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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제1부 신부의 어머니 (1) 먼 길

by 세포네 2008.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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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님 사도로 조선 땅에 울리는 종이 되거라”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살아야 한다”
“네가 마지막까지 가야 할 먼 길의 뜻 가슴에 새겨라”

눈이 내린다. 길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말들이 달려오는가.

바람에 불리면서 흰 갈기가 휘날리듯 함박눈이 쏟아진다.

눈은 어느새 집 뒤쪽의 넘실거리는 준령을 하얗게 뒤덮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잎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구불거리며 뻗어 있던 길도, 지난 번 내렸던 눈이 녹으면서 산비탈에 줄무늬를 만들었던 밭이랑도 이미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들어가라고 손을 젓던 남편 경환의 모습도 이미 없다.

내일이면 신학교가 있다는 먼 남의 나라 땅으로 떠나는 아들을 보러 남편은 눈 덮인 한양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나라고 가슴을 지지는 듯한 기쁨이 어찌 없겠는가. 저 수많은 조선사람 가운데서 천주님이 내 아들에게 씨를 뿌리시다니. 이 나라의 첫 신부가 되러 떠나는 아들이다. 그러나 어디쯤인지 헤아려 볼 수도 없는 먼 길이 아들 앞에 있다는 생각을 하자면 퍼붓는 눈발이 그냥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다. 보고 싶다고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불러 본다고 대답이 들려올 거리도 아니다. 땅 위의 길만이 먼 것이 아니다. 세월의 길 위에서도 그곳은 아득하게 멀기만 하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떠나는 게 아닌가. 이제부터 붙잡고 기대야 할 세월의 동아줄, 그걸 잡고 있는 손에 벌써부터 힘이 빠진다. 떠나보내는 에미의 마음이 이렇게 약해지는데, 어린 것이 어떻게 그 세월을 견딜 것인가.

한 줄기 눈물이 성례의 볼 위를 흘러내렸다, 천천히.

양업아. 마음속으로 불러보는 이름이 눈발에 뒤덮인다. 품 안의 자식이라지 않던가. 큰일을 위해 떠나는 몸이니 남편이 어련히 알아서 잘 다독거려 보내랴만 어미의 마음은 그게 아니다.

아들은 지난 봄에 이미 한양으로 떠났다. 신부님이 유숙하는 정하상의 집으로 가, 거기 머물면서 신학교로 갈 준비를 한다고 했다. 나이 마흔을 넘겼다고 했지만 어디를 보아도 그렇게 보이지 않던 하상의 얼굴을 성례는 떠올린다. 처음에는 신부님과 함께였는데, 아들을 데리고 갈 때는 하상이 혼자 왔었다. 말로만 듣던 분, 선친인 정약종 어른이 돌아가실 때 어린 나이 때문에 목숨을 구했다던 그 자제분이 어느 새 그 나이가 되었다고 했다.

“물처럼 살아야 한다. 이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 하나란다.”

하상을 따라 양업이 집을 나서던 날도 성례는 그 말을 잊지 않았었다.

“알아요, 어머니. 늘 하는 말씀.”

아들은 성례가 했던 말을 되뇌며 웃었다.

“고였다가 흐르고, 돌아서 흐르고. 물처럼 살아라. 저 잊지 않았어요.”

아들을 보내며 했던 말들이 성례의 가슴 속에서 아우성치듯 일어섰다.

“물을 보아라. 물은 쉬지를 않아.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쉼 없이 흘러가지 않니. 물은 건너뛸 줄도 모르고, 타넘을 줄도 몰라. 웅덩이를 만나면 고였다가 흐르고, 언덕을 만나면 돌아서 흘러. 그렇지만 생각해 보려무나. 물은 쉬지 않고 그렇게 흘러서 시냇물이 되고 강이 되고 마침내는 바다로 간단다. 너도 그래야 한다. 세상일이 힘들면 고였다가 흘러가고, 살다보면 서글프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왜 없겠니. 그러면 그때는 또 물처럼 더 천천히 돌아서 가.”

쏟아지는 눈발 속에 서서 성례는 그 눈밭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아들의 뒷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소리 내어 말했다.

“그래, 그래야 한다. 바다로, 바다로 흘러가야 해.”

언덕을 뛰어내려온 둘째 희정이 성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 뒤를, 이제는 늙어 버린 개가 어슬렁거리며 따라와 우두커니 섰다.

“엄마 뭐해? 눈 다 뒤집어쓰고. 우리들 보고는 감기 걸린다고 나다니지도 못하게 하면서.”

아들 어깨의 눈을 털어내는 성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눈이 이렇게 와서 걱정이구나. 내일 형이 떠난다는데.”

“또 가? 형 어디로 가는데?”

들어도 모를 이름이었다. 아오먼이라든가, 오문이라든가. 이름도 별나지. 중국을 지나서도 아득히 멀다고 했다. 광둥성 샹산현(香山縣)의 아오먼(澳門), 포르투갈이 마카오 관구를 설정하고 아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삼고 있던 그 마카오를 성례는 다만 먼 곳이라고만 기억했다. 이제 양업이 가야하는 신학교가 있다는 곳이다.

“형이 없으니, 이젠 네가 형이 할 일을 다 맡아 해내야 해. 알지?”

“알았어요.”

빠르게 대답해 놓고, 희정이 뒤돌아서 뛰어갔다. 늙은 개는 또 바쁠 것 없다는 걸음걸이로 그 뒤를 따라갔다.

눈발 속으로 사라져가는 희정을 바라보며 성례는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하나를 보내고도 아직 남은 아이들이 넷이라는 생각을 하며 성례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시니 내년 농사는 풍년이리라. 그래. 좋은 일만 생각하자. 천주님께 바친 내 아들. 천주님이 지켜 주실 내 아들이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성례의 뒷모습을 가리며 눈발이 더 굵어지고 있었다.

촛불이 일렁거릴 때마다 벽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서안상을 앞에 한 모방 신부가 정하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준비되었습니다, 시작하시지요. 그렇게 말하듯 하상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신부 옆에 앉은 최치장을 바라보았다. 모방 신부를 도와 복사일을 하는 그는 최방제의 형이었다. 치장이 문 앞에 서 있던 세 소년에게 손짓을 했다.

소년들의 버선발이 돗자리 위를 스치며 나아갔다. 모방 신부 앞에 놓인 두 개의 촛불이 너울거렸다. 최방제가 신부의 오른 편에 마주앉자 그 옆에 최양업이 자리했다. 김대건은 왼편이었다. 세 소년이 무릎을 꿇고 앉자, 모방 신부가 앞에 놓인 종이를 손바닥으로 쓸 듯이 조심스레 펼쳤다.

마카오에 있는 조선 신학교 교장 앞으로 보낼 신학교 입학 서약서였다.

정하상의 옆에 앉아 있던 최경환이 짧게 기침을 했다. 경환의 옆에 벽을 등지고 앉아 있던 김제준의 눈이 아들 대건을 향해 번득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압록강까지 먼 길을 가야 할 조신철이 움켜쥔 주먹을 무릎 위에 놓았다. 가슴에서는 수 만 가지 말이 오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마주앉은 신부와 소년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거미가 줄을 치는 소리도 들릴 듯한 침묵이 방안을 감쌌다.

하상의 눈길이 양업의 이마 위에 가 꽂혔다. 경환이 오기를 기다리던 저녁 무렵, 하상은 양업을 데리고 문밖에 나가 눈이 그친 골목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눈이 많이 와서… 떠날 일이 걱정이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난 하상은 양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온 게 3월이었고, 대건이가 온 게 7월이었지?”

“네.”

“신부님이 너를 제일 먼저 뽑아 올린 건데, 그 뜻이 뭔지 알겠니?”

조심스레 하상을 쳐다보며 양업은 방제와 대건을 떠올렸다. 둘 다 친척이 되는 사이였다.

“내일부터 네가 가야 할 길은 참 먼 길이다. 그 먼 길이라는 뜻을 네가 가슴에 새겨야 해. 땅 위의 길이야 걷고 또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거다만, 네가 마지막까지 가야 할 길은 땅 위의 길이 아니다. 알겠니?”

하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 되어야 한다. 무슨 소린지 알겠니? 때리면, 치면… 울려 퍼지는 종이 되라는 말이다. 천주님의 사도가 되어, 조선땅에 울려 퍼지는 종이 되거라. 이 늙은 왕조의 저녁을 깨우는 종이 되어야 한다. 알겠니?”

“네. 잊지 않겠습니다.”

쁘로미또(Promitto). 양업은 가만히 입속으로 대답한다. 그것은 요즈음 배우고 있는 라틴어로, ‘약속합니다’라는 뜻이었다.

문풍지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며 촛불이 또 흔들렸다. 모방 신부의 눈길이 앞에 앉은 한 명 한 명에게 옮겨갔다. 굳게 다문 대건의 입술을,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양업의 타는 듯한 눈을, 꿈꾸듯 고요한 방제의 얼굴을 둘러보는 모방 신부의 표정은 돌처럼 무거웠다.

세 소년이 모방신부 앞에 놓인 성서에 손을 얹었다. 신부의 낮고 힘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소년들을 바라보는 모방 신부의 눈길이 잠시 일렁거렸다.

“나와 조선 선교지의 후계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약속합니까?”

방제와 양업과 대건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약속합니다.”

“장상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지 않고 다른 회로 가거나, 또 장상이 지정한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로 가지 않을 것을 나와 조선 포교지의 나의 후계자들인 장상들에게 약속합니까?”

“약속합니다.”

이어서 세 소년은 모방 신부가 내미는 서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나아갔다. 그들이 서명을 마치자, 모방 신부는 다시 한 번 문안을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아래 서명한 외방전교회원이고 조선 선교사이며 조선 포교지의 장상인 모방은 경기도 남양 출신의 최 야고보와 황 안나의 아들 최 프란치스코, 충청도 홍주 다락골 출신의 최 토마스, 충청도 면천 솔뫼 출신인 김 안드레아로부터 규정에 따른 이 서약을 성서에 손을 얹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받았다. 1836년 12월 3일. 베드로-필리베르투스 모방. 조선 선교사.”

모방 신부가 깃털 펜을 들어 자신의 이름을 적고 나자, 최치장이 소년들을 한 걸음 물러앉게 했다.

이제 신학생으로 커 나갈 세 소년을 바라보며 하상은 목이 메어서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조신철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아들을 바라보는 경환과 제준의 눈에 물기가 어려, 불빛을 받아 번득였다.

저녁이 되며 그쳤던 눈이 또 퍼붓는가.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양화가 김의규는?

서양화가 김의규(가브리엘·53·서울 여의도본당)씨는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Academy of Art University’ 대학원을 졸업했다. 계원조형예술대학 및 성공회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결핵협회 기금조성전(1985~1986), 안산미협 회원전(1988~90), 서울인테코화랑 개인전(1990), 서울 조선화랑 초대전(1996), 평화화랑 대희년전(2000), 평화화랑 판화초대전(2002), 평화화랑 김의규 크레용전(2008) 등의 국내 전시와 다수의 미국 내 전시를 가졌다. 인천교구 상동성당 벽화 및 천정화, 성 베네딕도회 서울수도원 14처, 대전가톨릭대학교 성당 17처, 대구대교구 약목성당 외벽 및 내벽 벽화, 서울 당고개성지 청동 부조 조형물 제작, 서울노동사목회관 내 감실 및 성당 내 십자고상을 제작 설치했다.

구상전 입상(1985·1987)을 비롯해 한국불교미술대상전 입상(1985), 한국수채화공모전 입상(1986·1987), San Francisci A.A.U-Spring Show Grand Prize(1991), California Art Magazine-Entry Award(1993), 우경예술상 미술부문(2000)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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