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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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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미사 집전 영광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단상 가운데). 이날 시복식을 계기로 한국교회에 순교자 현양운동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나도 순교할 수 있을까? 순교자들처럼 피와 살이 튀는 끔찍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천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을까?

 순교도 하느님 은혜인 것 같다. 아픈 걸 못참는 내가 그 고통을 이겨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순간이 닥치면 하느님 은혜를 청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교회 순교자들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 시기에 천주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외쳤을까. 한 교회사가가 "조선 관가의 순교자 심문기록에서 '사학죄인(邪學罪人) ○○○'라는 말만 빼면 그 자체가 훌륭한 교리서"라고 감탄했는데 나 역시 순교자 증언록을 읽을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다.

 1968년 10월6일은 한국교회에 큰 축복이 내린 날이다. 그날 로마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거행됐는데 나와 한국교회 대표단 136명이 그 감격스런 현장에 있었다. 당시 한국 대표단은 전세기를 타고 로마까지 날아갔다. 국내에 전세기가 없어 아르헨티나 전세기가 서울까지 와서 우리를 싣고 갔지만 민간인이 여객기를 전세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날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시복미사 집전의 영광이 내게 주어졌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미사가 끝나고 오후에 베드로 대성전에 입장해 24위 시복을 선포하셨다.

 우리 선조들은 신앙을 지키느라 모든 것을 버리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곤궁하기 이를 데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관헌에게 붙잡혀 매맞고 굶주리는 등 온갖 수난을 겪다 입가에 '봄바람 이는 미소'를 머금고 숨을 거두셨다. 그분들에게 하느님은 생의 전부였다. 그러하기에 산간벽지로 쫓겨다니고, 굶주리고, 울고, 짓밟히다 마침내 목숨까지 내놓으신 것이다.

 그런 선조들이 복자품에 오르는 감격스런 장면을 지켜보는 신자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했다. 유럽에 사는 교포신자들까지 합쳐 한국인 500여명이 모인 그날은 바티칸 전체가 아시아의 변방, 한국의 날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순교를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라고 여기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가깝게는 우리의 조부, 멀게는 증조부와 고조부가 걸어온 길이다. 따라서 순교자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우리가 선조들이 목숨까지 내놓고 지킨 하느님을 더 극진히 믿고 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순교자들처럼 세상 부귀영화와 목숨을 다 버린다 해도 하느님만은 버릴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최소한 주일에 돈 벌거나 먹고 즐기는 일보다 하느님 섬기는 일을 우선시하면서 살고 있는가. 우리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내게 순교는 바로 할아버지 얘기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시던 조부 보현(요한)공은 병인교난(1866-68년)때 충남 논산에서 붙잡혀 서울 감옥에서 아사(餓死)하셨다. 조모(강말손)도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됐는데 감옥에서 풀려나 낳은 아기가 내 아버지 김영석 요셉이다.

 천주교로 인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참으로 가난하게 사셨다. 어머니 역시 배우자의 믿음만 보고 몰락한 집안으로 시집와서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행상으로 살림을 꾸리셨다.

 난 어릴적 어머니 무릎에서 할아버지 순교 얘기, 할머니의 서럽고 고달픈 옥바라지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내게 성인전을 읽어주면서 "너는 커서 신부가 되라"는 말씀을 하셨다. 겉으로 내색을 않하고 살아왔지만 내 몸에 순교자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아무튼 한국 신자들은 시복식 다음날 교황님을 특별 알현하는 영광까지 얻었다. 알현을 기다리는 신자들의 기대와 설레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신자들이 바티칸 순례를 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교황님을 알현하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교황님이 알현장에 들어오시고 나가실 때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연세든 신부님들까지 교황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어서 아우성치듯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난 한국 대표교구 책임자랍시고 교황님을 옆에서 모셨으니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린 것인가.  

 교황 바오로 6세는 어떤 의미로 나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나를 주교와 대주교, 이어 추기경으로까지 임명해주신 데다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이 특별했던 분이시다. 교황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한국교회를 특별히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처음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만 해도 의례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 각별한 애정은 아시아 추기경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황님을 뵙는 자리에서 확인했다. 난 나이가 제일 어려서 교황님께 인사를 드리는 순서가 맨 끝이었다. 그런데 다른 추기경들과 의례적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인사를 하시던 교황님이 내게는 또다시 "한국교회를 특별히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그분의 각별한 애정에 대해 수차 생각해보았지만 아직도 그 연유를 모르겠다. 한국교회가 선교 역사상 유례없이 평신도의 힘으로 세워진 데다 해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워서 그러셨던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시복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 산적한 교구 현안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교구 부채를 갚아나가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심지어 미국까지 건너가서 "형편이 풀리는 대로 갚을 테니 조금만 더 참아달라"는 사정을 하고 돌아와야 했다.

 골치 아픈 일이 잇따라 터질 때는 '아~ 이 십자가를 언제 벗나'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지도자이기에 그런 탄식조차도 사람들 눈을 피해서 해야 했다.

 나는 늘 도망갈 궁리를 하면서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신학교 입학 때도 그랬고, 주교로 서품될 때도 그랬다. 우스운 얘기지만 주교품을 받기 직전에 주교서품식 전례서 맨 끝장에 나와있는 주교직위 박탈사유와 절차를 유심히 읽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무렵 도망갈 길이 완전히 막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도망을 못가게 아예 족쇄를 채워놓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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