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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12>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by 세포네 2008.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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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으로 낸 조그마한 봉창에서 햇살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경환은 가만히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범구가 천천히 말했다.

‘올해는 무사히 넘기려나 모르겠습니다…또 사람사냥질이나 없어야 할 터인데.’

‘그걸 누가 짐작하겠습니까.’

‘미물 같은 제 생각으로는 야속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우리네 사정을 천주님이 모르실 리 없으신데, 어쩌자구 보고만 계시는지…’

‘허어, 안 할 소리. 더 때를 기다리라는 뜻이겠지요.’

‘죄송스럽습니다. 회장님 앞에서.’

‘아직 주님께서 마련하신 때가 아니라는 뜻이라 생각하십시다. 제 생각에, 보미 일은 부모가 속 끓인다고 달라질 일도 아닙니다. 자식이 내 마음처럼 되는 것이라면 부모노릇 마다할 사람이 없지요. 그렇기만 하다면야 누가 자식을 두고 애물이라 했겠습니까.’

나직나직 말을 이어가면서 경환은 짧은 겨울해가 떨어져 가는 창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을 그때 거기서 만났었지. 감이 잘 익어서 나무마다 탐스러웠으니까. 경환은 범구를 만나던 그해 그날을 입맛으로 기억했다. 홍시가 그해따라 참 맛 있었다고.

우물길에 서 있던 감나무에는 또 얼마나 실하게 감이 달렸던가. 투실이, 그 강아지놈 데리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양업이가 머리에 떨어지는 감을 맞기도 했으니까.

투실투실하게 살도 오르고 털이 무성하기는 커녕 얼굴 생김생김부터가 빈상인 강아지였는데, 어쩐 일인지 양업은 그 강아지에게 투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지냈었다. 정이야 괴는대로 간다던가. 짐승이 그런데는 눈치가 더 빨라서 다른 식구들에게는 덤덤해 하면서도 두어 집 건너편에서 양업의 목소리만 들려도 덩실거리며 뛰어나가던 강아지가 투실이었다.

겨울이 성큼 다가서던 늦가을, 그날 경환은 해미에 있었다. 내포(內浦) 지방을 둘러보러 갔던 길에 아내의 친정이 있는 여사울에 들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해미성 밖 주막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났을 때였다.

사립문 밖에서 무슨 실랑이를 하는가, 들리는 주모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네가 지금 소경한테 눈짓하냐? 그러고 서 있다고 해서 불쌍할 것 하나 없다. 너는 말이다. 우리는 뭐 흙 퍼서 장사한다든? 한두 번도 아니고, 끼니때마다 와서 이러면 나 원 참.’

앞에 앉아 담배를 말고 있는 윤필용에게 경환이 물었다.

‘밖이 왜 저렇게 시끄러워?’

오랜만에 찾아보는 교우였기에 오늘은 그의 집에서 묵어갈 참이었다. 낯선 사람이 드나드는 걸 이웃사람 눈에 띄게 할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 두 사람은 날이 어두우면 집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밖을 흘깃거리며 필용이 말했다.

‘웬 비렁뱅이 아이를 가지고 그러는 거 같은데…’

‘저런 일을 봤나, 굶는 마당에 애가 무슨 죄가 있나.’

가을걷이를 끝내고 내포 쪽 교우들을 찾아갔던 건 마치 이삭줍기라도 하는 심정에서였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숨어서 천주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떠났던 길이었다.

모진 박해는 오고 또 오건만 그 무엇도 달라진 것이 없이 세월만 무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충청도가 어떤 곳인데 씨가 마르기야 했으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떠났던 발걸음이었다.

박해를 겪어내면서 더러는 그랬다. 못 믿을 건 서울의 양반들이라고들 했었다. 천주학쟁이는 모조리 잡아들여 피를 뿌려대던 박해의 칼바람 아래 뎅겅뎅겅 목이 떨어져 나가는 때가 아닌가. 그렇건만 그래도 바탕을 지켜, 나 믿는 사람이오 하고 목을 내밀어 그들의 칼을 받은 건 흔들릴 줄 모르던 아랫것들이었고 미련할 정도로 제 안의 것을 숨길 줄 모르던 충청도 백성들이었다. 그 서슬에 자라처럼 목이 움츠러들어서 살길을 찾기에 눈이 멀었던 서울의 양반들과는 그렇게 달랐었다.

‘주막 인심도 그렇고, 이 시절에 주막에 와서 동냥을 하다니, 그것도 해괴한 일이로군.’

중얼거리며 경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엎친 데 덮친다던가. 흉년에 괴질까지, 흉흉한 일이 끊이지 않으니 너나없이 힘든 한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시절이 가을이 아닌가. 비가 내려도 가을비는 떡 비요, 가을에 중 싸대듯 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가을이면 시주 받으러 다니는 중들의 발길이 바빠지는 것도 곡식을 거두고 난 인심이 그만큼 넉넉해진다는 걸 두고 하는 소리다.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니 가렴주구요,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니 매관매직이고 나라에는 선정이 없다. 백성의 살을 깎고 뼈를 발리니 백성은 어디에 수족을 두며 어디에 하소연을 할 것인가. 이것은 경환에게 있어 한평생의 화두였다. 천주님께도 물어보지 않았던가. 천주님. 세상의 이 불평등을 어찌하여야 합니까.

세상의 모든 재물을 하루 한시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고루 가질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면, 그때부터 이 불평등이 사라지겠습니까? 아니지요. 사람들은 한 나절이 안 가서 또 불평등을 만들어 낼 겁니다. 누군가는 그새 물건을 사고팔아 이익을 남겨 재산을 불릴 테고, 누군가는 주색잡기로 어느 새 가진 걸 다 날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제 것만 중한 줄 알아서 널리 고르게 쓸 생각은 않고 혼자 꿰차고 깔고 앉아 있겠지요. 한 나절만 지나도 세상은 어느 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뉠 겁니다. 이게 주님께서 만들어놓은 이 땅의 꼬락서니입니다. 사람살이의 꼬락서니입니다.

가을에 못한 동냥 봄에 하랴 하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런데. 가을걷이 끝난 이 시절에 주막에서 끼니를 구걸하는 아이가 있다니 이건 건 또 무슨 사정인가 싶어 경환이 몸을 일으켰다.

필용이 경환의 옷소매를 잡았다.

‘자네 또 왜 일어서고 이러나. 그냥 앉아 있어.’

‘딱하지 않은가. 모른 체 할 일이 따로 있지. 이럴 때는 내 배 부른 것도 죄여, 이 사람아.’

‘꿩 잡는 포수는 꿩만 잡고 범 잡는 포수는 범만 잡는다던가, 자네도 참 못 말리는 사람일세.’

필용이 따라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뭘 보면 참지를 못한다니까. 아,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 한다고 허지 않든가. 이번엔 또 거지야?’

이번에는 또 거지냐는 말에는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힘든 일,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넘기지를 못하는 경환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장에라도 가는 날이면, 수북하게 쌓인 과일더미 앞에서도 남들은 머드러기만 골라서 사 가는데 어디 흠 없는 것은 없나 살펴가면서 남들이 안 사갈 것, 못 팔 것만 골라 사는 사람이 경환이었다.

어쩌자고 자네는 그렇게 몹쓸 것만 골라서 사는가. 어이가 없어서 묻는 사람들에게 경환은 태연하게 대답하곤 했었다. 나라도 이런 걸 안 사면, 그렇지 않으면 장사꾼은 뭘 먹고 사나.

자네 같은 사람은 천주 안 믿어도 될 사람이여. 오죽하면 필용이 그런 말을 했을까.

‘다른 집으로 가 보래도 그러네.’

매몰차게 내뱉으며 돌아서는 주모의 뒤에 땟국이 흐르는 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요? 주모.’

‘저 아이가 동냥을 오는데, 오는 것도 한두 번이지. 때만 되면 맡긴 거 찾으러 오듯이 드나드니.’

경환이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지저분한 얼굴을 닦아 내린 눈물 자국이 하얗게 두 볼에 선명했다. 아이의 손을 잡아끌면서 경환이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서둘러 국밥이나 하나 말아 주슈.’

그렇게 경환은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옆에 앉혔고, 아직 뚝배기에서 보글거리는 국밥이 김을 내며 앞에 놓였지만 아이는 수저를 들지 않았다. 이빨을 악물듯 입을 오므린 채 아이는 국밥 그릇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서 먹어, 이 녀석아.’

몇 번 그렇게 다그치고 났을 때였다. 아이가 턱은 쳐들지도 않은 채 눈을 치뜨면서 물었다.

‘가지고 가면 안 돼요?’

옆에서 보다 못한 필용이 물었다.

‘요놈 말하는 것 좀 봐. 너 말고 누가 있어? 동냥하는 주제에 네 배부터 불려.’

오므리고 있던 아이의 입술이 비실비실 움직이는가 하자, 두 볼 위로 눈물이 덜렁덜렁 떨어졌다. 경환은 그 눈물방울이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너 이걸 가져 갔음 좋겠나 보구나.’

아이가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동생들이 있냐?’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이 계신가 보구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용이 손을 내저었다.

‘어른이라는 게 있으면 동냥을 나서도 제가 나설 일이지 어린 너를 시켜? 거 아주 몹쓸 사람이네.’

아이가 손등으로 두 볼의 눈물을 소리가 날듯이 벅벅 닦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화를 내는 듯 또렷했다.

‘아버지가 아파요.’

경환이 벌떡 일어서며 눈물을 훔치는 아이의 손을 움켜잡았다.

‘가 보자. 어디냐?’

해미천 삽다리 아래 널브러져 있는 범구를 그때 경환은 처음 보았었다. 그것이 그들의 만남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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