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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4> 제1부 신부의 어머니 - 먼 길(4)

by 세포네 2008.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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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지막하게 엎드린 초가집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올랐다. 비탈진 산골의 저녁은 빨랐다. 해가 기우는가 하자 어느새 방안이 어두컴컴해졌다. 부엌으로 나와 불을 지피며 보미는 밖을 내다보았다.

갔다. 멀리 갔다. 갔을 테니… 지금쯤은 어디를 걷고 있으려나.

처마 끝마다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어제는 쌓인 눈을 얼리면서 춥고 바람까지 불었다. 비탈에는 겨우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로 빼꼼하게 길이 뚫려 있었다. 그 길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문풍지가 울었다. 오늘도 눈 온 뒤끝의 추위가 이어지려니 했다. 그런데 한낮이 되면서 낙숫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엔가 고드름을 길게 키워놓았다. 처마 끝을 따라 창을 꽂아놓은 것 같다.

자신의 팔만한 고드름을 내다보며 보미는 싸아 하게 아려오는 가슴을 쓸어안았다. 가랑잎이 쓸리듯 비어오는 건 마음인데 치마 속으로는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만 같다.

눈 속으로 뚫린 비탈길을 범구가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길을 내느라 치워놓은 눈 더미 위로 지게를 진 모습이 오르내리며,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보미가 일어섰다. 마당으로 나서는데 아궁이 앞에 앉았던 치마폭이 따스했다.

털모자를 눌러 쓴 범구가 사립문을 밀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일찍 오시네요. 아버지, 늦으면 눈길에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 끝내셨어요?’
‘해다 놓은 목재 있는데 그까짓 게 뭐 일이냐. 사람들 손발 맞겠다, 투닥투닥 꿰어 맞추면 되는 거.’

아랫마을에 발구를 만들러 갔다 오는 길이었다. 모양새도 소가 끄는 것도 달구지와 비슷하지만 발구에는 바퀴가 없었다. 바퀴가 없는 대신 짐을 싣는 밑부분을 잘 미끄러지도록 깎아내고 눈길에 소가 끌도록 하는 발구는 눈이 많이 내리는 대관령이나 그 위 북쪽 지방에서나 쓰이는 물건이었다.

산 깊고 비탈 험한 이곳에도 눈이 내리면 겨우내 쌓여 있었다. 화전을 일궈 옥수수나 콩을 심으며 한 해를 보내고 났을 때, 겨우내 쌓여 있는 눈을 보며 생각해 낸 것이 발구였다. 그놈 하나 있으면 청솔가지만 찍어내려도 땔나무 걱정은 안 할 터인데. 처억처억 싣고 나서 눈길에 내리달리면 실어 나르기가 얼마나 편할 것인가. 그러나 범구 살림에 소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랬던 것이 며칠 전, 신유년 박해 때 부모 따라서 대관령 밑으로 피해 가 살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사람이 있어, 발구 이야기를 꺼내면서 뜻이 통했던 것이다. 아랫마을에는 소가 있었다.

지게를 내려놓고 나서 범구가 짚신에 친 감발을 풀었다. 비탈길에 미끄러질 염려도 있으려니와 짚신에 물기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발에 감았던 천이었다. 아버지가 풀어놓는 감발을 받아들고 얼음을 털며 보미가 말했다.

‘부뚜막에다 말려야겠네요.’
‘말리기는. 아랫동네는 눈 다 녹았더라. 무슨 조화인지, 우리 집이 보이는가 하자 거기서부턴 눈이 안 녹았어요.’

감발의 얼음을 털어내며 보미가 산 밑으로 눈길을 돌렸다. 눈이 녹았다면 최 회장님 댁에 내려가 볼 걸 그랬구나.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는 비탈길을 바람이 쓸고 갔다. 회장님 댁 옆을 떠나 아버지가 화전을 일구겠다면서 올라온 건 지난해였다. 양업의 옆에 살면서 오누이 같이 지낸 세월이, 가슴에서 갈대처럼 쓰러졌다. 그냥 산 세월이 아니었다. 둘이 함께 자란 세월이었다.

‘그럼, 아버지… 회장님 댁에 들르셨겠네요? 양업이는 잘 떠났다던가요?’
‘허어, 저 놈의 말버릇.’

범구가 딸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아무리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이르지만 딸아이는 말끝마다 양업이 양업이다. 그러면서 말대답을 한다. 도련님이라고 부르면 회장님께 야단맞는단 말예요. 사람이 귀천이 어디 있다더냐. 더욱이 너희는 우리 집 노복도 아니지 않느냐. 그게 경환의 말이었다.

범구가 말없이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버지.’
‘가시는 분이야 도련님인데 네가 왜 설렁거리냐?’
보미가 얼굴을 붉혔다. 범구가 천천히 말했다.
‘회장님이 갔다 오셨다기에 댁에 들를까 했다만, 누워계신다지 뭐냐. 몸살이 워낙 심하시다기에 폐될까 싶어서 그냥 왔다. 하루 이틀 지내고 나서 내려가 볼란다.’

작년에 담배를 말리면서 나온 이야기로는 올해는 일을 좀 늘이는 게 어떨까 싶다고 하셨으니, 올해 담배농사는 어떻게 할 것인지도 이야기를 해 봐야 하리라. 미리 가늠을 해 놓아야 그때 가서 서두르지 않는다. 해마다 지어오고 있는 담배농사는 여간 손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모판을 만들고 밭에 내고 나서도 쉬는 날 없이 벌레를 잡아 줘야 하고, 건조장에 불을 넣으면서 담배를 말릴 때면 밤을 새워 가며 해야 하는 일이 담배농사였다.

고개를 숙이며 짧게 한숨을 내쉰 보미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저녁 앉혔으니까 들어가 계세요. 아버지 잔뜩 얼어서 오실 줄 알고 불을 미리 넣었거든요. 방 따스할 거예요.’
‘안 속는다 이 녀석아. 옥수수 삶느라 그랬겠지, 참도 애비 생각해서 그랬을라.’
부엌으로 들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범구에게서, 다 컸구나 하는 말이 한숨처럼 새어나왔다. 어미 없이 이만큼이나 큰 딸이 고맙고 대견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걸 넘어서서 애비의 근심이 되는 줄을 너는 왜 모르느냐. 딸아이가 양업이 보다 두 살 위다. 오누이처럼 큰 세월이 십여 년이니 양업이를 바라보는 딸아이의 저 애틋함을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정이라고나 생각해라. 같이 큰 세월이 있으니, 그걸 어찌 잊기야 하겠니. 그러니 정이라고, 그렇게나 생각해. 다른 마음 더 키우지 말고.

치마폭 걷어 올린다고 건널 수 있는 강이 아니고, 쳐다본다고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지 않느냐. 뱀 그려 놓았으면 됐지 거기다가 또 발 그리겠다고 하면 어쩔 거냐.

이따금 문풍지가 울고 그때마다 등잔 불꽃이 옆으로 기울곤 했다. 수저 소리만 달그락거릴 뿐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의 그림자도 따라 흔들렸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보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쯤 어딜 가고 있으려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딸아이의 동그스름한 얼굴을, 그 얼굴 위에 조금은 주저앉아서 옆으로 퍼진 콧날을 내려다보며 범구는 짐짓 물었다.
‘뭐가? 뭐가 어딜 가?’
‘양업이요. 아니, 도련님이요.’
보미의 대답은 거칠 것이 없다. 밥그릇을 비운 범구가 천천히 숭늉 사발을 들어 마셨다. 딸의 마음을 아는지라 범구는 맥없이 한동안 벽을 바라보았다. 보미도 수저를 놓고 빈 그릇들을 포개기 시작했다.

‘얘야. 봄아.’
이제부터는 이렇게 달래는 길 밖에 없으리라 생각하며 범구는 마음속으로 뒤채곤 하던 말을 했다.
‘이제부터는 말이다, 양업이 도련님은 너한테… 보면 병이고 안 보면 약이다. 알겠니?’
‘제가 뭐 어때서요…’
보미가 말 뒤끝을 흐렸다.
‘보리 안 패는 삼월 없고 벼 안 패는 유월 없느니라.’
말은 그렇게 해 놓고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지 범구도 난감했다. 눈에 멀면 마음에서도 멀다는데, 이역만리 그렇게 떨어진 사이가 되었다. 언제쯤이라고 돌아올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양업이 아닌가.

‘다 때가 있다는 말이다. 너도 이제 다 컸겠다, 내가 언제까지 널 데리고 있을 것도 아니고… 마침 아랫동네 산사람들 사이에 널 눈 여겨 보는 아낙이 있나 보더라.’

산사람. 교우들끼리 산속 깊이 들어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자 믿지 않는 외교인들이 그렇게 부르면서 생겨난 말이었다. 그 말이 언제부턴가 교우촌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을 산사람이라고 부르게 되어 있었다.
‘혼담 이야기가 들어오면 아비는 그냥 그렇게 못 박을 거니까. 너도 다른 생각 말어. 믿는 사람끼리 만나 천주님 모시고 살면 되지. 그게 순리고 사람은 순리로 사는 거다.’

잠시 사이를 두는가 하더니, 보미가 또박또박 말했다.
‘왕거미도 한 해요 집 거미도 한 해다.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아버지세요.’
‘그래서?’
기왕 사는 거 제대로 살자고, 범구가 하곤 하던 말이었다. 왕거미도 한 해요 집 거미도 한 해다. 그 말을 지금 꺼내는 딸아이를 보며 범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야단이라도 칠 생각에서 눈을 똑바로 뜨는데 범구와는 달리 보미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 해 본 소리예요.’
이 아이가 이게, 온 바닷물을 다 먹고도 짜다 소리도 안 할 녀석이네. 이게 어쩌자고 이렇게 배포가 큰가. 그나저나 그것도 사내라면 모를까 계집이 이래서야 제 팔자 뒤숭숭한 거 밖에 무슨 잘 난 꼴을 보겠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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