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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71

마산교구장이 되어 사제서품 15년 뒤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에 주교서품 김 추기경이 서정길 대주교, 최재선 주교, 노기남 대주교(왼쪽부터 시계 방향)의 인도를 받으면서 주교서품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교황대사님이 나를 왜 갑자기 보자고 하시지?' 교황대사님(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이 나를 찾는 이유를 궁금해하면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너머에는 겨울잠에 빠져 있는 들판을 깨우는 3월 초순의 봄기운이 완연했다. 성무일도서를 펴고 그날 독서를 읽었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아브람은 야훼께.. 2009. 5. 4.
사형수 최월갑과 희망원 교수대 부러져 떨어졌는 데도 편안히 웃기만 한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랐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 대구 희망원 가족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 추기경.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에 교도소엘 밥먹듯이 자주 들락거렸다. 무슨 죄를 짓고 잡혀 들어간 게 아니라 재소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주일미사나 고해성사 때 재소자들을 대하고 있으면 '순백의 영혼' 같은 천사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려고 애쓰는 그들의 선한 눈빛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특히 고해실에서 그들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교도소) 밖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안에 있고,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이 밖에 있는 것은 아닌가'라며 고개를 갸우뚱한 적.. 2009. 5. 4.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 식사 시간이 아까울 만큼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려 김수환 추기경(가운데)이 가톨릭시보사 사장신부로 재직하던 1965년 9월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사진제공=가톨릭신문 1963년 11월, 독일에서 7년만에 돌아왔다. 그 사이에 한국 가톨릭은 정식 교계제도를 갖추고 자립기반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교회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 길은 독일에서 보고 배운 것을 사목현장에서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구장님은 난데없이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직을 내게 맡기셨다. 신문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어 막막한 심정으로 출근한 신문사. 난 그곳에서 2년 동안 밥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일에 미쳐 살았다. 돌이켜보건대 내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린 때는 시보사 시절이 아니.. 2009. 5. 4.
독일 유학생 시절(下) 현지 체험들, 훗날 사목자로서 소임수행에 큰 도움 한국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 수녀들이 나를 찾는 바람에 가뜩이나 힘든 공부가 자꾸 지연됐다. 독일 탄광촌에서.(뒷줄 가운데가 김 추기경) 다시 뮌스터대학으로 돌아와 공부하고 있을 무렵에 한국인들이 독일로 물밀듯 밀려왔다. 한국 정부가 서독으로부터 상업차관을 얻기 위해 간호사와 광부를 송출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은 노동력이 부족해 광산·병원처럼 고된 사업장에는 외국 노동력을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한국에 진출한 독일 계통의 분도회에서도 어학과 간호학을 공부시키느라 수녀와 수사들을 독일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한 독일인 신부님은 독일 가정에 입양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고아.. 2009. 5. 4.
독일 유학생 시절(上) 낯설고 힘들어도 새로운 사실 깨우치는 재미 쏠쏠 독일 유학시절에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희한한 구경거리`를 만난듯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시 독일에는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 어느 기차역에서. 1956년 10월, 배움의 열망을 가슴에 안고 독일에 도착했다. 뮌스터대학 요셉 회프너 교수신부님 밑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운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사람이 그 분이다. 그런 이론적 토대가 허술했더라면 70~80년대의 그 험난한 시기를 제대로 헤쳐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얼마 전에 독일 의원들이 그분의 학문 업적을 기리는 모임을 열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접한 적이 있다. 참으로 훌륭하고 저명한 .. 2009. 5. 4.
교장신부 시절과 1950년대 후반 한국교회 자상한 아버지, 때론 짓궂은 친구같은 '인자하신 콧님' 김천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들. 나는 젊은 교장이었지만 자상한 아버지, 때로는 짓궂은 장난을 거는 친구처럼 학생들을 대했다. 김천 성의중고교 제자들 가운데 김윤선이란 학생을 특별히 떠올리는 이유는 그가 뭇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또 내 예상을 뒤엎고 수녀원(예수성심시녀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내게서 세례를 받은 윤선이는 미모가 빼어난 데다 여학교 대대장을 맡았을 만큼 똘똘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남학생들의 연애편지가 툭하면 집에 날아와 곤혹을 치르고, 동네 부잣집에서도 며느리 삼고 싶어 안달했다고 한다. 어느날 윤선이 친구가 내게 "교장신부님, 윤선이 같은 애가 수녀되면 참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수녀가 되면 좋지"라고 맞장구를 쳤지만.. 2009. 5. 4.
내 무릎에 기대어 눈을 감으신 어머니 '이제 고아구나'라는 생각에 어린애처럼 두려워 어머니는 한평생 고단하게 사시다가 내 무릎에 기대어 눈을 감으셨다. 장지에서 하관식 예절을 거행하면서 어머니의 천상영복을 빌었다.(김 추기경 왼쪽은 김동한 형님신부) 난 아무래도 불효자식인 모양이다.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아들인데도 막상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TV 드라마를 보다가 이따금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눈물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내 딴에는 어머니 임종을 조용히 준비했다. 대구교구청 담벼락 뒤에 있는 낡은 집을 구입한 이유도 남의 셋방에서 큰일을 치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언제 큰일이 닥칠지 몰라 식량과 땔감도 충분히 장만해 두었다. 어머니는 그날 낮에 당신 방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떼어 갖고 2~3.. 2009. 5. 4.
짧았던 교구장 비서 시절 순박한 교우들과 눈물의 이별하고 대구로 어머니가 그토록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당 회장님이 소개해 준 젊은 부인을 식복사로 들여 몇 달을 아무 탈 없이 살았다. 남편이 전장에 나가 있어 홀로 안동으로 피난 내려온 새댁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본당에 와서 머무시겠다는 기별이 왔다. '어떻게하지…. 젊은 여자를 절대 식복사로 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머니가 아시면 무척 상심하시겠는 걸. 아냐, 그래도 어머니가 와 계시면 남들 보기에도 좋을 것 같다.' 성탄절을 앞두고 어머니가 오셨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달 동안 식복사에 대해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무사히 넘어가는 것 같아 내심 마음을 놓았는데 어느날 낯선 부인이 사제관에서 밥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여쭸더니 어머니는 .. 2009. 5. 4.
꿈처럼 아름다웠던 본당신부 시절 "신부님 출장가지 마세요. 성당이 텅빈 것 같아요" 성직생활 52년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순박한 교우들과 희노애락을 나눈 본당신부 시절이다. 사진은 첫 부임지인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의 여성 교우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는 안동 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방도를 찾기 위해 부산에 갔다가 '대박'을 맞은 사연은 이렇다.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적은 영문편지를 들고 안 제오르지오(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 주교님을 찾아뵈었다. 하지만 안 주교님은 일본 출장 중이어서 사무실에 계시지 않았다. 대신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 교황사절을 겸하고 계신 필스텐벨그 대주교님이 그곳에 와 계셨다. 필스텐벨그 대주교님께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렸더니 내 편지를 갖고 윗층으로 올라가셨다. 한참 후에 내려오신 대주.. 2009. 5. 4.
사제로 태어나다 '고통의 성모마리아 기념일'에 사제품 받아 사제품을 받고 69세 어머니와 기념촬영을 했다. 주름이 깊게 패인 어머니는 계산동성당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막내아들이 사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셨다. 1951년 9월15일. 함께 공부하던 정하권(현 마산교구 몬시뇰)과 사제수품일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이 날로 잡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잉태해 낳으시고 수난과 부활을 지켜본 성모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걸은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모님처럼 고통 속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사제의 길 아니겠는가. 사제생활의 모토로 삼고 싶은 성구(聖句)를 골라 쪽상본에 새겨넣어야 했는데 난 고심 끝에 시편 139장에 있는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 2009. 5. 4.
전쟁의 혼란 속으로 여권 수속 밟던 로마 유학 '물거품'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을 피하기 위해 화물열차 지붕에 오른 피란민들. 신학교 총급장이었던 김 추기경도 소신학생들을 데리고 화물열차 지붕에 매달려 피난했다. 27일 밤 인민군이 미아리고개까지 밀고 내려왔다. 신학생을 대표하는 총급장으로서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일단 신학생들과 명동성당으로 뛰었다. 명동성당도 우왕좌왕하고 대책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난 몇명과 구천우 신부님이 계시는 삼각지성당으로 가서 잠자리를 얻었다. 얼마쯤 눈을 붙였을까…. 요란한 폭발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인민군이 시내까지 들어왔다"고 소리쳤다. 부랴부랴 밖에 나가보니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이른 새벽 거리.. 2009. 5. 4.
'삭발례' 감동 사제수품때보다 커 공베르 교수신부님 금경축날 전쟁 터져 1950년 4월 대신학교 교정에 모인 김수환 추기경의 소신학교 동창들. 앞줄 왼쪽부터 신종호 신부·김정진 신부·최석우 신부, 뒷줄 왼쪽부터 김 추기경, 한사람 건너 김재덕 신부·최석호 신부·김영일 신부·최익철 신부·지학순 신부. 젊은 신부들이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1947년 9월 서울 혜화동 신학교 교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본 유학 기간의 공백 때문에 후배들과 함께 공부해야 했다. 내가 소신학교 5학년때 1학년에 갓 입학한 후배들이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또래도 더러 섞여 있었다. 내 소신학교 입학 동기들은 그 해에 벌써 사제품을 받았다. 동기라 하더라도 신부와 신학생 신분은 천양지차(天壤之差)라 착잡한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남..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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