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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서울대교구장 직무를 시작하며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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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의 기도와 격려는 30년 교구장 시절 큰 힘
 
주님과의 대화와 주위 사람들의 격려는 교구장 30년 세월을 헤쳐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서울대교구장 시절 기도하고 있는 김 추기경.

  요즘 차를 타고 어디를 가다 명동 부근을 지나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목을 빼고 성당 쪽을 쳐다본다. 30년 동안 살다 나온 집인데 어찌 마음이 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저기서 30년을 살았구나'라는 생각 외에는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진 탓인지, 아니면 서울에 깊은 정을 붙이지 못한 탓인지 모르겠다.

   난 아무래도 촌사람인 것 같다. 아무리 타향이라지만 30년 넘게 살았으면 제법 정이 들었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 솔직히 말해 명동은 풋내기 신부 시절에 살았던 안동이나 김천을 생각할 때 마음보다 애틋한 감정이 덜하다.

  그렇다고 보따리를 싸고 싶을 정도로 서울에 정을 못 붙인 것은 아니다. 30년 넘게 몸담은 곳을 등지고 이 나이에 갈 곳이 어디 있겠으며, 설사 떠난다 한들 어디서 밥을 얻어먹겠는가.(아니, 다른 것은 몰라도 밥 얻어 먹을 걱정은 안한다. 나는 개띠인데 저녁에 태어났다. 그 시각은 개가 죽을 얻어먹는 때라서 그런지 먹을 복만큼은 타고난 것 같다)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해서 서울에 정을 붙이려고 한동안 무던히 애를 썼다.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빨리 이 자리를 면할 수 있을까'라는 궁리를 했을지언정 겉으로는 서울 생활에 잘 적응하는 척 했다. 마음이 흔들릴 때면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는 데 정을 붙여야지, 정을 붙여야지'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다시피했다.

   그래서 취임 초기에는 저녁식사를 마치면 교구청에 근무하는 신부들과 둘러앉아 마실 줄 모르는 술도 두어 순배 돌려가면서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또 어떤 날은 신부들과 차를 타고 서울 근교로 나가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오곤했다. 신부들도 촌사람이 서울에 와서 외로움을 탈까봐 여러 모로 신경을 써주었다.

   젊었을 때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누가 취미를 물어보면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요즘은 사람을 만나면 말수가 점점 줄어든다. 늙으면 사람을 붙잡고 자꾸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고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조금 심심한 것은 사실이다. 외로움이라기보다는 거창하게 표현해 인간 누구나 느끼는 실존적 고독일 것이다.
  
   서울교구장이 되니까 몇 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다. 그 전에는 볼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오면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아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 가서 숙박비를 내고 잠자리를 얻었다.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쪽 사정도 모르고 불쑥 찾아가는 것 같아 망설인 적이 많았다. 그런 내가 서울 한복판에 큼지막한 집을 얻어 잠자리 걱정을 덜었으니 얼마나 큰 변화인가.

   신부들이 나를 보면 슬슬 피하는 것은 원치않는 변화였다. 교구청 신부들이야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니까 그러지 않았는데 사제모임에 참석하거나 식사자리에 가면 사람들이 내 옆에 오는 것을 꺼려하는 눈치였다. 물론 어려워서 그러려니 하고 이해했지만 어떨 때는 속으로 '내가 무슨 몹쓸 전염병에 걸렸나, 왜 내 옆에 오려고 하지를 않지….'라며 서운한 마음을 홀로 달랬다.

  나같은 촌사람은 서울에 처음 올라오면 한동안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조금 살다보면 지리적 거리와 심정적 거리가 뒤바뀐 데 대해 혼란스러워한다.

   예를 들어 마산 시내 어느 본당에 큰 일이 생기면 그 소식이 그날로 진주까지 간다. 마산 시내와 진주까지는 꽤 떨어져 있는 데도 말이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바로 옆 본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파트 주민들이 바로 건너편 집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르고 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시골 사람들은 그 같은 도시성(都市性)에 이질감을 느낀다.

   아무튼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도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1980년대 소위 'TK 아성' 때문이었는지 나를 잘 아는 고향 대구 사람들까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때는 괴로운 나머지 고독하기까지 했다.

  한때는 교황님께 올리는 교구장직 사표서한을 쓰고 찢기를 몇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편지를 찢어버리고 나면 홀로 성당에 들어가서 "주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의 기도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던지지 않고 질질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의사가 처방해준 약에 의지해 잠들 때가 많다. 불면증은 교구장 시절에 얻은 병인데 아직도 그 약을 끊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길고 험난했던 서울대교구장 30년 생활은 교구의 자잘한 골칫거리와 부닥치는데서부터 시작됐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교구에 부채가 많아 교구장 서리로 계셨던 윤공희 대주교님은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래도 윤 대주교님 재직시절에 빚을 많이 갚은 덕분에 전처럼 폭력배를 낀 채권자들이 찾아와서 횡포를 부리는 일은 없었다.

   또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동성중고등학교에 교장이 부임하지 못하고, 몇개 수 도회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는 일부 의사들이 따로 병원을 차려 분열이 일어나고, 신부가 의과대학장으로 맡는 것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셌다. 사제들이라도 일치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내 나름대로 해결 실마리를 찾은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해결해 준 문제가 더 많은 것 같다.

  교구장 취임 직후 박정희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다. 마침 학병시절 친구가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어서 수월하게 약속날짜가 잡혔다.

  약속 당일 아침, 난생 처음 대면하는 대통령이라 조금 긴장되기는 했다. 박 대통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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