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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9>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9)

by 세포네 2008.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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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어붙은 평양을 빠져나온 발길은 밤이 깊어서야 주막에 닿았다. 양업이 작은 주막에서 포개잠을 자고 일어나던 그날 아침, 수리산 깊은 산속에서는 범구가 딸 보미를 앞세우고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산을 내려다보는 범구의 가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쓸며 간다. 돌아보면, 이야기가 강물 같다. 강물만 같을까, 아암. 강물로 치자면야 넘쳐나는 강물이지. 범구는 멀리 지붕들이 오순도순 얼굴을 마주하듯 소복하게 엎드려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양업이 부모네와 얽힌 인연을 어찌 말로 다하랴. 풀어놓으면 명주실 타래보다 더 긴 인연 아닌가.

조그만 보퉁이 하나를 들고 앞서 가고 있는 보미의 머리채가 너플거린다.
녀석, 양업이네 집엘 간다면 저리 좋을까. 아주 발바닥에 돛을 달았구나.
범구는 덧옷 속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내며 딸아이를 불렀다. 걸음을 멈추며 돌아보는 보미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범구는 길옆의 나무 등걸에 주저앉았다.

보미가 갔던 길을 되돌아오며 물었다.
‘바람이 찬데… 쉬어 가시려구요?’
‘애비는 담배 한 모금 하고 갈란다. 너 먼저 내려가든가.’
곰방대에 담배를 재운 범구가 몸을 구부리고 부싯돌을 쳐 담배에 불을 댕겼다. 옆에 와 선 보미는 앉을 생각도 없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대개의 교우촌이 그러하듯이 이곳도 다르지 않았다. 요즈음은 좀 가라앉았다고 하지만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게 포졸이며 그들을 앞세운 밀고자 외교인들이다. 때문에 그들을 피해서 하느님을 믿는 마음 하나로 모여 사는 교우들의 마을은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지형이 있었다. 산세가 꼭 험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그것도 사람 사는 곳이 아니던가. 다만 넘실거리며 이어지는 산자락이 서로 엇갈리며 포개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닭이 알을 품듯 마을은 그렇게 숨어 있어야 하고, 그곳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라야 했다. 그래야 밑에서 무슨 일이 있다 하면 옷자락 하나를 벗어 흔들어도 위에서 쉽게 알아챌 수가 있게 마련이다. 위에서는 아래쪽이 쉽게 내려다보이지만 그곳으로 오르는 길은 굽이굽이 산 밑을 휘돌아 가기 때문에 올라오자면 그만큼 걸음이 더디고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길과 겹쳐진 산자락이 그 깊은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리라 생각도 못하게 몸을 숨기고 있는 마을. 가파른 길을 굽이굽이 돌며 올라와 보면, 서로 어긋나며 흘러내린 산봉오리와 봉오리가 멀리멀리 이어지고, 가려졌던 마을이 드러나면서 그제야 천혜의 피난처로구나 하며 절로 탄식을 하게 만드는 곳, 교우들이 숨어든 산 속은 으레 그런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봄이 오긴 오려나…’

보미가 혼잣말을 했다. 헛바람 든 녀석처럼 뜬금없기는. 소한(小寒) 대한(大寒) 지나려면 이제야 말로 한겨울이고, 말 그대로 엄동설한을 넘어야 하는데, 봄 타령을 하다니. 범구가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말했다.

‘아직 겨울도 초입이여. 입춘이 까맣게 멀단다.’
‘그런데 우습지요? 대한이 소한이한테 왔다가 울고 간다더니, 늘 보면 대한보다는 소한이 더 추우니.’
‘이름이 그렇다 뿐이지, 절기로야 늘 소한이 더 춥지.’
중얼거려놓고 나서 범구는 딸아이가 들고 있는 보퉁이를 보며 불쑥 물었다.
‘거, 들고 가는 건 뭐냐?’
‘손이 부끄럽지만 어떡해요. 청국장이랑 장아찌를 조금 담았어요. 빈손으로 가기가 그래서…’
‘우리 살림을 다 아시는데, 무슨.’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범구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린 것이 생각은 있어서, 양업이네 집으로 가며 있는대로 무엇인가를 싸 담은 모양이었다.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범구의 가슴 속으로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진다. 그 씨가 어디 가겠냐. 어찌 닮아도 저렇게 닮았나 모르지. 아주 제 어미를 빼다 박았다니까.

범구는 새삼스런 눈으로 딸아이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딸이 어느새 여자태가 난다고 생각한 건 벌써 오래 전이었다. 어쩌다 안게 될 때면 앞가슴의 망울이 봉긋봉긋 느껴져서, 목단꽃 같은 딸에게서 홀아비 냄새 난다 소릴 들을까 봐 그 후로는 골방이나마 따로 제방을 마련해 주고 지내온 범구였다. 그러나 이제는 가슴만이 아니다. 볼이 화사해지는가 하더니 엉덩이도 튼실하게 벌어져서 그만큼 더 가늘어진 허리가 여자 태를 더하게 한다. 그 모습이 제 어미를 빼다 박았다. 그때마다 먼저 간 아내 산월이를 보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범구다.

산월이. 이름처럼 산 같고 달 같던 여자였다. 살아서는 그 가슴에 내가 그렇게 못질을 해대더니, 이제는 이렇게 둘만 남기고 내 가슴에 대못을 박고 간 여자가 아닌가. 그러나 딸의 모습에서 떠나간 아내를 떠올릴 때마다 범구는 두려운 마음을 제 스스로 감추지 못한다. 아이의 엄마를 알기 때문이다.

여자 얼굴을 두고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스물에는 타고난 얼굴이요 서른에는 꾸민 얼굴, 여자 나이 마흔이 되면 그건 남편이 만든 얼굴이라고 했다. 말이야 그렇다지만 보미를 볼 때마다 어찌 크면서 저렇게 제 어미를 닮는지. 타고난 얼굴이라는 말이 저걸 두고 한 말인가 싶다.

그것만이 아니다. 어미 없이 컸지만 어려서부터 구김살이라곤 본 적이 없다. 그만큼 대범했고 어린 나이답지 않게 보미는 끊고 맺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 속 깊은 것마저 제 어미를 닮았다.
한 살 밑이었던 아내 산월이었다. 열일곱에 만나 스물셋에 세상 뜨기까지 어떻게 살았던가. 머슴살이에 봉놋방 드난살이로 세월을 겹치며 살았다.

보릿고개를 넘기자면 황토방 벽의 흙이라도 긁어먹게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남의 것 탐할 줄도 모르고 내 꺼 모자란다고 푸념 한 번 해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산월이는 그렇게 살다가, 딸 하나를 남겨 주고 그렇게 갔다.

녹지 않은 눈이 허옇게 남아 있는 골짜기를 바라보는 범구의 눈길이 흐려진다. 산월이. 흘러간 세월이 얼마인데, 어쩌라고 자네는 아직도 내 마음에 이렇게 애틋한가.

이곳저곳 떠돌다가 나이가 차면서 머슴으로 들어앉은 마을에서 만난 여자였다. 마음과 마음이 열리며 물길이 만나듯 둘은 가까워졌지만 마을의 머슴과 가까워지는 딸을 두고 보기만 할 아버지가 아니었다.

근본이 무언지도 모를 뜨내기 머슴놈, 내가 아무리 없이 산다만 그럴 수는 없다. 낫을 들고 나서며 이놈의 목을 따고야 말겠다고 펄펄 뛰던 아버지를 뒤로 하고 한 남자 따라서 집을 나섰던 그 밤에도 여자는 울지 않았었다. 여자가 이따금 눈물을 보인 건 언제나 어머니를 생각할 때였다. 어머니는 범구와의 혼사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일이 잘 이루어졌으면 했던 것은 장모될 그분이었다. 세상 흘러가는 것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사람이었다.

그 무렵 여자의 집도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았다. 전에는 집 둘레의 텃밭이며 살여울 건너의 논마지기까지 물려받은 흔치 않은 자작농이었다고 했다. 그걸 곶감꼬치 빼먹듯이 팔아치우면서, 농투성이가 비단옷 입고 다닌다는 비웃음으로 동네사람 눈 밖에 나기 시작한 게 산월의 아버지였다. 살림이 졸아드는 것과 때를 맞춰 사람도 폐인이 되어 갔다. 주막거리가 제 살림집이라도 되는 듯 살았고, 술주정 끝에는 으레 그래야 하듯 사람을 패니, 포졸에게 묶여가기가 일쑤였다.

그러다가 집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식구들 때리고 살림 부수는 게 일이었다. 가래침을 내뱉으며 술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발소리만 들려도 산월이는 어머니와 방을 나가 울타리 밑에 숨었다고 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것은, 집안에 사람이 안 보이면 횃대에 걸린 치마 저고리며 하다못해 고쟁이까지 찾아서 발기발기 찢어대야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고 했다. 앞뒤 없이 혼자 떠들어대는 아버지의 술 취한 목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와 함께 별을 쳐다보았다고 했다.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별을 바라볼 때면 풀벌레는 어쩌자고 그렇게 울어쌓는지. 그래서 아내는 별이 싫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싫다고도 했었다.

주정뱅이네 집 딸이 밤이면 몰래 마을 뒤 사당이나 버드나무 우거진 살여울을 마을의 머슴녀석과 오간다는 소문이 나는 건 오히려 범구가 원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범이 아홉 마린지 호랑이 털이 아홉 갠지는 모르겠다만 내 범구 총각 장가나 한번 들여 볼란다. 그러면서 마름집 아낙네가 혼사를 거들고 나섰다.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시겠오. 산이 높아야 골이 깊다고, 엄장이 두둑하고 속도 깊은데 사내 녀석이야 그만하면 됐지요, 안 그래요? 지 아낙 하나는 간수할 사람인 거야 내남없이 다 아는 건데, 뭘 더 보려고 그러시우.

앞 찔러 절 받는다는 말도 있는데, 이참에 모른 척하고 우리 산월이 예 올려 줍시다. 냉수 한 그릇이면 어때요?’

산월이네와는 가깝게 지내면서 그 처지를 늘 딱해 했던 마름집 여자는 범구의 사람 됨됨이를 미더워했고 그래서 늘 살갑게 대해 주던 여자였다. 혼담이 오가던 어느 날 장모는 산월이를 앉혀놓고 말했다고 했다.

‘네 가슴에 품고 썩혀서 고목나무 만들 거라면, 그럴 만한 사내라면, 가거라. 가서 한번 살아나 보거라.’
아내는 늘 어머니가 했다는 그 말을 되뇌이곤 했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당신 고목나무 안 만들려고 나 부모 버린 여자란 말예요. 당신 그거 잊으면 천벌 받아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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