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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71

침묵의 교회, 북한 우리가 먼저 화해하고 일치해야 '통일 꿈' 이뤄 김 추기경이 북한 식량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리민족서로돕기 모금 만찬에서 옥수수 죽을 떠먹고 있다.(1997년 4월 12일) 과거 북한 문제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울 때면 이런 농담을 하곤 했다. "제 책임이 커요. 제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평양에 사는 김일성 주석은 저의 '어린 양'입니다. 목자로서 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에…." 우스갯소리지만 목자로서 북한교회에 대한 미련을 떨쳐본 적이 없다. 지금도 아쉬운 점은 내게 맡겨진 사목지 평양을 한번도 가보지 못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다. 어딘가에 숨어서 반세기 넘도록 신앙을 지켜온 신자들을 찾고 싶다. 단 몇 명이라도 좋다. 그들이 나타나면 꼭 껴안고 어깨를.. 2010. 2. 14.
문민정부가 가져다 준 여유 "이젠 정권과 대립하지 않겠구나" 안도 한숨 1993년 여름휴가를 이용해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고 있는 김 추기경. 1992년 12월말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당선 인사차 찾아왔다. "당선을 축하합니다. 좀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다른 후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다를 바 없습니다." 문민통치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 정말 기뻤다. 선거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아~ 이젠 목소리 높혀 민주화를 촉구하지 않아도 되고, 정권과 팽팽하게 대립할 필요도 없겠구나'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70년~80년대에 시국관련 발언을 자주 해서인지 어떤 사람은 내가 정치를 좋아하는 줄로 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입버릇처럼 중얼거린 말이 "성직자가 언제까지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라는 것이었다. 모처럼 마음이 홀가분.. 2010. 2. 14.
가톨릭 미디어 시대를 열라 명실상부한 가톨릭 종합미디어 시대 '개막' 평화방송 케이블 TV 개국식에 참석한 김 추기경(왼쪽에서 세번째). 약 100년 전 교황 비오 10세는 매스 미디어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견하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복음을 전파하는 데 홍보수단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돈이 부족하다면 내 교황관(冠)과 목장(木杖), 십자가라도 팔아 보태겠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식견이다. 현대사회가 미디어 시대라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신문·방송·인터넷 같은 미디어는 현대인의 생활은 물론 의식까지 지배할 만큼 위력이 막강하다. 그런데 마력(魔力)에 가까운 힘을 가진 미디어에서 하루 24시간 복음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 "교회가 사람들을 기껏 복음화시.. 2010. 2. 14.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지금도 성체대회 마크 보면 감동 살아나 "찬미예수!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여의도 광장에 마련된 장엄미사 제단에 올라가 한국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85년말, 주교들과 함께 사도좌 정기방문(Ad Limina)차 로마에 갔을 때다. 당시 톰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이 난데없이 세계성체대회 얘기를 꺼냈다. "교황청에서 89년 세계성체대회 개최지를 논의했는데 의견이 서울로 좁혀졌습니다." "성체대회라뇨? 작년에 200주년 신앙대회를 열었는데 또 무슨 행사를 해요." "… 아무튼 롯씨 추기경(세계성체대회위원장)이 한번 만나자고 할 겁니다." 덜컥 겁부터 났다. 200주년 신앙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밤낮없이 고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주교들에게 성체대회 .. 2010. 2. 14.
6월 민주항쟁(2) 민주주의에도 시간표가 있구나! 6월 항쟁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화를 갈망한 피플 파워(민중의 힘)의 위대한 승리였다. 사진은 한 다방 주인이 `6.29 선언` 발표에 감동한 나머지 커피를 무료로 준다고 써붙인 광고. "국민의 뜻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겠습니다." 1987년 6월29일, 일본 나가사키에 내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중이었다. 한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시국수습 8개항'을 발표했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 5공화국이 국민과 야당의 민주화 공세에 백기(白旗)를 든 '6.29 선언'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눈을 감았다. 명동성당에서 최루탄을 뒤집어 쓰고 눈물을 흘리면서 민주화 구호를 외친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들을 무사히 집에 돌려.. 2010. 2. 14.
6월 민주항쟁(1) "학생 연행하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6월 민주항쟁 당시 경찰이 쏜 최류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군 빈소를 찾은 김 추기경. 1980년대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였다. 그리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성토하는 '아고라'(agora, 고대 그리스 시민광장)였다. 1987년 1월14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사건이 터졌다.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다. 경찰에서 "심문 도중 책상을 '탁'하고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날조한 그 사건 말이다. 박군 사건은 고문으로라도 권력을 지탱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추악한 실체를 그대로 드러냈다. 나도 시민과 학생들 못지않게 분노했다. 독재나 민주화운동 문제 이전에 하 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송두리째 .. 2010. 2. 14.
제5공화국과 가톨릭 시국문제 유연한 대처 바라며 全 대통령 면담 우리 사회는 제5공화국 말기에 이르자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함성으로 요동쳤다. 사진은 김 추기경이 명동성당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86년 11월 17일). 1983년 전두환 대통령과 정확히 3시간10분 동안 마주앉은 적이 있다. 학생시위를 비롯해 여러가지 시국 문제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달하려고 윤공희 대주교님(전 광주대교구장)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다. 당시 독재타도를 외치는 대학생 시위가 빈발했다. 시위가 있는 날이면 신촌 대학가는 돌맹이와 화염병, 최루탄이 난무하는 게 영락없는 전쟁터였다. 정부는 늘 강경진압으로 맞섰다. 날이 갈수록 사회가 어수선하고 국론이 분열됐다. 그날 집무실에서 잠깐 인.. 2010. 2. 14.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시성식 한국교회 최대 경사..가슴 벅찬 감동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절두산 순교성지에 들러 순교자 유해를 참배하고 있다.(1984년 5월 3일) 교황님이 한국을 첫 방문하신 때는 1984년이지만 주교단은 이미 4년전부터 바티칸에 방한을 요청해 놓고 마음 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1984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시고, 그 자리에서 순교복자 103위까지 성인 반열에 올려 주신다면 200년 역사의 최대 경사요,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황 방한과 시성식이 최종 결정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썼다. 특히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 노고를 잊을 수 없다. 마침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 신부는 유창한 외국.. 2010. 2. 14.
가난한 이들과 살고 싶었는데 "꺼칠한 손 잡아 줄 땐 위로하기보다 위로 받아" 현장체험을 하기 위해 강원도 태백 사북탄광에 찾아간 김수환 추기경(1985년 8월 27~29일). 1981년 작고하신 기후고(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님 병문안을 갔을 때 일이다. 병간호를 하는 아주머니가 기 신부님이 평소 입으셨던 속옷 바지를 옷장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데다 신부님이 직접 바느질을 하셨는지 엉성하게 꿰맨 흔적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 속옷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복음적 청빈의 표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어느 신부가 그처럼 낡은 속옷을 입어 본 적이 있겠는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있으면서 내 신앙과 생활이 과연 복음적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곤 했다. .. 2010. 2. 14.
형님 김동한 신부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정은 형님만한 분 없어"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을 마친 김수환 추기경이 명동성당 앞마당에서 형 김동한 신부(왼쪽)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1968년 5월 29일) 1983년 9월 말 세계 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다. 그곳에 체류 중인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길래 저녁식사를 하러 바티칸 근처 중국집에 들어갔다. 식사를 막 마쳤을 때였다. 장 신부는 평소보다 나를 더 어려워하는 자세로 머뭇거리더니 "저…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며 말문을 무겁게 열었다. "무슨 얘긴데?"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 오늘 서울에서 형님 신부님이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푹 파이는 것 같았다. 머리와 가슴이 텅 비어.. 2009. 5. 4.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대회 사제단 입장 때 하늘에 십자가... 등져서 못봐 여의도 행사장 상공에 나타난 십자가 형상 빛. 빛이 자로 잰듯 가늘고 또렷하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전국 신앙대회(1981년 10월18일).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의도 상공에 십자가가 나타나서 한동안 화제가 됐던 행사라고 하면 대부분 기억할 줄로 안다. 이날 신앙대회는 말 그대로 교황청이 150년 전 조선 포교지를 대리감목구(代理監牧區)로 설정한 것을 기념하고 우리 신앙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행사였다. 조선교회는 그 전까지만 해도 중국 북경교구에 속해 있었다. 조선교구(대리감목구) 설정은 박해로 풍비박산이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려는 교황청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정식 교계제도를 갖추고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데.. 2009. 5. 4.
내가 만난 마더 데레사 수녀 "사랑의 등불을 켜서 어두워가는 세상 밝혀야" 김 추기경이 한국을 처음 방문한 마더 데레사 수녀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1981. 5. 3~6) '살아있는 성녀의 보디가드 김 추기경' 1981년 5월3일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방한하셨다. 그날 오후 공항으로 수녀님을 마중 나갔는데 어찌나 인파가 많이 몰렸던지 팔자(?)에도 없는 경호원 노릇을 해야 했다. 수녀님을 감싸 안다시피하고 인파를 헤치면서 공항을 빠져 나가는 내 모습을 보고 한 신문기자가 '보디가드 김 추기경'이라고 썼다. 물밀듯 밀려드는 기자들과 환영객을 막지 않으면 70세가 넘은 150㎝ 단신 수녀님이 다치실 것만 같아 보디가드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한국에 머문 3박4일 동안 우리 가슴에 '사랑의 불'를 놓..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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