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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내가 만난 박정희 대통령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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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서 '비상대권' 비판
 
박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간 김 추기경(1969년 7월1일). 김 추기경과 반갑게 악수하는 소녀가 지금의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다.

 서울대교구장 재임 30년(1968년~1998년) 동안 박정희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여섯분의 대통령을 만났다. 그 30년은 알다시피 한국사회 격동기였다.

 어떤 대통령과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마주앉아 담판을 짓고, 또 어떤 대통령과는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청와대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오면 '제발 날 그만 불렀으면….'하는 마음부터 들게하는 대통령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1968년 6월7일 교구장 취임 인사차 처음 만났다. 첫 인상은 듣던 대로 소박하고 소탈했다.

 독일 유학시절 신문에서 본 사진, 그러니까 검은색 선그라스를 끼고 5·16 군사정변을 지휘하는 사진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된 터라 선입견이 좋지 않았는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첫 만남의 좋은 인상과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69년 가을 나라 전체가 개헌논란으로 시끄러웠다. 두번째 임기 중반을 맞은 박 대통령은 장기집권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관철시켰다. 결국 71년 4월 제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나라가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도 서슬퍼런 군사독재정권의 비위를 거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말 박 정권은 "대통령에게 '국가보위에 관한 비상대권'을 주는 법을 의결해야 한다"고 국회에 으름장을 놓았다. 국회 동의없이도 긴급조치를 발동해 전권을 휘두르려는 의도였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시편 96, 11) 환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시기인데도 국민들은 공포정치의 암울한 현실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괴로워하는 이들, 실의에 빠져있는 모든 이들과 이 성탄밤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슬픔, 회의(懷疑)를 나누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넣은 성탄 메시지를 발표했다.

 성탄을 준비하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성탄의 축복과 평화 메시지는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하도 답답해서 대통령 측근 중에 내가 아는 분이 성탄 하루 전날 전방부대 위문을 간다고 하길래 같이 가자고 따라 나섰다. 그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상대권 요구가 박 대통령 의지입니까, 아니면 주변 사람들 의지입니까?"
 "글쎄요…. 대령령 각하 본인의 의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전방부대에서 돌아와 하루 종일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에 대한 최종 답을 얻은 시각은 성탄 자정미사를 한 시간 남겨둔 밤 11시였다. KBS TV로 전국에 생방송되는 그날 자정미사 강론에서 말문을 열었다.

 "…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마침 미사중계를 시청하고 있던 박 대통령은 그 충격적 발언에 버럭 화를 내고 방송국에 방송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중계방송 책임자가 자리에 없어서 즉각 방송이 끊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후에 중단됐다. 박 대통령은 날이 밝는 대로 장관들을 소집해서 나에 대한 처리문제를 논의하려 했다는 얘기까지 내 귀에 들려왔다.

 그런데 그날 아침 165명이 사망하는 대연각호텔 화재참사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청와대에서 내 문제가 흐지부지 묻혔다. 그 사건의 여파로 방송 책임자가 회사를 떠나야 했는데 그 희생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난 그 발언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듬해 식목일에 박 대통령과 무려 11시간이나 함께 지내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박 대통령과 함께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기차에서 7시간, 진해 공관에서 4시간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 만남은 육영수 여사가 주선했는데 아마도 나와 대통령의 관계를 화해시키려는 뜻이 아니었나 싶다.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은 말할 기회를 좀체 주지않고 일방적으로 혼자 얘기했다. 그래서 '오늘은 듣자. 어떤 분인지, 어떤 통치철학을 갖고 있는지 들어보자.'고 마음먹고 거의 듣기만 했다. 기차가 천안 부근에 이르렀을 때이다.

 "어이, 비서실장. 저것 봐! 나무가 없잖아. 저기가 어디야?"
 "천안 어디쯤인 것 같습니다."(비서실장)
 "추기경님, 저 뚝 좀 보십시오. 대한민국이 이래요!"

 기차가 김천을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주교님, 여기가 무슨 역입니까?"
 "아마 대신역일 겁니다."
 "아, 그래요. 쯧쯧…. 저 플라타너스는 전지(剪枝)를 하면 안되는데 저렇게 가지를 쳐버렸네요. 이봐 비서실장! 차장 불러서 저 전지를 누가 했는지 알아보라고 해."

 더 놀란 것은 서울서 진해까지 가는 철로 양편에 경찰들이 500m 정도 간격으로 쭉 늘어서 있다가 기차가 지나가면 '받들어 총' 자세를 취하면서 기차 진행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광경이었다. 또 종이에 4대 강을 그려가면서 몇 십년은 족히 걸릴 법한 개발계획을 설명하는 그분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독재체제로 갈 것임을 예견했다. 다음날 혼자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무척 우울했다.

 박 대통령은 우리 강산 구석구석 나무 한그루에까지 애정을 쏟는 분이었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가꾸고 돌봐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집착이 강했다.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제3기 집권에 대한 욕망을 꺾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국부(國父)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도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국모(國母)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칭호를 받을만한 분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박 대통령과 대화다운 대화를 한 것은 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금되었을 때이다. 역대 대통령들과의 만남 중에서 가장 뜻깊었던 그 만남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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