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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60

(8) 제1~3차 귀국 여행 유학 6년 만에 귀국길에 오르지만 실패를 거듭하는데…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말 조선으로 귀국했다.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이다. 최 신부는 조선 입국을 위해 1842년 7월부터 총 6차례 귀국 여행길에 오른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제1차 귀국 여행 최양업은 1842년 7월 17일 마카오에서 프랑스 함선 파보리트호에 승선해 귀국 길에 올랐다. 제1차 귀국 여행이다. 최양업은 파쥬 대위 지휘로 조선에 가서 프랑스와의 통상 조약을 요청하기 위해 떠나는 이 배에 통역사로 승선했다. 이 여행에 만주대목구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와 쟝시니 프랑스 외교사절이 함께했다. 만약 프랑스 함선이 조선으로 가지 못할 경우 쟝시니 외교사절이 북경으로 가서 조선의 남쪽 해안까지 둘러.. 2016. 9. 1.
(7)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남편 최경환의 죽음에 흔들렸으나 ‘영광스러운 순교’ 선택 ▲ 심순화 작 ‘이성례 마리아’.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보다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 복녀가 신자들 사이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옥중에서 젖먹이 막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배교했다가 다시 순교를 자청했던 그녀와, 어머니를 고통 없이 단칼에 베어 달라며 휘광이(망나니)에게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을 전하는 네 아들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에서 어머니를 소개하는 내용이 딱 한 편 있다(1851년 10월 15일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최양업 신부 부모에 관한 이야기는 이만 줄인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어머니 이(성례) 마.. 2016. 8. 21.
(6) 아버지 최경환의 순교와 수리산 믿음의 ‘바윗덩어리’ 최경환, 두 달간 고문받다 옥사 ▲ 수리산 성지 최경환 성인 묘소. 최양업 신부는 수리산을 들를 때마다 아버지 묘소를 찾아 정성껏 기도하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 최경환 성인이 회장으로 있었던 수리산 뒤뜸이 교우촌에 조성된 수리산성지 순례자성당 제대 모습. ▲ 수리산 뒤뜸이 교우촌 1900년대 모습. 최양업 신부 가족이 살던 1830년대 후반에도 뒤뜸이 마을은 아마도 이러한 정경이었을 것이다. 최양업은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1836년 12월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동행했다. 일행은 1836년 12월 28일 중국 변문에서 샤스탕 신부를 만났다. 이후 샤스탕 신부는 1.. 2016. 8. 15.
(5) 부평살이와 서울 후동 모방 신부 은신처 최경환 성인과 같은 신심 깊은 아버지가 있었기에 ▲ 수리산 성지에 있는 최경환 성인 흉상. 최양업 신부의 삶에 있어 부평 시절은 참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철이 들 무렵인 10대 초반을 그는 부평에서 보냈다. 이 시절 최양업에게 아버지 최경환은 ‘모든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본받으며 성장했다. 양업은 아버지의 두터운 신심과 헌신적인 선교 정신,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등을 그대로 흡수해 훗날 길 위의 사목자, 땀의 순교자가 된다. 15세에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서울 후동(현 주교동)의 모방 신부 은신처에서 1836년 2월 6일부터 그해 12월 3일까지 10개월을 살다가 유학길에 오른다. 최양업 신부와 모방 신부의 서한에 자세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양업이 .. 2016. 8. 7.
(4) 부평 살던 온순한 최양업, 한국교회 첫 신학생으로 선발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의 둘째 아들이며,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바로 아랫동생인 최의정(야고보)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증언(101회차)에서 서울 도성 밖 공덕리 일대에 3년여 살다가 박해를 피해 신자 300여 명이 교우촌을 이루며 사는 강원도 김성(현 김화읍)으로 이주했다고 밝혔다. 최양업 신부도 “집에 신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3년이 지나자 이웃 사람들한테 신자 집이라는 것이 탄로 나서 관가에 붙잡혀 갈 위기에 처해 산속으로 피신했다”고 한다(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1827년에서 183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최양업 가족이 김성에서 얼마간 살았고, 언제 부평으로 이주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 2016. 8. 2.
(3) 서울 더 나은 신앙생활 위해 서울로 이주 ▲ (붉은 점선 안 부분) 제 조목대로 물은 즉 답왈 : 최 방지거는 죄인의 부친이라. 그 사정을 자세히 아옵니다. 태생은 홍주 다래골이요. 어느 때 문교한지 잊었으나 홍주 살 때부터 수계하고 이 마리아와 혼인한 지 수삼 년 후 서울 공덕리로 이사하기는 재물도 있고 외인 친척이 번다하여 수계함에 조당됨이 많아 사주구령하기를 위함이요. 그 후에 강원도 김성 땅에서도 살고 부평으로 이사하였다가 외인을 피하려고 과천 수리산으로 죄인 열두 살 되던 해에 들어갔는지라. 「기해ㆍ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 회차 최 베드로 증언 중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은 교리를 배우고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25명이나 되는 가족 모두.. 2016. 7. 17.
(2) 청양 다락골 새터 증조부 때부터 최양업 신부 일가가 살아온 신앙 못자리 ▲ 청양 다락골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 생가터인 새터와 병인박해 순교자 37위의 줄무덤이 있다. 사진은 다락골 성지 성당 전경. ▲ 최양업 신부 생가터. 커다란 감나무가 켜켜이 이어온 최양업 신부 일가의 신앙 내력을 증언하고 있다. 칠갑산 굽잇길을 켜켜이 돌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들어서면 다락골이라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 나온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일군 교우촌이다. 다락골에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생가터인 ‘새터’와 150년 전 병인박해 때 홍주 감영이나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이 묻힌 ‘줄무덤’이 성지로 조성돼 있다. 홍주 감영(지금의 홍성군청)에서 20여㎞ 거리에 있는 이 마을은 해발 791m의 .. 2016. 7. 10.
(1) 최양업 신부의 생애 매년 2800여㎞ 11년간 걸으며 교우촌 찾아다닌 참 목자 ▲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매년 2800여km를 걸으며 교우촌을 방문, 성사를 집전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 부른다. 사진은 최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던 청주교구 배티성지 초막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상 ▲ 11년 동안 국내에서 사목에 헌신한 최양업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1861년 6월 15일 선종했다. 사진은 원주교구 제천 배론성지에 조성돼 있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 무덤. 시복 운동 20년 만의 결실이다. 한국 교회가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시복 시성 추진을 본격화한 것은 1996년 10월이다. 주교회의가 그해 가을 정기총회에서 최 신부의 시복 추진을 공식 승인한 이후 20년 4개월 만인 지난 4월 26.. 2016. 6. 26.
(5) 최양업 신부(하) 그 혼을 되살려 진리 위해 매일 떠난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많고 다양하다. 최 신부의 사상과 영성에 관한 글도 적지 않게 있다. 이 지면에 제대로 소개할 수도 없다. 나름대로 두 측면에 초점을 맞춰 최 신부의 삶을 오늘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 성찰해 본다. ◇ 진리 위해 몸 바치다 #1.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가 중국인들이 누리는 만큼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집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있으면서도 이 진리를 추구할 방법을 찾지 못하여 자기들의 가엾은 처지에서 한숨짓고 있는 지극히 가련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충청도 절골에서 쓴 여덟 번째 서한에 나오는 이 대목에.. 2009. 8. 2.
(4) 최양업 신부(중) - 길 위에 지다 "애수 마리아…" 되뇌다 주님 품에 ▲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 중 하나인 배티 성지에 세워져 있는 최양업 신부 동상 #1. 1860년 9월 3일, 경상도 죽림(현 경북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간월산 산속 어느 곳). 사제 최양업은 두 스승 리브와 신부와 르그레즈와 신부를 비롯한 모든 신부들에게 한꺼번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저는 박해의 폭풍을 피해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에 갇혀서 교우들과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이 서한이 중국에까지 전달될 수 있을는지도 의심됩니다." 최양업 신부는 편지 끝 부분에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 2009. 7. 26.
[몽골 선교 현장을 가다'] <3> 초원에 핀 세 공소 이야기 피어난 신앙심 빈곤에도 꺾이지 않아 - 나무 전신주와 나무 판자 담이 인상적인 몽골 야르막 공소 마을길. 사회주의체제를 벗어나면서 몽골인들은 담으로 자기 구역을 표시한다. - 벤자민 가족의 모습. “아니! 여기가 무슨 공산국가도 아니고 종교활동을 못하게 한다니 말이 됩니까! 혹세무민이라니요?!” 김성현 신부의 언성이 높아졌다. 몽골 항올본당 관할 공소 종모트 지역에는 아직 종교활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몽골 정부는 기독교 등 외래종교가 혹세무민한다 여겨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금지한다. 김 신부는 그러나 성전 건립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미 종모트에는 50여 명의 신자가 있다. 27개 군이 뻗어나가는 종모트는 놓칠 수 없는 선교의 거점도시다. 성전을 지어두면 더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종모트.. 2009. 7. 19.
<13>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곰방대에 담배을 재우며 주모는 문턱에 앉아서 술청 밖을 내다보았다. 설핏하게 햇살이 기울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심술이 모락모락 냄새를 피울 것 같은 오종종한 입가로 그 심술같은 담배연기가 폴싹거리며 새어나왔다. 위에서부터 두부자루 누르듯 몇 날 며칠 맷돌로 짓눌러놓은 듯 주모는 키가 몽당 빗자루만 했다. 저건 뭐야. 앉으나 서나 그게 그거인 주모가 작은 몸을 일으켰다. 거칠게 주막으로 들어서며 경환이 말했다. ‘주모, 서둘러 방 하나 내 주시요.’ 우루르 들어서는 그들을 바라보는 주모가 입이 벌어졌다. 혼자가 아니었다. 고개를 꺾은 채 널브러진 범구를 업고 있는 필용이 뒤에 서 있었고, 동냥을 얻으러 왔던 그 때꾸러기 아이마저 졸래졸래 뒤를 따라 들어서지 않는가. 우르르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며 주모의.. 2008.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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