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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5> 제1부 신부의 어머니 - 먼 길(5)

by 세포네 2008.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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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얼음이 밟히는 소리가 바작거렸다. 눈이 녹으며 길이 파인 곳마다 종잇장 같이 얇은 얼음이 얼어 있었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모여 바작거리면서 참나무 불똥이 튀는 소리를 냈다.

양업을 비롯한 소년들을 데리고 하상이 먼저 길을 서둘렀다. 주막을 나서자마자 몸을 파고드는 찬 기운에 양업은 몸이 오그라드는 것같다. 겨우 마을을 빠져나왔을 뿐인데 벌써 콧등이 시렸다.

어둠이 걷히지 않는 새벽길을 그들은 조심스레 움직였다. 먼 어딘가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길을 걸을 때는 흰 것을 조심해라. 대체로 흰 걸 밟으면 미끄러지거나 넘어진다.’
하상이 나직하게 말했다. 흰 것이라… 대건이 검은 땅만을 밟으며 훌쩍 앞장을 서서 걷기 시작했다. 콜록거리며 방제가 기침을 했다.

한양을 떠난 발길이 개성을 지난 것은 사흘 후였다.
여남은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움직여서는 화를 자초하는 일이다. 일행을 둘로 나눠서, 길을 갈 때는 떨어져서 걷고 저녁만 모여서 함께 한다.
그렇게 못을 박은 것은 동지사 연행길을 마부가 되어 따라간 적이 있는 조신철이었다. 물론 그 보다 먼저 의견이 갈린 것은 세 소년들만이라도 말에 태워야 하지 않겠냐는 이광열의 주장이었다.

‘하루 이틀 길도 아니고, 도중에 병이라도 들면 그 낭패를 어찌합니까. 산길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평탄한 길에서는 말이 안 되면 하다못해 달구지라도 태워서 모셔야지요.’

광열의 말을 들으며 신철은 길지 않은 수염을 쓸어내렸고, 짐꾼으로 따라갈 엄차득이나 을수, 한선이는 말없이 삿자리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한 형제님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아무래도 무리예요. 말을 몇 필씩 움직인다는 건.’
신철이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을 갈마보던 하상이 말을 자르고 나섰다.
‘처음 생각대로 걸읍시다.’
신철이 짐꾼으로 데려온 차득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허지만 어린 도련님들이라, 먼 길에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유 신부님도 계신데.’
‘신부님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네. 그러나 말을 쓰자면 마부부터 구해야 하는데, 행렬이 얼마나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커지는가. 짐 수색이라도 당하면 일은 또 그만큼 번거로워질 테고. 더군다나 신부님은 우리말을 못하시니 할 수 있는 한 숨겨드려야 할 테고. 게다가 지금 아이들 걱정들을 하는데, 저들이 몇 살인가. 우리보다 걷는 게 빨라도 더 빠를 걸세.’

하상이 이야기의 뿌리를 걷어내듯 말했다.
‘여차하면 다리 찔뚝거리며 병신짓을 하면서라도 가야 할 판인데, 무슨 소리. 이 이야기는 이걸로 마감하세.’
다들 말이 없자,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한선이 물었다.
‘그런데, 이 날씨에 압록강을 건너려면 며칠이나 걸리겠습니까?’
‘이 달을 넘기기야 하겠오만, 겨울이라 장담은 못하지요. 눈이라도 깊이 쌓이면 하는 수 없이 머물러야 할 테니, 날짜 생각은 접어놓고, 그냥 갑시다. 가고 또 갑시다.’

결연하게 말해 놓고 나서, 하상이 모두를 둘러보았다.
‘고양으로 해서 파주로 빠져나가 개성을 거칠 텐데, 거기까지는 길이 평탄합니다. 문제는 거기서 금천으로 가자면 청석골을 지나야 하니까 그게 큰일이지요. 거기가 옛날에 꺽정이가 엎드려 있던 곳 아닙니까.’

‘꺽정이라면 저 옛날 그 도적놈 임꺽정이 말씀인가요?’
꺽정이가 지금 거기 살고 있다가, 이놈 하고 나서기라도 하듯 한선이 펄쩍 놀란다.
‘네, 거기가 빠져 나가는 데만 시오리 길인데 산이 험준하게 겹쳐 있는데다 그 사이로 길이 뻗어 있어서…’
그렇게 해서 일행은 둘로 나누어졌다. 방제, 대건이와 양업을 묶어서 그들을 데리고 하상이 앞장을 섰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 파피치코 신부를 모시기로 한 신철이 세 짐꾼과 함께 뒤를 따랐다. 너무 멀리 떨어질 일도 아니었기에, 거리는 물 한 모금 마시면서 행장을 다시 추스를 정도를 두기로 했다. 앞서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 정도의 거리였다. 산허리를 돌자면 사라졌던 모습이 내리막길에 서면 저만큼 앞서 가고 있는 뒷모습이 바라보였다.

의주까지의 천리 길은 세 개의 역도(驛道)로 이어졌다.
경기도를 지나는 길을 영서도(迎曙道)라 했고,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나는 길은 각각 금교도(金郊道)와 대동도(大同道)로 불리었다. 이 세 개의 역도를 걸어 1천리를 가야하는 길이었다. 천 팔십 리라고 했다.

영서도라고 불리던 길은 한양을 출발하여 고양, 파주, 개성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한양의 태평관에서 고양의 벽제관까지가 40리. 거기서 파주의 파평관까지가 또 40리에 임단관이 있는 장단을 거쳐 개성의 태평관까지가 또 40리길로 나뉘어져 있었다.

개성을 지나면서 황해도를 지나가는 길은 금교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역로는 금천, 평산, 서흥, 봉산으로 이어져 황주에 가 닿는데, 중심역인 금천에 찰방(察訪)이 자리하고 여러 공무를 관장했다. 황해도의 역도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곳이 여기였다.

연경까지 가는 길이라 하여 연행로(燕行路) 혹은 사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사행로(使行路)로 불리는 이 길은 한 해 내내 번잡할 수밖에 없었다. 사신들의 행차에는 국경에서 물건을 팔고 살 장사치들까지 합쳐져, 오백 여명을 넘나드는 적지 않은 사람과 문물이 오가는 부산한 행렬이 한 해에 다섯 차례나 되었다.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뒤섞이며 한 곳을 지나는 행렬이 한 해에 열 번이나 되니 한 달에 한 번씩은 북새통을 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길을 따라 먹고 사는 사람들과 거래가 늘어나면서 안주나 평양을 상업도시로 번창하게 했지만, 백성들의 생업에 주름을 잡는 일들이 없을 수 없었다. 관의 민폐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관졸들이 하는 짓거리라는 것이 으레 그러하듯이 사신이 오가면서 시도 때도 없이 소나 말은 물론 그 먹이까지를 대게 하거나 곡물을 차출함으로써 인근의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지우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발(擺撥)들이 부산하게 오가는 길도 이 길이었다.
‘의주 파발도 똥 눌 때는 있다더라. 서두르기는 젠장헐.’
떠나는 날 아침 한선이 씨부렁거렸듯이, 똥 눌 사이도 없이 말을 달리고, 덜렁거리는 불알이 떨어지지만 않을 만큼 뛰어야 하는 게 파발들이었다.

변방으로 내려 보내거나 거기서 올라오는 문서를 급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생긴 통신수단이었다.
불을 지피거나 연기를 피워 올려서 기별을 전하는 봉수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별 소용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나면서, 변방의 급보를 전달하기 위한 다른 수단이 절실했다. 그 필요성에 따라 생겨난 더 확실한 제도가 파발이었다.

파발은 문서를 가진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달리는 보발(步撥)과 말을 타고 달리는 기발(騎撥)로 나뉘어졌다. 기발은 매 25리마다 1참을 두어 말과 사람을 쉬게 했는데 오히려 사람이 들뛰어야 하는 보발은 매 30리마다 1참을 두어 서로 교대를 하며 달리게 했다. 아무리 급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는 뜻에서, 의주파천(義州播遷)에도 곱똥은 누고 간다더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런 시대의 반영이었다. 그러므로 파발이 다니는 길은 가장 빠른 요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 파발들의 길은 당연히 사신들이 오가는 길이 되었다.

신학교로 떠나는 세 소년도 이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어이. 엄 서방. 차득이 이 사람아. 자네도 평등이라는 말은 알겠지. 천주님은 평등하셔서 다 고르게, 다 같게, 다 함께 살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내셨다 그 말이야.’

먼저 간 사람들을 뒤따라 주막을 나서며 한선이 또 시작이었다. 저놈의 아가리, 너불대고 싶어서 잠 잘 때는 어찌 참았나. 을수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뒤를 따르고 차득이는 눈을 꿈벅거렸다.

‘천주님 앞에서야 양반 상것이 어디 있으며 귀하고 천한 차별이 무슨 소리냐 그거지만, 그래도 하나는 엄연히 차이가 있지.’
한선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차득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장유(長幼)는 유서(有序)라, 나이가 많고 적음에는 순서가 있느니라 하셨으니, 자네와 나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이거야. 나이가 아래인 자네와 나는 말일세. 물을 마셔도 내가 먼저요 자리에 누워도 내가 아랫목이다 그말이여. 그런데 자네가 싹수머리 없게도 어젯밤 아랫목 차지를 해?’
떠듬떠듬 차득이도 지지 않고 한 마디 했다.
‘천주님도 장유유서라고 가르치셨나? 언제 그런 말씀 하셨는데? 난 못 들어 버렸어.’
을수가 캐들캐들 웃었다.
‘이번엔 니놈이 당했다. 하이고 고거 참. 이렇게 고소할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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