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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11>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by 세포네 2008.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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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 껍질이 두꺼우면 겨울이 춥다면서요?’

뒤뜰에 움을 만들고 갈무리했던 무를 꺼내들고 들어오며 보미가 말했다.

‘무 뿌리가 길어도 겨울이 춥다고 한단다. 겨울 나려고 그것들도 다 준비를 한다는 말 아니겠니.’

겨울이 추운 거야 사람 힘으로 어쩌랴만, 양업이가 길에서 고생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성례는 몰래 한숨을 지었다. 두부를 만드느라 부엌에서는 뿌옇게 김이 솟아올랐다.

‘사람 들어오는 건 몰라도 나가는 건 안다더니, 도련님이 안 계시니까 집이 빈 거 같아요.’

긴 주걱으로 콩물을 저으며 보미가 말했다. 아궁이 앞에 앉아 튕겨 나오는 불똥을 피하면서 성례가 보미를 올려다보았다.

‘집에 없다 생각하면 왜 그렇게 허전한지.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네가 보기에도 집안이 썰렁하니?’

‘있던 사람이 없으니까요. 저쪽 어디서 글 읽고 있을 것만 같아요. 도련님이 워낙 잔정이 많았잖아요.’

너희들이야 옆집에 붙어서 같이 큰 사이니까 남다를 수밖에 없겠지.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요, 마음이 천리면 지척도 천리라던데. 왜 이렇게 아이 생각이 떠나지 않나 모르겠다. 아들 양업이 떠난 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자신이 성례는 스스로 생각해도 야속하다. 사람 마음도 물 같아서 모난 그릇에 담으면 모나게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어질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얼마나 긴 나날이 될지 모르는데 어미라는 게 마음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어찌 저 먼 세월을 넘으랴 싶다.

‘도련님도 이젠 압록강은 건넜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들은 얘기로는 어림잡아 그렇게 된다만… 어련하겠니. 보록 어른께서 하시는 일인데.’

성례는 정하상을 두고 늘 보록(保祿)이라고 했다.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한자로 보록이라고 썼기 때문이다.

‘자식이 어디 품에 있어야만 자식이겠니. 그러려니 해야지.’

‘그렇지요? 물이 깊어야 큰 고기도 모이고, 큰 나무가 큰 집을 짓는다던데. 장부로 태어나서 큰일을 하려면 어디 부모 품에만 있어서야 되겠어요.’

성례가 낮게 웃었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아주 다 큰 사람 소리를 하네. 어떻게 그렇게 당찬 소리가 나오니.’

‘죄송해요. 전 입이 큰일이에요.’

‘너 입 무거운 거야 내남없이 다 아는 일인데 뭘?’

방에서는 경환이 범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방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범구가 걱정을 늘어놓았다.

‘조선사람 신부님이 생긴다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일입니다만, 워낙 먼 길이라니… 제 짧은 생각으로는 꼭 그렇게 멀리까지 보내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모방 신부님 말씀에 따르면, 제일 먼저 우리 조선으로 들어오시려다가 그만 객사하셨다는 소 주교님이라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방 신부님이 모시던 분이지요. 그 주교님께서는 조선에 들어오시면 바로 신학교를 세워서 우리 조선사람을 신부로 기를 계획이었답니다.’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향해 오던 길에 내몽골에서 세상을 떠난 프랑스 선교사 브뤼기에르 주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분 생각에는, 요동에 신학교를 세워서 조선인 사제를 키우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다 물거품이 되어 버린 거지요.’

‘요동이라면 압록강 건너 아닌가요? 거기라면 그래도 가깝지 않습니까.’
‘가깝지요. 그 애들이 지금 가는 곳이야 청나라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니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더 멀리 보내게 되었는지 원. 저 같은 사람 마음에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게 이렇게 됩니다.’

경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혼자 몸으로, 말 그대로 혈혈단신 중국 땅을 뚫고 북경으로 들어감으로써 포르투갈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던 모방 신부였다. 당시로서는 포르투갈이 관할하고 있던 중국에서 그 심장부인 북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신부로서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북경으로 들어온 그때 그의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아무도 그가 서양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 담대한 성격의 모방 신부였고 그는 누구보다도 중국을 둘러싼 당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깊은 생각 끝에 모방 신부는 요동 땅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먼저 조선 신학생이 갖춰야 할 것이 언어의 문제였다. 요동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면 당연히 중국어를 배우는데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라틴어 공부가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생각했다. 또한 요동에 신학교를 세운다면 조선의 조정에서도 그만큼 쉽게 알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런 전망이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대표부가 있는 먼 마카오까지 보내는 결단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포르투갈과의 갈등도 줄이고, 조금이라도 조선교회를 위험에서 멀리하려는 의도였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신유년 박해 때 순교한 것이 벌써 30년이 넘는 1801년 5월이었다. 그는 국경 부근까지 몸을 피했지만 죽어가는 조선의 신자들을 버리고 혼자 피해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발길을 돌려, 의금부에 자수를 한 후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조선에는 신부가 없었다.

방안이 한결 어두워졌다. 밖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심가지(水深可知)요 인심난지(人心難知)라. 물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렵다지 않습니까. 누가 알겠습니까. 또 어디서 피바람이 불지. 그저 자중자애하며 때를 기다려야지요.’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범구가 오래 참아온 말을 꺼냈다.

‘실은… 상의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품고 왔던 말은 오히려 보미의 혼사에 관한 것이었다. 딸의 나이도 차고 했으니 올해는 어떻게든 혼사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일이 아주 다르게 빗나가, 그 반대가 된 꼴이 아닌가. 말을 꺼내는 범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늘 여길 오는 길에 딸년이 하도 엄청난 이야기를 해서. 저는 말도 못 붙이고 말았습니다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범구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딸아이 하는 소리가. 그게 말입니다… 문안에 있는 동정녀들 집에 들어가고 싶다네요.’

경환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일이 어느새 거기까지 갔나. 경환이 다짐하듯 물었다.

‘동정녀들 사는 집엘 들어가겠다고요?’

‘네. 하도 엄청난 말을 해서, 저도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경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전에 한번은 제가 시집이나 보내야겠다는 말을 했더니, 왕거미도 한 해요 집 거미도 한 해입니다 하는 거예요. 이놈이 무슨 딴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그때 알아보긴 했습니다만.’

‘왕거미도 한 해요, 집거미도 한 해다. 보미가 그런 소리를 해요?’

‘네. 그러더라니까요.’

먼 그때를 경환은 생각했다. 함께 살겠다고 찾아온 범구를 보며, 텁석부리 홀아비가 데리고 있는 딸아이의 눈매에 어딘가 당차 보이는 빛이 있다고 경환은 생각했었다. 네 이름이 뭐냐? 아이를 보며 이름을 물었는데 그때 범구가 말했었다. 이름이 봄입니다. 보미. 제가 배운 게 없어서, 봄철에 낳았다고 그냥 봄이라고 지었습니다. 천덕꾸러기 상것의 계집아인데, 이름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 아이가 벌써 그렇게 컸나. 경환이 빙그레 웃었다.

‘어린 게 속이 찼습니다. 경사 났습니다.’

‘네? 아니 회장님.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데, 제 어미 생각을 해서라도 이건 안 되는 일입니다.’

‘나도 있지 않습니까. 자식을 신부 만들려고 먼 남의 땅에까지 보냈다는 걸 나라에서 아는 날에는 목숨 부지하기 어렵다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 천주께 이 목숨 다하리라 늘 다짐을 하고 삽니다만, 저는 그저 기쁘기만 합니다.’

어두워오는 방안에서 빛을 받아 번쩍이는 경환의 눈빛을 범구는 보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렸습니까. 내 자식이라지만, 이제 저것들이 신부가 되러 가는구나 생각하니 그날 나는 아무리 주먹을 움켜쥐어도 가슴 속으로 눈물이 흐르는 걸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을 보내며, 눈보라를 맞으며 갔던 길을 경환은 얼어붙은 눈길을 걸어서 돌아왔었다. 그날은 허옇게 눈가루를 날리며 바람이 불었다. 그때마다 두루마기 자락이, 갓끈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눈길을 걸으며 경환은 생각했었다. 조선의 것은 어찌 이리 다 하늘로 날리는가. 날리는 갓끈을 등 뒤로 넘기며 경환은 소리 없이 웃었다. 너 나 없이, 조선의 것은 다 하늘로 날아오르려고만 하는구나.

‘딸아이의 뜻이 그렇다는 걸 알았으니 좀 더 두고 보시지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우리가 도모해야 할 일 가운데, 어디 하나 쉬운 일이 있겠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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