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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60

(20) 사목 중심지, 도앙골·동골·절골 열심한 신자들 옹기종기 모여사는 충청도 교우촌을 거점으로 ▲ 최양업 신부가 귀국후 6개월간 사목 여행을 마치고 한달간 머물면서 1850년 10월 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던 도앙골 교우촌터. 돌제대와 최양업 신부 시성 기원비가 조성돼 있다. 최양업 신부의 초기 주요 사목지는 충남 부여 도앙골과 충북 진천 동골, 절골이었다. 1849년 12월 하순에 귀국한 최 신부는 6개월 동안 충청ㆍ전라ㆍ경상ㆍ경기ㆍ강원 전국 5개 도를 돌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최양업 신부가 사목할 교우촌은 5개 도내 127개소로 전체 교우촌(1850년 말 185개소)의 약 70%에 달했다. 최 신부는 1850년 1월부터 6월까지 약 2만㎞를 걸으며 교우촌을 방문했다. 그리고 1850년 7월 한 달 동안 충남 부여 도.. 2017. 1. 15.
(19) 가난한 신자들을 돕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다 성사 베풀기 위해 3~4일 위험한 산길 여행도 마다치 않아 ▲ 최양업 신부는 박해를 피해 산속 깊은 곳에서 곤궁하게 사는 신자들을 가엽게 여겨 신자가 단 2~3명뿐인 마을까지 찾아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을 묘사한 배티성지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리길재 기자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 최양업 신부는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에 숨어 곤궁하게 사는 신자들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 박해를 피해 부모를 따라 강원도 .. 2017. 1. 8.
(18) 선교사 측근 양반 신자들의 행패에 맞서다 선교사들의 양반 중심의 교회 운영, 불화의 불씨 돼 ▲ 리델 주교가 그린 빗속의 가마 행렬.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은 사목 여행 중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양반 신자와 건장한 신자와 동행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 최양업 신부는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초대 교회처럼 산속 교우촌에 화목하게 사는 신자들을 좋아했다. 사진은 배티성지에 조성된 옛 신학교터. 리길재 기자 최양업 신부는 성경 속 초대 교회처럼 신자들이 살아가길 소망했다. 반상(班常)의 구분도, 차별도 없이 모두가 평등하며 신앙 안에서 화목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는 공동체를 희망했다. 그래서 최 신부는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사는 신자들을 좋아했다. 최 신부는 이들을 ‘열심한 신자’라고 불렀.. 2017. 1. 1.
(17) 백성에게 희망을 보다 부조리한 현실 개탄, 복음 선포 더욱 매진 ▲ 청주교구 배티순교성지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성당의 유리화에 새겨진 최양업 신부 활동상. 가톨릭 굿뉴스 제공 ▲ 철종은 묫자리가 나빠 왕실이 번성하지 못한다는 지관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을 내쫓고 묘를 세웠다. 사진은 오늘날 경기 파주에서 서울 내곡동으로 이장한 인릉. ▲ 최양업 신부는 외척 세력에 의해 임금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철종을 못마땅해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자료사진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 2016. 12. 25.
(16) 첫 사목 활동 반년간 5000리 길… 3800여 명 양떼 보살펴 ▲ 최양업 신부가 한 달 간 머물렀던 도앙골 교우촌 터에는 탁덕 최양업 신부 시성 기원비가 서 있다. ▲ 최양업 신부가 귀국 후 첫 사목 방문을 마친 다음 1850년 7월 한 달 간 머물렀던 도앙골 교우촌. 현재 교우촌 터에 돌 제단와 돌 십자가가 꾸며져 있다.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준 후 최양업 신부는 충청도에 머물고 있던 페레올 주교를 찾아갔다. 1844년 12월 중국 소팔가자에서 헤어진 후 6년 만의 상봉이었다. 당시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ㆍ김대건에게 부제품을 준 후 김 부제와 함께 조선 입국 길에 나섰기에 그와 헤어졌다. 둘은 그간의 사정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하루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자.. 2016. 12. 11.
(15) 귀국 후 첫 성사 집전 최 신부, 중병의 다블뤼 신부에게 큰 힘과 위로 돼 줘 ▲ 최양업 신부가 귀국후 조선 교회에서 첫 번째로 성사를 집전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손골성지. ▲ 다블뤼 신부는 1850년 손골과 배티를 중심으로 소신학생을 양성했다. 사진은 다블뤼 신부의 신학생 시절 모습. 1849년 12월 하순 혹한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을 밟은 최양업 신부는 한달음에 서울에 도착했다. 최 신부와 그를 수행한 조선 교회 밀사들은 의주 관문을 통과한 후 별 어려움 없이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 신부는 서울에서 하루를 묵었다. 최 신부는 다음 날 충청도에 머물고 있던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를 만나러 길을 떠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중병을 앓고 있던 다블뤼 신부(훗날 제5대 조선대목구장 주교가 됨)에게 가서 병.. 2016. 11. 13.
(14) 귀국 다섯 차례 실패, 7년 노력 끝에 그리운 고국땅 밟아 ▲ 최양업 신부는 혹한으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의주성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사진은 1891년에 촬영한 의주성 전경. ▲ 압록강. 최양업 신부는 여섯 차례 귀국 시도 끝에 1849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을 통해 귀국했다. 사진은 중국 단동 지역에서 본 압록강 전경으로 멀리 신의주 지역이 보인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1849년 12월.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드디어 조선 땅을 밟았다. 1842년부터 7년에 걸쳐 여섯 차례 귀국 시도 끝에, 그리고 1836년 사제가 되기 위해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에 귀국에 성공했다. “그날 밤은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게다가 광풍이 참으로 거세게 불었습니다.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 2016. 10. 27.
(13) 첫 사목지 요동 차구본당 수품 후 첫 소임, 중국 신자들에게 강론·성사 베풀어 ▲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 차구성당은 조선교구 선교사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사진은 차구 성당의 옛 모습.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 제공 ▲ 베르뇌 주교 ▲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 차구성당의 오늘날 모습. 차기진 박사 제공 ▲ 오늘날 차구 성당이 있는 마을 모습. 멀리 보이는 산은 계관산이다. 차기진 박사 제공 1849년 5월 백령도 귀국 여행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온 최양업 신부는 다시 함선을 타고 중국 요동 차구(溝)로 갔다. 최양업 신부는 이곳 ‘눈의 성모 성당’에서 7개월간 머물면서 만주교구장 직무대행인 베르뇌 신부(제4대 조선교구장 주교)의 지시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 미사 때 강론을 했다. 또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 2016. 10. 27.
(12) 제5차 귀국 여행, 백령도 거센 파도 뚫고 갔으나 잘못된 지도로 꼬여버린 귀국길 ▲ 최양업은 백령도에서 신자들을 만나 배로 입국하려 했으나 만나지 못해 입국에 실패하고 만다. 사진은 백령도에서 본 서해. 「순교의 맥을 찾아서」 저자 오영환 교수 제공 ▲ 김대건 신부가 작성한 ‘조선전도’.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5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백령도로 떠났다. 제5차 귀국 여행이었다. 두 사제가 백령도로 향한 이유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의해서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보고에 따라 백령도 인근에 중국 산동 어선들이 자주 나타나기에 접선이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김대건 신부가 만든 지도 요청 메스트르 신부는 백령도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 2016. 10. 16.
(11) 사제 수품 드디어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 탄생 ▲ 최양업 부제는 우여곡절 끝에 1849년 상해 장가루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진은 평화방송TV가 2008년 제작한 특별 기획 드라마 ‘탁덕 최양업’에서 최양업 부제(왼쪽)가 사제품을 받는 장면. 평화신문 자료 사진 다시 상해로 돌아와 최양업 부제는 한 달간 고군산도 신치도에서의 표류 생활을 마치고 영국 함선을 타고 프랑스 해군과 함께 상해에 도착했다. 메스트르 신부가 요동으로 가기보다 조선의 소식을 듣고 조선에서 오는 지시를 따르기에 제일 적절한 장소라고 판단해 상해에 머물기로 했다. 최양업은 당시 상해 생활을 ‘귀양살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천상의 도움을 애원하는 데 너무나 소홀했고, 인간적인 희망에 너무 의존했으며 또한 무수한 죄를 범했습.. 2016. 10. 9.
(10) 제4차 귀국 여행(하) 신치도에서 눈물을 삼키며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으니… ▲ 최양업 부제와 프랑스 해군 560명이 한달간 표착생활을 했던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 모래사장터. 전주교구에서 세운 최양업 부제 일행 난파 체류지 팻말이 있다. ▲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태운 프랑스 함대가 좌초한 고군산도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 자리로 지금은 방조제 간척사업으로 새만금 33센터가 들어서 있다. 라 피에르 함장은 함대의 고군산도 좌초 사실을 알리고 영국이나 미국 함선에 구조 요청을 위해 8월 25일 오늘날 구명정에 해당하는 종선(從船)을 상해로 급파했다. 이 종선은 중국 광동성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대에 구조를 요청했다. 영국의 수해(Suhae) 함장은 주함인 다이달로스(Dadalus)호와 에스피에글(Espieg.. 2016. 10. 2.
(9) 제4차 귀국 여행(상) 고군산도까지 갔으나 고국 땅은 밟지도 못하고 ▲ 1858년 새로 건조한 프랑스 함선 라 글로와르 호. 아마도 신치도에 좌초된 라 글로와르 호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 라 빅토리외즈 호 함장 리고 드 즈누이 소령. 훗날 제독이 되어 코친차이나를 점령해 베트남을 프랑스 식민지로 만든 인물이다.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2월 말 제3차 변문을 통한 귀국 여행을 실패한 후 이듬해 홍콩으로 가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생활했다. 그는 이곳에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 글로 작성해 보내온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파리외방전교회 르그레즈와 신부의 교정을 거쳐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져 시복 자료로 활용됐다. “지금은 지루하.. 2016.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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