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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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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인간'
 
산업화 초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노동탄압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진은 1976년 서울대교구장 시절,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는 동일방직 여공들을 만나는 장면..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권리와 존엄성은 언제 어디서든지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한다. 이같은 신념은 1970년대와 80년대를 숨가쁘게 헤쳐 나오는 동안 내게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작용했다.

 1968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 자격으로 강화도 심도직물사건에 개입한 이유도 노동자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가 예민한 사회문제에 대해 주교단 성명을 통해 최초로 발언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에 합법적 노동조합이 결성됐는데 이 과정에서 강화본당 JOC 회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강화도에 있는 21개 직물회사 중에는 이미 노조가 결성된 곳도 있었다. 강화본당 전 미카엘 주임신부(메리놀외방전교회)는 회합장소를 빌려주는 등 노조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그런데 그 회사 사장인 국회의원 김모씨는 노조간부를 해고한 데 이어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들까지 공장 밖으로 내몰았다. 다른 회사 사장들도 이 틈을 타서 노조활동에 적극 가담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해고된 노동자 16명은 한결같이 천주교 신자였다.

 기업주들은 그것도 모자라 전 신부를 찾아가 노동자들을 선동한 용공분자라고 몰아붙이면서 공장 손실에 대해 책임지라고 협박했다. 또 천주교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내걸었는가 하면, 심도직물 사장은 "전 신부의 부당한 간섭으로 공장이 마비되어 문을 닫는다"면서 휴업 결정을 내렸다.

   회사 사주를 받은 노동자들이 성당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 기업주들과 한통속이 된 강화 경찰서장도 '반공법 위반' 운운하면서 기업주들에게 정중히 사과할 것을 전 신부에게 종용했다. 이로 인해 지역 주민은 물론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마당에 JOC 총재주교로서 현장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도로 올라가면서 '장차 한국사회에서 수없이 일어날 충돌인데 첫 충돌이 교회와 연관되어 일어났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현장에서 파악한 사건 전말은 매우 복잡했다. 기업주들이 노조활동을 방해하려고 폭력배를 동원한 흔적이 나타났다. 노조 배후자로 지목된 아피(A.F.I.) 회원 송 고레띠씨는 폭력배들의 협박이 무서워 성당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과 권리를 짓밟는 노조탄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그때는 '노동자'라는 명칭조차 호사스러운 시절이었다. 정부 당국자들이 농촌 희생을 전제로 한 산업화정책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농촌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농사를 지어서는 자식 교육은커녕 끼니 잇기조차 힘들게 되자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일자리가 부족하다 보니 그들의 노동력은 헐값에 팔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은 산업화정책의 희생양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강화도는 외부와 격리된 섬이라는 특성상 기업주의 횡포가 더 심했다.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개신교의 조승혁 목사와 성공회의 리차드 신부도 참석했다. 조 목사는 교회가 노동문제에 개입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가면서 일장 연설을 했는데 그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튿날 오후 그 일행과 전등사에 잠시 바람을 쐬러 갔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우락부락하게 생긴 청년 10여명이 나타나더니 욕설을 퍼부으면서 협박하는 게 아닌가. 기업주들이 보낸 폭력배들이 틀림없었다. 우리가 대꾸를 하지 않고 피했길래 망정이었지 그러지 않았으면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뻔했다.

 '우리에게도 물리적 위협을 가하는데 힘없는 어린 여직공들에게는 얼마나 못된 행패를 부릴까?' 바람을 쐬러 나간 길인데도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날 미사에서 JOC 회원들에게 이런 말을 말했다.

 "억눌리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진 연약한 소녀들과 JOC 회원들에게 존경을 표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역사가 증명합니다."

 대책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해결방안을 모색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님도 관할지역 사목 책임자로서 메시지를 발표하고, 경기도 경찰국장실에서 사측 대표와 만나 협상하는 등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나 시원스런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 2월 주교단은 새로 부임한 교황대사 환영미사를 위해 대사관에 모일 예정이었다. 나는 나 굴리엘모 주교님과 함께 임시주교회의를 그 자리에서 개최하자고 주교단에 건의했다. 교회가 심도직물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침내 2월9일 임시주교회의에서 주교님 14분이 서명한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성명서'가 발표됐다. 성명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노동력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이다. 따라서 주교단은 강화본당 신부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활동을 지지한다. 인간 기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수호되어야 하기 때문에 주교들은 부당한 노사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다."

 이 성명서가 발표되고서야 정부가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6일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이 성명이 사회정의와 노동자 인권신장에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이후에도 전태일 분신자살, 동일방직 파업사태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이 성명이 한국교회의 첫 대사회적 발언이라고 밝혔듯이 교회가 울타리 너머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린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다시 마산으로 내려와 평소처럼 일상업무에 임했다. 잠시 후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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