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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 사건(2)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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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만나 "지 주교님을 풀어 주십시오" 요청
 
김 추기경이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시국문제를 놓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지 주교 석방 관련 면담을 역대 대통령들과 가진 대화 중에서 가장 대화다운 대화였다고 기억한다.  

 박정희 대통령 면담은 속전속결로 성사됐다. 7월10일 오전에 김재규 중앙정보부 차장이 박 대통령 면담을 제의하고 돌아간 직후 주교회의 의견수렴을 거쳐 저녁에 대통령을 만났다.

 마침 그날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 평신도 등 1500여명이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했다. 내가 본디 미사를 집전하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갑자기 면담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인사말만 하고 곧장 청와대로 향했다. 지방에서 급히 상경한 신부들과 수녀들은 미사후 철야기도를 하면서 면담 결과를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청와대에 도착했더니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와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허리를 90˚ 꺾다시피하면서 인사를 했다. 그의 과잉 환대에서 이 사태를 온건하게 해결하려는 중앙정보부 수뇌부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면담은 박 대통령이 먼저 시국에 관해 나름대로 생각을 얘기하고 나면, 거기에 대한 내 의견을 개진하는 식으로 1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서로 상대방 말을 경청하는 진지한 분위기였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과 마주앉아 본 적은 많지만 가장 대화다운 대화를 한 것이 그 자리다. 박 대통령은 종교역할, 언론자유, 노동문제 등 크게 3가지 문제를 끄집어냈다.
 
 대통령: 추기경님, 종교란 마음의 정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종교가 정치·경제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고유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고,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추기경: 대통령께서 종교의 역할을 그렇게 보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신자는 물론 나같은 성직자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는데 신자가 아닌 대통령께서 그렇게 보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한번 달리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종교나 교회에 가장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종교나 교회는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해 주길 바라고 있고, 개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어둠도 밝혀줌으로써 사회를 도덕과 윤리로 정화시켜 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윤리도적적으로 타락하고 부정부패로 썩어가는데도 교회가 수수방관한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입니다. 국민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정치, 경제가 윤리도덕의 범주 밖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정교분리 원칙은 마땅히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가 정부 인사나 정책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 경제 등 사회 모든 문제에서 인간 기본권이 유린당하거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가톨릭에는 복음정신에 입각한 인간관, 국가관,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존재입니다. 이 존엄성은 국가권력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존엄한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또 충분한 행복을 누리도록 해주는 것이 정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사람들이 언론자유를 얘기하는데 서울에서 인쇄되는 석간신문이 그날로 평양까지 가는 걸 알고나 떠드는지 모르겠어요. 남북이 분단되고 공산주의 혁명 침투 위험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국가안보상 현 언론정책은 불가피합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석간신문이 그날로 몇백리 떨어진 평양까지 간단 말인가. 박 대통령은 "그게 우리나라 현실입니다"라며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국가안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말했다.

 추기경: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한 국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강한 국력이란 무력이 아니라 국민 애국심과 단결력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무기와 잘 훈련된 군대가 있어도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국민 애국심과 단결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국민은 모든 신문, 심지어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아는 신문이라는 동아일보까지 불신합니다. 언론자유가 없어서 신문이 써야 할 것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을 믿지 못하는 것은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권력으로 언론자유를 억누르면 오히려 국가안보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대통령: 종교가 왜 노동문제에 개입합니까? 개신교에 도시산업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지요. 기업주들은 '도산(都産)이 개입하면 (공장이) 도산(倒産)한다'고 아우성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가지 사례가 있어요.

 추기경: 그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삼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노사는 이해관계가 상반되어 갈등을 빚기 쉽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대화를 통한 갈등해소와 화합입니다. 기업은 노동자없이 공장을 가동할 수 없고, 노동자는 기업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노동자들이 인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혹사당하고, 사용주가 임의로 해고해도 기본 권리조차 주장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물질은 공장에 들어가면 좋은 상품이 되어 나오는데 사람이 공장에 들어가면 폐품이 되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노동현장 실태입니다.

 노사대립에서 승자는 항상 힘이 센 기업주입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 경찰, 심지어 노동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노동청까지 기업주 편을 들고 있습니다. 노동자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2년전 나와 같이 기차를 타고 진해에 내려갈 때 고향 구미를 지나가면서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얘기를 해주셨죠. 너무 가난해서 고무신이 닳을까봐 그걸 벗어 들고 철길을 따라 통학했다는 말씀 말입니다. 이 땅에서 그런 가난을 몰아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5·16 혁명을 일으키신 것 아닙니까?. 그런 뜻을 지닌 대통령께서 노사분규 현장에 가보면 노동자 편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지금 하는 일은 대통령께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얘기를 충분히 나눈 것 같았다. 나는 대화 끝에 '본론'을 꺼냈다.

 "지금 신부 수백명이 명동성당에 모여 지 주교님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왕에 제 얘기를 너그럽게 들어주셨으니 지학순 주교님을 풀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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