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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2> 제1부 신부의 어머니 - 먼 길(2)

by 세포네 2008.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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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이렇게 보내니 … 나는 한없이 기쁘구나

천주께서 이다지도 널 크게 쓰시기로 하셨으니
아비의 이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느냐
우리 한 몸 되어 주 섬기며, 큰 사랑으로 살아가자”

아침 햇살 눈부시다. 정하상의 집은 눈에 덮여 은빛으로 빛나며 아침을 맞았다. 밤새 내린 눈 위로 칼날이 꽂히듯 쏟아지는 햇살이 찬란했다. 가지마다 하얗게 눈을 얹고 서 있는 오동나무 위에서 까치가 울었다.

너까래로 마당의 눈을 치우던 을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오동나무를 쳐다보았다.
“저런 하릴없는 녀석 봤나. 이놈아, 오늘 같은 날 무슨 소식이 올 게 있다고 아침부터 울어대냐.”
나무 뒤편으로 이어져나간 지붕과 담 위에서 부서지고 있는 아침햇살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먼 길을 생각했다. 햇살 속으로, 눈 덮인 세상 속으로 자신의 몸이 너울너울 떠가는 것 같았다. 대문 밖, 골목으로 뻗어 있는 길을 치우고 난 한선이 싸리비를 들고 걸어 들어왔다.

“뭘 혼자 구시렁대고 있어?”
을수가 오동나무 쪽을 가리키는데, 나 여기 있소 하듯이 또 까치가 다시 울어댔다.
“저거 보고 하는 소리다. 길 떠나는 사람네 집에 와서 울어대는 저 녀석 마음을 모르겠다니까.”
햇살을 향해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리며 한선이 말했다.
“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뭘 그래. 의주 지나 압록강 건너 천리길, 몸 보전하고 고이 다녀 오소서. 네 각시 대신 인사 전하러 왔나 보다.”

말없이 서서 두 사람은 오동나무에 앉은 까치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을 다지고 다졌지만, 어젯밤에 잠을 설치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은 이른 아침 마당으로 나왔고 말없이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치울 생각으로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많이 쌓인다 싶어 어제 저녁에도 대충 마당의 눈을 걷어냈었다. 너까래를 잡은 을수가 죽죽 눈을 밀어내고 나면 한선이 싸리비를 들고 남은 눈을 쓸어나갔다. 신학교로 떠나는 세 소년을 보살피며 하상과 신철을 따라가야 할 두 사람이었다.

이 집에 왔던 날을 생각했다. 그날 저녁,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부름을 받고 찾아왔을 때 하상은 두 사람의 손부터 잡았었다.

“믿을만한 사람이 많지가 않어. 이번엔 자네들이 나서줘야겠네.”
이번 북행길에 함께 갈 수 있을지 어떨지를 하상이 물었던 건 이미 달포 전이었다.
“먼 길이라네. 돌아오기까지 족히 두 달은 걸리지 않을까 싶네. 약속대로만 잘 이루어지면… 돌아올 때는 신부님 한 분을 또 모시고 오게 될 걸세. 이게 무슨 축복받은 길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네들도 마음을 모아 주면 좋겠네만.”
이미 결심이 굳어 있던 한선이었다. 그는 하상이 잡은 손을 되잡으며 말했었다.
“천주님 일을 하시는데… 이렇게 불러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꽃가마를 타는 것 같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을수가 한선을 보고 물었다.
“그나저나, 너 그때 했던 말 지금도 한결 같냐?”
“무슨 말?”
“이번 길이 꽃가마 타는 거 같다던 말.”
이게 무슨 수작을 하려는 걸까 싶어서 한선은 말을 참고 가만히 을수를 바라보았다. 을수가 너까래를 눈 더미 속에 꽂아 넣듯이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꽃가마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이 눈 속을 뚫고 갈 생각을 해 봐라. 난 벌써 기가 넘어간다.”
이 녀석 가슴 두께가 내 두 배는 될라. 말하면 뭐해. 허벅지는 처녀 허리통보다 굵을 텐데. 그런 을수가, 얼핏 보기에도 힘이 장사일 것 같은 몸집을 한 사내가 먼 나그네 길을 앞에 놓고 아등바등 하는 모습이 한선은 우습다. 뒤쪽 마루 위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말했다.

“귀한 몸들이신데, 아침부터 이렇게 허드레 일에 힘을 쓰시면 어쩌시나. 갈 길이 구만리예요.”

한선과 을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비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하상의 누이동생 정혜를 보며 둘은 나란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눈 내린 뜰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그 큰 키가 이른 봄날의 목련꽃 같다고 한선은 생각했다. 언제 보아도 참 음전한 분이다, 고개를 드는데, 눈을 치우느라 땀이 배어난 두 사람의 얼굴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정혜가 마루를 내려왔다. 마당이 훤하구나. 흙바닥이 드러난 길이 눈 더미 사이로 뻗어 있다. 어진 사람들이구나. 길 떠나면서도 떠나는 자리를 말끔하게 치울 줄 아는 사람들, 동행할 사람들이 미덥다. 언제 보아도 오빠는 참 사람 보는 눈은 깊다는 생각을 정혜는 한다.

소담하게 눈이 얹혀 있는 담 사이로 뚫려 있는 길을,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담 위의 눈꽃을 정혜는 내다보았다. 한낮이 되면 지붕의 눈이 녹아내릴 테고 저녁 무렵이면 싸늘한 겨울바람과 함께 추녀마다 고드름이 얼리라.

고개를 돌린 정혜가 을수를 보며 물었다.
“베드로라는 건 아는데, 성함이 뭐였는지… 내가 또 잊었어요.”
을수의 손이 황송하다는 듯 뒤통수로 가는데 한선이 먼저 대답했다.
“이 서방. 이을수 베드롭니다. 을수라니까, 척 보면 평양감사라고 생각나는 게 있으시지요? 갑을병이라고, 을수가 있으면 위로는 형 갑수가 있을 테고 밑으로는 동생 병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 것도 없어요. 무슨 놈의 집안이 그 모양인지 이 녀석은 저 혼자 을수예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정혜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니까 두 분 다 베드로네요.”
“예, 그래서 이쪽은 이 베드로. 저는 정가라 정 베드롭니다.”
“길 떠나려거든 눈썹도 빼놓고 가라는 말도 있지요. 짐이 가벼워야 고생도 가벼워질 텐데. 어떻게 잘들 챙겼나 모르겠네요.”
한선이 을수를 가리키며 클클거리고 웃었다.
“아이구. 염려 붙들어 매세요. 많은들 어떻겠습니까, 이 베드로 두었다가 뭐에 쓰게요. 씨름꾼이든 황소든 다 들어메칠 사람 여기 있답니다.”
을수가 시부렁거렸다.
“씨름꾼이야 드잡이 한판이면 들어메친다지만 황소는 왜 들어메치냐. 기름이 조르르 흐르게 멕여 가며 살림밑천 해야지. 그나저나, 이 베드로는 그렇다치고, 정 베드로 너는 뭐에 쓸고?”
“나는 글렀다. 벌써 나이가 몇인데….”
“나이로 말을 할까. 기생은 서른이 환갑이라더라.”
“어허. 어디서 뚫어진 귓구멍이라고 들은 소리는 있어서. 기운 쓰기로는 나 당할 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네 활개 칠 때는 언제고. 왜? 의주 천리길이 이럴 땐 겁나냐?”
“기운 세다고 소가 임금 노릇할까.”
눈길 얼음길에 넘어야 할 산이 있고 건너야 할 강이 있다. 그 길이 얼마인가. 힘이라면 누구랑 부대껴도 물러설 줄 모르던 을수였지만 이번 일에서만은 지레 겁을 먹은 얼굴이다. 그 꼴이 우스워서 못 참는 한선이를 보며 을수는 볼이 부어터진다. 둘을 다독거리듯 정혜가 말했다.

“말은 할 탓이요 길은 갈 탓이랍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지 않아요.”
그때 집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중국인 유방제 빠치피코 신부였다.
“이런! 눈을 다 치우셨네. 내가 조선땅에 비질이라도 좀 하고 가려고 했더니.”
그가 한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날 좀 주게나.”
유 신부가 한선이 잡고 있던 싸리비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을수가 중얼거렸다.
“남의 다 된 농사에 낫 들고 들어서네. 저 신부님도 참.”
양업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그러니, 집 걱정은 하지 말아. 너를 이렇게 보내니… 그래! 나는 한없이 기쁘구나. 네 어머니한테도 떠나오며 이 말을 했다. 천주께서 널 이다지도 크게 쓰시기로 하셨으니 아비의 이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느냐. 우리 다 한몸이 되어 주를 섬기며, 큰 사랑으로 살아가자.”
차마 아버지의 눈길을 마주보지 못하고 양업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널 믿는다. 어찌 너만 믿겠느냐. 이 아비는, 언제든 때가 오면, 천주 대전에서 서로 만나, 영원히 살 것을 믿은 지 오래니라. 기리 함께 할, 우리들이 아니냐.”
경환의 말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 순교를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지금 가슴 속에 품고 계시는 순교의 원의(願意)를, 저 깊은 뜻을 내게 숨기지 않으시는 거다. 양업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단원 어른. 내포 벌의 사도가 아니시더냐. 그 단원 어른에게서 신앙을 이어받아 네 증조부께서 믿음을 시작한 후 우리 집안은 그렇게 이어져 왔느니라. 네가 이제 우리 집안의 믿음에 크게 한번 매듭을 짓게 될 것을 나는 믿는다.”
눈을 맞으며 오느라 젖었던 몸에 감기 기운이 도는지, 경환이 짧게 기침을 했다.
“하나만, 덧없는 일이긴 하다만 부탁을 하자.”
“네 말씀하세요.”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시에 청사탁영(淸斯濯瓔)이요 탁사탁족(濁斯濯足)이라는 시가 있지 않더냐.”
“네. 압니다.”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그 시를 나는 다르게 읽곤 했다. 할 바를 하는데 어찌 물의 청탁을 가리겠느냐. 네 앞에는 이제 먼 이국에서 혈현단신 겪어야 할 일이 산같이 높다. 알겠느냐. 너에게는 가야할 길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 있어. 네 길이 그런 길이다. 그때마다 생각하거라. 물을 가려서 갓끈을 씻거나 발을 씻을 게 아니다. 필히 네 한몸을 던져 해야 할 일이라면… 물이 흐려도 갓끈을 씻어야 하면 씻어야지. 발이 더러우면 맑은 물이라도 씻어야지. 네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면 그걸 머뭇거리지도 피하지도 말라는 말이다. 이거 하나는 아비의 뜻이니 깊이 새겨 두거라. 그래서 어렵고 큰 일을 만날 때마다 이 아비의 말을 생각했으면 좋겠구나.”

“네.”
잠시 사이를 두고 양업이 다짐하듯 말했다.
“아버님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안 할 걱정인지 모르겠다만, 이제 길을 떠나는 너희 셋은 남남이 아니다. 대건이와는 진외 육촌간이고 방제와는 또 사촌간이 아니냐. 다들 각별히 지내야 한다. 네 어머니가 특히 이 말을 전하랬다.”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
경환이 또 기침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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