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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서울대교구장에 오르다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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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 승품' 소식에 날벼락 맞은 듯한 충격
 
김수환 추기경이 196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좌에 착좌한 후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상을 교구민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1968년 4월 어느날이었다. 서울로 급히 올라오라는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 대주교님의 전갈을 받고 대사관에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김 주교."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는지…."
 "우선 축하부터 해야겠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김 주교를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셨어요."
 "예? 뭐라구요?"
 "김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말이에요."
 "… …"

 그때 그 충격과 어리둥절한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없을 것 같다. 정말이지 맑은 하늘에서 난데없이 내리치는 벼락을 맞는 충격이 그럴 것이다. 머릿속에서 맴돈 말은 '왜 하필 내가?'라는 반문뿐이었다.

 "대주교님, 저는 주교된 지 2년밖에 안됐습니다. 주교단에서도 제일 막내입니다. 그런 제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어떻게 지고 가겠습니까?"
 "그러나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서울대교구는 노기남 대주교님이 은퇴하신 후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님이 서리(署理) 자격으로 13개월째 이끌어가고 있었다. 후임자가 머지 않아 임명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서울대교구 신부들이 교구 출신 교구장 선임을 요청하는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빚에 쪼들리고, 사제들이 분열되는 등 복잡하게 얽힌 문제가 많았다. 그야말로 교회에서 종종 발생하는 문제와 갈등이 모두 불거져서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상태였다.

 수원과 서울을 오가면서 집무하시던 윤 주교님은 심적 고통이 얼마나 크셨던 지 "수원에 있다가 서울 땅을 밟으면 그때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서울에 있다가 수원으로 넘어오면 '휴~'하고 한숨부터 나온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심지어 교구청에서 윤 주교님을 모셨던 수녀님은 "방 청소를 하면서 주교님이 흘리신 코피 자국을 수도 없이 봤다"고 훗날 털어놓기까지 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라는 교황대사님 말씀에 더 이상 변명을 하지 못하고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 된 '시골뜨기 주교'가 짊어질 만한 십자가가 아닌 것 같았다.

 마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신록이 짙어가는 4월인데도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같은 외로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하느님 뜻이 무엇인가? 주님, 감당키 어려운 십자가를 들려 낯선 타향으로 저를 보내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심도직물사건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느라 주교단이 교황대사관에 모였을 때 대사님이 나를 따로 불러 후임 교구장에 대한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 그때 ○○○와 ○○○를 추천하고 싶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도 그 '화살'이 내게 돌아왔다.

 새 교구장 탄생 소식은 4월27일 오후 늦게 로마와 한국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그 전부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서울대교구 수장(首長)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터라 언론에서도 이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별의별 반응이 다 나왔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무나 예상 밖'이라는 것이었다. 신문에 "김수환이란 주교가 누군지, 얼굴도 본 적이 없다"는 어떤 분의 반응이 실리기도 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특히 서울 신부들은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고, 또 교구장이 될만한 특출난 자격을 갖춘 사람도 아닌 내가 수도(首都) 교구의 교구장으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게다. 하기는 나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파격 인사인데 그분들이야 오죽했겠는가.

 언론사에서도 의외의 인물에 대한 관심반, 호기심반으로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지금 같았으면 말을 아꼈을 텐데 그때는 순진하게도(?) 묻는 대로 꼬박꼬박 대답했다. 그때 기자들이 나보다 교회 문제를 더 많이 알고 있어서 잠시 놀랐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교회에 바친 사람입니다. 2년전 주교품을 받을 때 정한 사목표어 '여러분과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를 되새겨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막중한 사명인 현실참여는 어떻게든 실천해야 하며, 서울대교구가 한국 일반정세에 비춰 지방교회에 봉사하는 교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가톨릭시보 1968년 5월5일자 인터뷰에서)

 마산교구민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일전에 말한 대로 마산은 왠지 모르게 고향같은 느낌이 드는 고장이다. 주교가 된 후 첫정을 쏟은 곳이어서 그랬는지 신부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 눈물이 나왔다. 그 눈물은 홀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인간적 고독의 표시였는지도 모르겠다.

 5월29일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명동대성당에서 교구장좌 착좌식이 거행됐다.

 내가 교황대사님 인도로 교구장좌에 앉자 교구사제 120명이 한줄로 걸어나와 내게 순명서약을 했다. 백발이 성성한 80 넘은 원로사제들이 맨 먼저 47세 새파란 교구장에게 무릎을 꿇고 순명을 서약하는 그 순간, 내 마음은 감동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난 그분들보다 더 몸을 굽히고 서약을 받았다.

 가톨릭의 순명 전통을 모르는 외빈들은 그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일반 회사나 기관이었다면 식장 밖에서 취임반대 시위가 벌어졌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성당 밖에 축하 플래카드가 걸리고, 원로사제들은 아들 뻘 되는 교구장에게 무릎을 꿇고 순명을 약속했다. 그게 가톨릭의 순명 정신이다.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받아들이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둘째 문제다.

 그날 취임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에 교회가 천주의 장막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달라'고 하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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