물 위로 솟아오르듯 그 모습이 맑고 투명해서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눈보다 더 희게 빛나는 살결에 갸름한 얼굴에는 젊음이 영글어서 터질 듯 두 볼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이제 간다만… 네게 남기고 갈 말이 없구나.”

다만 고개를 숙이고 서서 진이는 유방제 신부의 말을 들었다. 신부님이 욕보신 게 있다면 다 제 탓입니다. 다 제가 어린 탓입니다. 떠나는 신부님 앞에 이 말만은 놓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했으면서도 진이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떠나면, 이제 너는 어디로 갈 테냐?”
진이가 발끝을 내려다본 채 고개를 저었다.
“모방 신부께서 어떻게든 보살펴 주지 않겠느냐. 나도 따로 부탁을 했다. 신부님 말씀대로 따르거라.”

진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신부님. 제 염려는 마세요. 저는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 함께 살 작정입니다. 그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유 신부의 눈길을 마주보던 진이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몰락한 양반집 딸로 태어난 진이었다. 아버지 권 진사는 늦게 천주교와 만나긴 했지만 어머니도 입교시킨 분이었기에 어려서부터 천주를 가까이하며 살았었다. 아버지는 임종 때 가서야 영세를 했는데 그녀도 그때 함께 세례를 받았다. 수절을 하며 살던 어머니와의 생활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그나마 의지할 곳이라고는 교우들밖에 없어서 이집 저집으로 교우 집에 더부살이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절색이로구나.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오게 하는 아름다운 자태 때문이었을까. 그 가난 속에서도 열두 살에 혼례를 치를 수는 있었다. 교우 집안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뻐서 나선 길이었지만 그러나 남편된 사람의 집이라는 게 솥에는 넣고 삶을 것이 없고, 비바람 막아 줄 거적 하나 없이 가난했다. 그때 혼례를 치렀지만 함께 살 수가 없다는 기막힌 사정을 교우들 사이에서 들은 게 정하상이었고 그가 마침 먼 친척이었다.

정혼을 했다지만 진이는 처녀의 몸이었다. 하상의 집에 와 집안 살림을 도우며 몸을 의탁하고 지내게 되었을 때는 이렇게라도 곤궁한 생활을 면하나 보다 했었다. 그리고 진이는 결심했었다. 평생 수계하며 동정으로 살겠다는 결심이었다. 정하상의 믿음 가득한 집안에서 정혜 언니와 생활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스스로를 다지고 다져서 천주님 안에서 동정으로 살자는 가슴에는 늘 아지랑이가 끼었다. 그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늘 아슴푸레 했다. 가슴에는 늘 오월의 이슬비가 내렸다. 무엇이든지 키워 올리고 피워 올릴 봄비가 내렸다. 수계하며 평생을 동정으로 살겠다는 결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조차도 꿈길 같았다. 한 여인의 일생 속에 도사리고 앉아 질퍽거리고 아우성치며 흘러갈 세월의 저 많은 사연을 그녀가 어찌 헤아릴 수 있었으랴. 다만 그 길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운 길을 버리지 않겠노라 결심했을 뿐이었다. 힘들더라도 그 길이 복되고 값진 길이라면 그 길을 가겠노라 희원(希願)했고 이런 결심 앞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렇게 믿었었다.

그러나 조선으로 들어온 유방제 신부가 정하상의 집에 기거하게 되면서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하늘같은 신부님을 모시는 일이라 어린 마음에 다만 지극정성으로 받들면 되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교우들 사이에서까지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소문은 그렇게 퍼져나갔다. 종아리 걷은 거 보고 나서 허벅지 봤다는 게 입소문 아니던가.

또 다른 세상살이의 깊은 뜻이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이로서는 유방제 신부가 청나라로 돌아가게 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죄값을 어떻게 치러야 하나.

유 신부의 손이 나와 진이의 손을 감쌌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는 그녀의 손에 유 신부가 조그만 주머니 하나를 쥐어주었다.

“이거 받아 두거라. 네 생활이 많이 곤궁해 질 텐데… 쓸 데가 있지 않겠냐.”
그렇게 돈을 건넨 유 신부는 화난 사람처럼 발걸음도 어지럽게 돌아섰다.
그가 돌아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진이는 털썩 툇마루에 주저앉았었다.
진이가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이제야 알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만남이 있었기에 이런 이별이 있는 줄을, 이제야 알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헤어짐이 슬프기에 그 만남 또한 슬픈 것이었음을.
진이는 얼굴 가득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이제 나도 어디론가 가야하는구나.
〈계속〉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