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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10>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10)

by 세포네 2008.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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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놓인 자리가 너르고 퍼졌으면 편하게 한 평생을 살고, 놓인 자리가 고랑창에 돌밭이라도 이렇게 사는 건가 보다 하면서 살아. 믿으면서도 살고 속으면서도 살아, 에미 한세상도 그렇게 갔다. 그렇다지만… 사람인데, 나라고 왜 가슴에 열불이 없었겠냐.’

그러면서 어머니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고 했다.

‘눈 맞아서 남녀가 정분이 나서 살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니. 저 좋은 남자랑 깨소금 콩콩 찧어가면서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이 어느 아낙에겐들 없겠느냐 말이다. 가슴에 품고 썩혀서 고목나무 만들 사람이라면, 그럴 만한 사내라면, 가거라. 가서 한번 살아나 보거라. 세상살이가 둘밖에 더 있겠니. 살다 보니 정이 들거나, 먼저 정분이 나서 같이 살거나.’

그렇게 살았다. 범구 하나를 믿고 타관 땅 정처 없는 떠돌이를 마다하지 않고 따라나섰던 아내 산월이의 뒤에는 그렇게 어머니가 있었다.

가난을 못 면하는 세월이었지만 아내는 참 반듯했다. 없는 살림에도 손마디는 야물었고, 없이 살면서도 남 가련한 줄을 알았다. 있으면 있는 대로 입고 산다지만 남정네가 입성이 깨끗해야지 땟국이 흐르는 건 난 못 본답니다. 그러면서 범구에게는 기운 옷일망정 새물처럼 늘 풀을 세워 입혔고, 소매 끝에 때가 끼는 날이 없었다.

그 무렵 언제였으리라. 하루 종일 콩밭을 매느라 목이 따끔거리고 몸에서는 쉰내가 나게 땀을 흘려야 했던 여름 날, 저녁이었다. 시냇물에 몸을 담그고 바라본 하늘에서는 소리가 들릴 듯 은하수가 흘러가고 있었다. 서로 몸을 닦아 주다가, 고맙고 애틋한 마음에서 범구가 한 소리가 아내 산월의 기를 넘어가게 했다.

산월의 벗은 등에 물을 끼얹어 주며 범구는 말했었다.

‘암만해도 너는 팔푼인가 보다. 세상을 어찌 그렇게 앞만 보고 걷니?’

‘무슨 소리예요?’

‘고마워서 하는 말이지. 남 시샘을 할 줄 아나. 부러워 할 줄을 아나.’

그때 아내가 했던 말을 범구는 오래오래 잊지 못한다.

‘사람이 그럼 뒷걸음으로 살아요? 앞을 보고 살라고 눈도 코도 다 앞에다 만든 게 사람 아니든가요?’

산월이 벗은 앞가슴을 감싸며 몸을 돌렸다.

‘좋은 사람 만난 거 다 좋게 살자고 한 일인데. 잘난 거, 맛난 거, 저 높은 거는 다 내 꺼가 아니다 생각하면 되지요. 올려다보며 살자고 하면 내 목밖에 더 부러지나요. 내 옆에 있는 거, 내 품안에 있는 거나 이게 내 꺼다 하면서… 내려다보고 살면 되지요.’

그런 아내가 고마워서 범구는 말했었다.

‘산월아. 그러고 보면 말이다, 장모님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치마폭으로 막고 서서 딸에게 도망 보따리라도 싸라고 하셨으니… 고 놈의 끼가 너한테서도 팔딱댈까 겁난다.’

재미 삼아서, 놀리느라 한 말이었는데 그 말 때문에 범구는 사흘을 빌었다. 아내의 어디에 이런 모습이 숨어 있었나 싶었다.

‘사내놈 따라서 집 나가겠다는 딸에게 보따리 싸 준 엄마를, 너는 엎고 가지는 못할망정 그것도 말이라고 하니? 가죽이 모자라서 찢어놓았다면 모를까. 째진 입이라고 하면 다 말이 된다든? 네가, 네가 언제 장모한테 찬 물 한 그릇이라도 떠드린 적이 있다고, 뭐가 어째? 우리 엄마를 가지고 끼가 어떻다고? 엮어 매달아서 말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인사 같으니. 널 믿고 따라나선 내 팔자가 억울해서 이 일을 어쩌냐. 모래밭에 칼을 물고 죽어도 내가 이 말은 안 잊을 거다.’

그러면서 여자는 허리를 꺾고 울었다. 그런 아내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팔자가 억울해서가 아니라, 잊고 살자면서 억눌러온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터져서 이러는 거라고 범구는 생각했었다.

곰방대의 담뱃불이 꺼져 있었다. 먼 생각에서 돌아오며 범구는 천천히 불 꺼진 곰방대를 나무 등걸에 대고 타악타악 털었다. 으스스 추위가 몰려왔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였다. 뒤에서 따라오며 보미가 물었다.

‘아버지, 전날 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무슨 말을?’

‘나 시집보낸다면서요? 마을에서 누가 중신 서겠다고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얘가 그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았나 보다. 귀가 쫑긋해지는 말이었지만 범구는 짐짓 딴청을 부렸다.

‘시집은 가고 싶은가 보지?’

보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제가 왜 시집을 가요.’

‘그럼? 사람이 나이 차면 시집도 가고, 아이도 낳아서 한 집안 대도 잇고 그러는 거지. 나라고 뭐 홀애비로만 늙으라는 법 있다더냐. 다 큰 딸년 시집보내고 나면… 나도 새장가 좀 가 볼란다.’

‘망칙스럽기는. 엄마한테 상투 끄들리고 싶어서 그걸 말이라고 해요?
허이고 이놈 봐라, 죽은 제 어미가 와서 내 상투를 끄들 꺼라네. 누가 제 에미 딸 아니랄까. 뒤에서 보미가 또박또박 말했다.

‘시집은 가지만, 예수님한테 시집갈까 봐요.’

귀를 의심하며 범구가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돌아서는 범구는 가슴팍에 불덩어리가 떨어져 앉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뒤돌아서며 바라본 딸아이의 눈빛에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아무 흔들림이 없었다.

‘이런 불충이 있나. 어디다 빗대서 감히 그런 말을.’

‘한양에 가면, 문안에 동정녀들 사시는 데가 있다고 하던데요. 나도 거기로 들어갔으면 해서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마주한 눈길을 거두지도 않았다. 그런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범구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할 말을 잃었다.

동정녀들이 사는 집이란 이번에 정하상이 데리고 가는 양업이 대건이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 파치피코 신부가 마련해 놓은 집이었다.

파치피코 신부는 조선에 들어온 후 전교의 필요성 때문에 다섯 채의 집과 얼마의 땅을 샀다가 되팔기를 거듭했는데, 이것까지도 좋지 않은 소문이 되어 그를 괴롭혔었다. 중국인 신부라는 자리가 그런 거래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살 때는 비싼 값에 산 집도 서둘러 팔게 되니 싼 값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성직자가 돈을 낭비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유 신부가 산 집이나 토지만 해도 그랬다. 그로서는 다 속 깊은 생각에서 해 온 일들이었다. 사들인 토지에 집을 짓게 하고 생활이 어려워 갈 곳이 없는 신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기 위해 했던 일이었다. 누워서 다리를 뻗을 곳도 없는 신자들에게 들어와 살게 한 집이었는데 그것조차도 집을 사고팔며 재산을 늘려간다고 비춰졌던 것이다. 그렇게 마련했던 집 가운데 하나가 동정녀들의 집이었다. 주님을 받드는 생활 속에 기도의 나날을 보내며, 몸을 지켜 동정으로 살고 싶어 하는 처녀들이 머물도록 한 집이었다.

그 이야기를 벌써 보미가 어딘가에서 듣고 있었나 보았다.

얘야, 주님 모시고 사는 게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다. 언감생심. 할 생각이 따로 있지. 마음속으로는 그런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범구는 더 말을 달지 않았다.

‘그 말은 안 들은 거로 하마.’

양업이네 집을 향해 범구는 빠르게 언덕을 내려갔다. 휘적휘적 걷는 발걸음과 달리 그러나 마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집에서 그들을 맞은 건 양업의 어머니 성례였다.

‘보미, 얘 좀 봐. 그새 움쑥 컸네. 처녀티가 자르르 한 게, 곱기도 해라.’

보미의 두 볼을 쓰다듬어 보는 성례의 눈가에 잔잔하게 웃음이 흘렀다.

‘힘들지? 아버지 모시고 시중 드느라.’

툇마루에 걸터앉은 범구도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쟤가 애비 시중을 들어요? 말도 마십시오. 제가 딸년한테 효도하며 산답니다.‘

‘그런 말씀하신다고 내가 믿을 거 같아요? 우리 보미가 얼마나 착한데.’

‘저게 그게 크느라고 그러는지 요새는 하루 종일 말도 안하고 제 방에 틀어박혀 있지를 않나. 불러도 대답도 안한답니다.’

‘설마 그럴라구요. 아버지 알기를 얼마나 끔찍이 하는데. 하기사 보미 나이가 이제 굴러가는 가랑잎만 봐도 웃을 나인데, 왜 안 그렇겠어요.’

성례가 웃으며 보미의 등을 두드렸다.

‘너 마침 잘 왔다. 오늘이 열이틀이니 낼 모레 보름날 두부나 만들어 먹을까 했는데, 미룰 거 뭐 있겠니. 우리 콩 불려서 두부나 해 먹자.’

‘네 어머니. 제가 담글 테니 콩만 내 주세요.’

댕기꼬리를 너풀거리며 부엌으로 향하는 보미를 보며 성례가 말했다.

‘복도 많으세요. 저런 딸을 두다니. 보미 엄마가 절색은 절색이었나 봐요. 보미를 보면 그렇게 써 있어요.’

‘별이 백 개면 뭘 합니까. 달 하나 있는 거만도 못한 거지요.’

‘그저 말씀을 꼭 저렇게 하신다니까.’

그때였다. 안으로 들어서는 경환을 보며 범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회장님 들어오십니까? 바오로네 집에 가셨다기에 나가 볼까 하던 길입니다.’

이제 해를 넘기면 서른둘이 되는 경환에게는 나이가 열 살이나 위인 범구였지만 그는 먼저 허리를 깊이 굽히며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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