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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71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 사건(2) 박 대통령 만나 "지 주교님을 풀어 주십시오" 요청 김 추기경이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시국문제를 놓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지 주교 석방 관련 면담을 역대 대통령들과 가진 대화 중에서 가장 대화다운 대화였다고 기억한다. 박정희 대통령 면담은 속전속결로 성사됐다. 7월10일 오전에 김재규 중앙정보부 차장이 박 대통령 면담을 제의하고 돌아간 직후 주교회의 의견수렴을 거쳐 저녁에 대통령을 만났다. 마침 그날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 평신도 등 1500여명이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했다. 내가 본디 미사를 집전하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갑자기 면담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인사말만 하고 곧장 청와대로 향했다. 지방에서 급히 상경한 신부들과 수녀들은 미사후 .. 2009. 5. 4.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 사건(1) 유신선포, '8.15 시국성명'에서 비쳤던 우려가 현실로 19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금된 지학순 주교님(왼쪽)은 인간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정의감이 남달리 깊은 분이셨다. 박정희 정권은 오래 전부터 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1972년 '8.15 시국성명' 발표를 계기로 감시가 노골화되었을 뿐이다. 서울대교구장에 부임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중앙정보부 초청을 받아 몇몇 신부들과 서울 이문동에 있는 그곳엘 가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여러 사무실을 지나치는데 육군병원에서 만난 적이 있는 신자장교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별다른 뜻 없이 "이 방은 무슨 일을 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몇몇 인사들 정보관리하는 곳"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요주의 인물에 대한 동향파악과 사찰을.. 2009. 5. 4.
1972년 8.15 시국 담화문 공포정치 시대, 교회까지 침묵할 수는 없어 김수환 추기경이 1972년 8월9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1972년 한국 사회는 혼미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다 어두운 터널로 들어서는 것 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인 장기집권의 발판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었다.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사채에 짓눌린 기업들의 부도위기에서 보듯 무리한 경제개발계획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 명령'이라는 두가지 큰 이슈가 나라를 흔들었다. 7월4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통일 3대 원칙을 천명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통일은.. 2009. 5. 4.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간 존엄성 짓밟는 불의에 대한 저항은 교회 의무 어수선한 시국을 염려하면서 종교 지도자들과 얘기하고 있는 김 추기경. 왼쪽부터 이청담 스님, 조덕송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경직 목사, 김 추기경.(1970.12.23) 이제부터 한동안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그 시기에 가톨릭교회 또는 명동성당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처럼 비춰졌다. 그리고 나는 본의 아니게 여러 사건과 사태를 겪으면서 인권 사회정의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다. 당시 내 심경이 어떠했는지는 지금도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1974년)이 터졌을 때는 교회 목소리가 일치했지만.. 2009. 5. 4.
교황 피격소동과 아시아 주교회의 "교황, 필리핀 마닐라공항서 피격" 통신사 오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첫 아시아 주교회의 참석 직전의 한국 주교단. 장병화 마산교구장(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종흥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 두봉 안동교구장, 박토마 춘천교구장, 비테를리 함흥교구 덕원면속구 교구장서리, 지학순 원주교구장, 정진석 청주교구장, 권 야고보 광주교구 보좌주교, 김남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최재선 부산교구장, 한공렬 전주교구장, 윤공희 수원교구장, 김 추기경, 나 굴리엘모 인천교구장, 황민성 대전교구장. ' 교황 바오로 6세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서 피격. 교황 옆에 있던 한국 김수환 추기경 가라데 무술로 괴한 막아내. 김 추기경은 부상… 마닐라=UPI' 이게 웬 뚱딴지 같은 뉴스인가. 1970년 11월27일.. 2009. 5. 4.
추기경으로 임명되다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인정받은 것 가장 기뻐 로마에서 추기경 서임식을 마치고 귀국하자 교회 안팎에서 축하가 쇄도했다. 성신중고등학교 교정에서 봉헌된 축하미사에 노기남 대주교(왼쪽), 서정길 대주교와 함께 입장하는 김 추기경(가운데, 1969.5.20) 1969년 2월 회의차 로마에 갔다가 미국을 거쳐 3월27일쯤 일본에 도착했다. 그때는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오려면 일본을 경유해야 했다. 도쿄에 내린 김에 상지(上智)대학에 계시는 은사 게페르트 신부님을 찾아뵙고 문안을 올렸다. 그리고 후지산 자락에 있는 작은 자매회 수녀원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나가려고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동행한 장익 비서신부(현 춘천교구장)와 가방을 들고 막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후.. 2009. 5. 4.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1968년,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미사 집전 영광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단상 가운데). 이날 시복식을 계기로 한국교회에 순교자 현양운동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나도 순교할 수 있을까? 순교자들처럼 피와 살이 튀는 끔찍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천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을까? 순교도 하느님 은혜인 것 같다. 아픈 걸 못참는 내가 그 고통을 이겨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순간이 닥치면 하느님 은혜를 청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교회 순교자들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 시기에 천주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외쳤을까. 한 교회사가가 "조선 관가의 순교자 심문기록에서 '사.. 2009. 5. 4.
내가 만난 박정희 대통령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서 '비상대권' 비판 박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간 김 추기경(1969년 7월1일). 김 추기경과 반갑게 악수하는 소녀가 지금의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다. 서울대교구장 재임 30년(1968년~1998년) 동안 박정희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여섯분의 대통령을 만났다. 그 30년은 알다시피 한국사회 격동기였다. 어떤 대통령과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마주앉아 담판을 짓고, 또 어떤 대통령과는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청와대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오면 '제발 날 그만 불렀으면….'하는 마음부터 들게하는 대통령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1968년 6월7일 교구장 취임 인사차 처음 만났다. 첫 인상은 듣던 대로 소박하고 소탈했다. 독일 유학시절 신문에서 본 사진.. 2009. 5. 4.
서울대교구장 직무를 시작하며 많은 이들의 기도와 격려는 30년 교구장 시절 큰 힘 주님과의 대화와 주위 사람들의 격려는 교구장 30년 세월을 헤쳐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서울대교구장 시절 기도하고 있는 김 추기경. 요즘 차를 타고 어디를 가다 명동 부근을 지나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목을 빼고 성당 쪽을 쳐다본다. 30년 동안 살다 나온 집인데 어찌 마음이 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저기서 30년을 살았구나'라는 생각 외에는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진 탓인지, 아니면 서울에 깊은 정을 붙이지 못한 탓인지 모르겠다. 난 아무래도 촌사람인 것 같다. 아무리 타향이라지만 30년 넘게 살았으면 제법 정이 들었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 솔직히 말해 명동은 풋내기 신부 시절에 살았던 안동이나 김천을 생.. 2009. 5. 4.
서울대교구장에 오르다 '대주교 승품' 소식에 날벼락 맞은 듯한 충격 김수환 추기경이 196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좌에 착좌한 후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상을 교구민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1968년 4월 어느날이었다. 서울로 급히 올라오라는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 대주교님의 전갈을 받고 대사관에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김 주교."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는지…." "우선 축하부터 해야겠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김 주교를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셨어요." "예? 뭐라구요?" "김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말이에요." "… …" 그때 그 충격과 어리둥절한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없을 것 같다. 정말이지 맑은 하늘에서 난데없이 내리치는 벼.. 2009. 5. 4.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인간' 산업화 초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노동탄압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진은 1976년 서울대교구장 시절,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는 동일방직 여공들을 만나는 장면..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권리와 존엄성은 언제 어디서든지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한다. 이같은 신념은 1970년대와 80년대를 숨가쁘게 헤쳐 나오는 동안 내게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작용했다. 1968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 자격으로 강화도 심도직물사건에 개입한 이유도 노동자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가 예민한 사회문제에 대해 주교단 성명을 통해 최초로 발언했다는 데 의미를.. 2009. 5. 4.
마산교구장 재직시절 첫 정 각별히 쏟은 교구로 2년 동안 혼신의 노력 마산교구장이 되어 진해본당(현 진해 중앙동본당)으로 첫 사목방문을 나간 김 추기경. 신설교구 초대 교구장의 첫 사목방문이라서 그랬는지 시민들까지 거리에 나와 환영해 주었다. 신부는 아무리 고달퍼도 신자들과 희노애락을 나누면서 살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다. 지금은 늦어서 단념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자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아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안동본당(현 목성동본당), 성의중고교, 가톨릭시보사, 대구 희망원 등에서 사람들과 가깝게 호흡했던 시절이다. 마산교구장이 되어서도 본당 사목방문을 나갈 때가 가장 즐거웠다. 시내에 있는 본당이야 한나절이면 다녀오지만 시내를 벗어나면..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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