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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7>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7)

by 세포네 2008.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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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경으로 가는 사신들의 행차가 금천을 지날 때 비변사의 감찰관들이 짐을 검사하는 곳이 월정의 주막거리였다. 역관인 유진길의 도움을 받으며 동지사 편에 끼어 연경으로 갈 때마다 이곳 관리들의 수작에 치미는 화를 참아야 했던 하상이었다. 무엇이든 꼬투리를 잡아 발길을 붙잡고 값나갈 물건들을 뒤졌는데, 그렇게 빼앗긴 금붙이가 관졸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건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면 다 아는 예삿일이었다.

을수나 한선이와 헤어져 마을로 들어가 짐검사를 받아야 할 차득이는 벌레 씹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차득이 자네는 똥 좀 밟고 오게나.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한선이 또 그런 차득이의 염장을 질러댔다.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더니…’

‘자네가 무슨 짐이 있다고 겁을 먹어. 돈 될 거라고는 미숫가루밖에 없으면서. 겁먹지 말고, 여차하면 에라 너나 먹어라 하고 줘 버려.’

그랬던 한선이었는데 먼저 월정 주막거리를 빠져나와 기다리고 있는 건 차득이 일행이었다. 웬만해서는 산길을 돌아갈 엄두도 낼 수 없도록 산길은 험했다. 그런 산이 병풍을 치듯 둘러싸고 겨우 터져 있는 길목에 관졸들은 짐 검사장을 벌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모여서 하나가 되었을 때 이번에는 차득이가 한마디 했다.

‘어째 똥 밟은 나보다도 걸음이 늦으셨나.’

‘사람하고 길은 겪어 봐야 안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드라.’

‘세상에 어디 만만한 게 있는 줄 아슈.’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 유 신부는 얼굴이 시퍼렇게 얼어 있었다. 늦은 점심을 병전 마을의 주막에서 때우고 다시 길을 나섰을 때, 서쪽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겨울 해는 짧았다. 잎 떨어진 나무들이 앙상하게 솟아 있는 산등성이가 마치 고슴도치 등허리처럼 바라보이고, 그 밑으로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다. 눈 쌓인 들판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어디를 바라보아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양업은 고개를 들어 새 한 마리 울고 가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다. 넘어가는 저녁 햇빛을 받으며 멀리 보리밭 둑 위에서 언 눈들이 가루가 되어 허옇게 날아올랐다. 바람에 날린 눈가루가 날아와 얼굴을 때리고 목덜미로 파고든다. 고개를 숙이고 양업은 말없이 걸었다.

그는 덧옷 소매에 엇갈리게 찔러 넣은 손에 묵주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었다. 명주 천에 수를 놓은 조그만 주머니였다.

어머니가 건네주는 파란 색실로 수가 놓여진 묵주 주머니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양업은 말했었다.

‘참 곱네요.’

‘신부님 되어 오실 때까지 고이 간직하라고, 엄마가 만들었다. 맘에 드니?’

푸른 색실로 바탕 전체를 뜨고 나서 그 위에 나뭇잎이 십자가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아롱아롱 새겨진 묵주 주머니였다.

‘어머니 생각나면 늘 꺼내 보게 생겼네요.’

‘엄마 생각이라니… 다 큰 사람이.’

성례는 묵주를 쥔 아들의 손을 포개 잡았었다.

‘기도 많이 하라는 엄마 마음을 한 땀 한 땀 담았으니까, 한 마음으로 정진해야 한다.’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자신을 떠나보내며 우실 줄 알았던 어머니가, 돌아서서라도 눈 밑을 훔칠 줄 알았던 어머니는 너무나 태연했다. 윗말 골짜기의 보미네 집에 감자떡 한 그릇 들려 보내듯이 어머니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수를 놓으면서 어머니는 마음을 다잡았을 테고,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 하셨을 거야. 정진하라고, 물처럼 흘러 흘러서 끝내는 바다로 가 닿으라고 하셨지. 양업은 추위로 얼얼하게 굳어 있는 볼을 문지르며 혼자 웃었다. 내가 힘들긴 힘드나 보다. 벌써 어머니 생각을 하다니. 멀리 얼어붙은 강이 바라보였다.

떨어져 걷던 일행은 하나로 모여서 강을 건넜다. 마른 갈대가 쓰러져 있는 둑길을 지나 강을 건널 때는 발걸음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강 위로 눈이 내리고 그 쌓인 눈을 밟고 간 발자국이 또 들쑥날쑥 얼어붙어 있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양업은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강 건너가 평산이었다.

뒤쪽에서 두런두런 한선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월정의 감찰 녀석들이 그렇게 고약하든가?’

‘말도 마슈. 승냥이 똥 같은 놈들이 짐을 까는데, 어디서 났느냐, 뭐할 거냐. 눈알을 희번득거리며 으름장을 놓지를 않나, 말도 못해요. 몸까지 뒤지더라구요. 입었던 속곳까지 흔들어 대겠습디다.’

‘불알이 두 쪽인가 세 쪽인가 움켜쥐지는 않든?.’

한선이 흐흐거리며 한 말에 차득이는 버럭 성을 냈다.

‘형님하고 나하곤 이제부터 모르는 사이로 갈라섭시다. 씀바귀에 냉이 섞여서 이로울 게 없지요.’

한선이 웃음을 거두며 차득이의 어깨를 잡았다.

‘차득이 화나면 무서운 거 내가 알어. 아무리 사당 잘 지어놓으면 뭘 해, 제사를 잘 올려야지. 앞으로 너랑 나랑 해야 할 뒷일이 많을 거다. 돌아올 일을 생각하면 길마다 구비마다 앞길이 구만리야. 이제 첫발 디딘 거여.’

‘한번 간 길인데 되짚어 오는 거야 뭐가 힘들겠어.’

‘누가 아냐? 자네가 신부님을 엎고 와야 할지도 몰라.’

입국하는 프랑스 신부를 국경에서 만나 한양까지 모시고 돌아갈 일을 생각하며 한선이 한 말이었다.

‘눈알 파란 신부님을 등에 업고 깔딱깔딱할 차득이, 참 볼만하겠다.’

‘또 이러네. 내가 앓느니 죽지. 도대체가 무슨 도움이 안 돼요.’

강을 건넌 그들은 평산 동쪽 산기슭에 서 있는 태백산성의 동문을 지났다. 지친 몸과는 달리 다들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둠이 몰리는 속으로 양업은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홍례를 튼 동문을 올려다보았다. 여덟 개의 기둥 위에 기와지붕 앉힌 문이 아름다웠다.

읍내로 들어서서 여기 저기 불을 밝힌 집들을 바라보며, 역시 그렇구나 하면서 양업은 마음속으로 조금 놀랐다. 사람을 맞고 보내는 문을 참 격조 있게 세웠구나 싶었는데, 거리에도 예사롭지 않게 번듯번듯한 집들이 들어서서 살림살이의 풍족함을 은연 중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주막 안쪽의 제일 후미진 방에서 대건과 방제가 잠자리를 하는 사이 양업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옆방에서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는 하상의 모습이 창호지 문에 비쳐보였다. 유 신부를 모시고 하상이 신철과 함께 묵고 있는 방이었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는 양업의 손에는 김이 솟아오르는 함지박이 들려 있었다. 호롱불 옆에서 방제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뭐니, 그건?’

‘더운 물이다. 대건아, 좀 일어나 봐.’

방제가 깔아놓았던 이불을 걷고 자리를 만들자 양업이 함지박을 내려놓았다. 나무 함지의 물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라왔다. 양업이 대건을 다가앉게 하며 말했다.

‘저녁 때 강 건너면서 보니까, 대건이 너 다리를 절름거리더라. 더운 물에 푹 담그고 있으면 시원할 거야.’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고맙다. 나도 이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닌데.… 어른들이랑 함께 가는데 어린 게 엄살부린다고 하실 것만 같아서…’

‘내일도 모레도 가야 하는데. 발을 살살 달래가면서 가야지. 안 그렇냐?’

더운 물에 두 발을 덤벙 담갔던 대건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발을 들어올렸다. 양업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좀 천천히 넣어라. 발등에 살살 더운물을 끼얹어 가면서.’

그 북새통에 방제의 얼굴에까지 물이 튀었다. 방제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다가앉았다.

‘얘들이 이거 엄동설한에 물장난을 하고 있네.’

말해 놓고 나서 방제가 문밖을 기웃거렸다. 일찍 잠을 자 두라는데 뭐하는 짓들이냐. 북적대는 소리에 혹시 하상이 알고 호통이라도 칠까 봐 방제는 그게 걱정이었다. 그가 소리를 죽이며 양업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디서 더운 물을 다 구했냐?’

‘저녁 먹기 전에 주모한테 가서 부탁을 했어, 발을 삐긋했나 보다고 했더니, 하이구, 웬 오지랖 넓은 아낙네가 나서서 떠벌려대는데, 길 가는 사람이 발을 접지르면 어쩔거냐는 둥, 언 길에 큰일이라는 둥, 얼른 침쟁이를 불러주겠다구 나서지를 않나, 어른들께는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면서 얻어왔어.’

발을 담근 대건이 눈을 스르르 감으며 중얼거렸다.

‘뜨듯하니 좋다. 양업이만 옆에 있으면 춥고 배고플 일은 없겠다.’

눈을 감고 있는 대건을 보며 방제가 한마디 했다.

‘너희들 둘, 이러다가 이제 무슨 일 저지를까 겁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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