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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60

[탄생 200주년] <2> 배티에서 만난 최양업 신부 - 조선에 돌아오다 배티를 사목 거점으로 박해받는 교우 찾아가 사랑 전하다 최양업(토마스)과 김대건(안드레아). 같은 조선인 신학생으로, 같은 조선인 부제로, 둘은 같은 길을 걸었다. 사제 수품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육로를 통해, 해로를 통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갈 입국로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함께’ 꿈꾸고,‘ 함께’ 포교할 날을 기다렸다. 둘은 그렇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 따라 걸어 그렇지만 두 사제는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사목을 함께할 수 없었다.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는데 죽음은 둘을 갈라놓았다. 세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부제였던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진자샹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첫 번째 사제가 됐지만, 사제가 된 지 11개월 만인 .. 2021. 3. 10.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4) 최양업 유학하다 뛰어난 재능과 성실함으로 ‘거룩한 사제’ 기대주로 인정받아 낯선 환경에도 건강 유지하고 스승과의 토론에도 적극적 김대건보다 사제품 늦었지만 실망 않고 어학·신학공부 매진 조선 순교자 행적 라틴어 번역 82명 가경자 선포에 기여해 유학시절 배운 음악지식으로 훗날 천주가사 지은 것 추정 13년 하고도 2개월. 최양업(토마스)이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한 시간이다. 김대건과 함께 유학길에 오른 최양업 역시 김대건과 함께 낯선 곳을 전전하며 어렵고도 어려운 유학생활을 보냈다. 심지어 김대건보다 5년 늦게 사제품을 받았기에 유학생활도 더 길었다. ■ 촉망받는 신학생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는 이 학생에게서 많은 재능, 무엇보다도 좋은 판단력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브뤼니에르 신부는 그를 가르치기에 .. 2021. 2. 25.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2) 최양업 태어나다 비옥한 땅에서 싹 틔운 신앙, 한국교회 초석이 되다 증조부로부터 전해온 신앙 냉담해진 가족들을 떠나려는 아버지 최경환의 선택에 놀라 신앙 지키기 위해 고향 떠나 과거에는 형편이 부유했으나 그리스도 위해 궁핍 받아들인 가족의 회심이 큰 영향 끼쳐 삶으로 신앙 모범 보여준 부친 교리와 기도문 가르친 모친 부부의 종말론적 순교 영성은 최양업 신부 사명 완수의 힘 “부모가 착해야 효자 난다”는 말이 있다. 가문의 분위기나 집안 전체의 전통도 어린 자녀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 누구보다도 부모의 존재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김대건, 최양업 모두 신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의 신앙을 토양 삼아 자신의 신앙을 싹틔울 수 있었다. 최양업의 탄생을 살피면 부모의 신앙이 얼마나 큰 모범이 되는지를 살필 수 있다. ‘.. 2021. 2. 25.
[탄생 200주년] (1) 하부내포 청양에서 만난 최양업 유학의 시대,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갖은 박해에도 신앙 지키다 ▲ 대전교구 청양 다락골성지 전경. 성지 오른쪽에 2008년 교구 설정 6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기념 성전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소성당과 사제관, 성지사무실 건물이 보인다. 산 능선으로 오르면 37기의 줄무덤이 나온다. 3월 1일로 한국 천주교회 두 번째 사제인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가 탄생한 지 200주년을 맞는다. ‘길 위의 목자’로, ‘땀의 증거자’로 한 생애를 살다간 최양업 신부. 조선 백성들, 특히 박해받는 교우들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의 발걸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거듭되는 박해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롯이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에 의지하며 하느님 백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 2021. 2. 25.
(29·끝) 배론에서 영면하다 베르뇌 주교의 선견지명이 최 신부 유해와 묘지 지켰다 ▲ 배론성지 산 중턱에 조성돼 있는 최양업 신부 묘.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 기도하고 있다 ▲ 배론성지 최양업 신부 묘지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세워져 있는 최양업 신부상 ▲ 론성지에 재현돼 있는 옛 소신학교. 이곳을 사목하던 푸르티에 신부가 최양업 신부의 위독 소식을 듣고 배론에서 약 68㎞ 떨어진 어떤 교우의 집으로 가서 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임종을 지켜봤다 배론에 유해 안장… 임종 장소 미상 페롱 신부 ‘작은 교우촌’ 기록뿐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 주도로 5개월가량 가매장됐다 묏자리 옮겨 이장 이유 놓고 임시 매장설 등장 학자들 ‘전염병 예방 위한 것’ 추측 ‘시신 유실 위험·관리 차원’ 의견도 병인박해 후 수십 년간 방치돼 있다 해.. 2017. 5. 7.
(28) 40세 나이로 선종 조선의 거룩한 사제, 환란 속 교우들 돌보다 ‘주님 품으로’ ▲ 최양업 신부는 1861년 사목 보고를 위해 서울에 있는 베르뇌 주교를 찾아가다 문경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졌다. 사진은 최 신부가 자주 다녔던 문경새재 관문. ▲ 경북 문경에 조성된 진안리 성지 입구. ▲ 진안리 성지 내 십자가와 안내판. 전국으로 퍼진 ‘경신박해’ 9개월 지속 최 신부, 언양 죽림굴 주변 사목 방문 풍비박산 난 교회 안정 되찾도록 도와 결과 보고차 베르뇌 주교 만나러 상경 과로·장티푸스로 쓰러져 병자성사 받아 임종 전까지 “예수 마리아” 부르다 선종 선종 장소, 문경 혹은 진천 추정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 2017. 4. 23.
(26) 주요 사목지 ▲ 경남 언양에 위치한 죽림굴 입구. 최양업 신부가 경신박해를 피해 3개월간 은신하며 마지막 사목보고서를 작성한 곳이다. 순례자들이 두고 간 십자가와 성모상이 보인다. ▲ 죽림굴 내부. ▲ 원주교구 배론성지. ▲ 충북 진천 배티성지를 찾은 수녀들이 기도하고 있다. 가톨릭평화방송 DB 산넘고 물건너 해마다 공소 100곳 넘게 찾아 병석 누운 페레올 주교·다블뤼 신부 대신 1850~1852년 전국 공소 69% 사목 나서 5개 도 걸쳐 해마다 약 2750km 직접 방문 1860년 경신박해 땐 언양 죽림굴에서 은거 3개월간 살며 마지막 사목 보고서 집필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해마다 사목 보고서 형태의 편지를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있는 스승에게 보냈다. 그 편지마다 도앙골(1850년), 절골(1851년),.. 2017. 4. 9.
(25)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서다 시대를 앞서 신자 눈높이 사목 펼쳐 ▲ 최양업 신부가 산골 우물가 무궁화 나무 아래서 동네 사람들에게 천주가사 중 ‘사향가’를 가르치는 모습을 인형작가 임수희씨가 인형으로 표현한 작품. 출처=가톨릭 굿뉴스 최양업 신부는 민족의 주체성뿐 아니라 문화적 주체성을 뚜렷하게 지닌 사목자였다. 그는 스승이며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장인 리브와 신부에게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할 때 조선의 현실과 풍속을 익힌 후 보내라고 요청했다. 또 공자ㆍ맹자가 조선인이 아니며 사대부 양반들의 글인 한문도 우리나라 글이 아닌 외국어라고 했다. 조선 문화와 중국 문화를 구별하여 중국도 외국이고 유교도 외국 사상이라고 했으며, 조선의 종교 문화에는 불교ㆍ유교ㆍ도교ㆍ무속이 혼재하고 있다고 했다. 또 가톨릭 교리에 대한 학문적 탐구 .. 2017. 4. 2.
(24) 회개의 복음적 가치 최양업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신자들 이야기 ▲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의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곧 신앙의 자유가 올 것이라고 희망했다. 사진은 최 신부의 사목 활동지였던 경남 언양 살티공소에 있는 김영제 순교자 묘소. 최양업 신부는 ‘회개’의 복음적 가치를 굉장히 중시했다. 그는 편지 곳곳에서 회개한 신자들을 통해 맺어진 복음의 열매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소개하고 있다. 인간은 회개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며 내세에서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최 신부는 많은 회개 사례를 편지에 자세히 적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최 신부가 1857년 9월 14일 불무골 교우촌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 있던 회개 사례를 모았다. 최 신.. 2017. 3. 5.
(23) 3년간의 사목 중심지 중부고속도로 진천 IC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백곡저수지를 거쳐 구수 삼거리에서 안성 방향으로 서운산 자락을 타고 약 7㎞를 가다 보면 왼편에 배티성지가 나온다. 도로명 주소로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이다. 배티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다. 아울러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교구장이 설립한 첫 번째 공식 신학교가 자리했던 곳이다. 충청도, 특히 오늘날 충북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경기도 양근의 권철신(암브로시오)일가에 의해서다. 이국승(바오로)과 이기연 등이 권철신ㆍ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후 충주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배티 교우촌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경기도와 내포 지방 그리고 경상도 일원에서 피신한 신.. 2017. 2. 19.
(22) 10년간 조선 교회 이끈 페레올주교 그의 세 가지 업적 ▲ 페레올 주교가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 길림 소팔가자 교우촌에 머물며 최양업 신부를 가르치면서부터다. 사진은 소팔가자 성당 전경. ▲ 페레올 주교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배티에 소신학교를 설립했다. 사진은 배티 성지에 복원된 최양업 신부 동상. ▲ 페레올 주교가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소팔가자에 머물러 최양업을 가르치면서부터이다. 사진은 소팔가자 교우촌 입구에 조성된 김대건로. 제3대 조선대목구장 장 조제프 장 밥티스트 페레올(Jean Joseph Jean Baptiste Ferreol, 1808~1853) 주교는 1839년 4월 28일 조선 선교사로 선발된 이후 1853년 2월 3일 선종할 때까지 약 14년간 조선 교회를 위해 헌신한 선.. 2017. 2. 5.
(21) 페레올 주교 선종 페레올 주교 ‘과로사’, 당시 조선 교회 성직자들의 숙명 제3대 조선대목구장 장 조제프 페레올(Jean Joseph Ferreol, 1808~1853) 주교가 선종했다. 1853년 2월 3일 밤 10시께 서울 주교관에서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안타깝게도 페레올 주교 선종과 관련한 최양업 신부의 글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사목 보고서 형식으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와 홍콩 극동대표부에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중 1852년도와 1853년도 서한이 유실된 상태다. 아마도 1853년도 9~10월께 쓴 그의 편지에 페레올 주교의 선종 소식을 알리지 않았겠나 짐작만 할 뿐이다. 현존하는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의 선종과 관련한 내용은 1854년 11월 4일 동골에서 홍콩 .. 2017.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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