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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으로 임명되다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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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인정받은 것 가장 기뻐
 
로마에서 추기경 서임식을 마치고 귀국하자 교회 안팎에서 축하가 쇄도했다. 성신중고등학교 교정에서 봉헌된 축하미사에 노기남 대주교(왼쪽), 서정길 대주교와 함께 입장하는 김 추기경(가운데, 1969.5.20)

 

 1969년 2월 회의차 로마에 갔다가 미국을 거쳐 3월27일쯤 일본에 도착했다. 그때는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오려면 일본을 경유해야 했다.

 도쿄에 내린 김에 상지(上智)대학에 계시는 은사 게페르트 신부님을 찾아뵙고 문안을 올렸다. 그리고 후지산 자락에 있는 작은 자매회 수녀원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나가려고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동행한 장익 비서신부(현 춘천교구장)와 가방을 들고 막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후 한 수녀가 "대주교님, 전화 왔어요" 하며 나를 불렀다.

 "이상하다. 나한테 걸려올 전화가 없는데…"라고 중얼거리면서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전날 찾아 뵌 게페르트 신부님이었다.

 "아, 김 대주교, 축하해요"
 "축하라뇨, 오늘 제 생일도 아닌데 무슨 축하입니까?"
 "김 대주교가 추기경이 됐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추기경! 교황님이 당신을 추기경에 임명하셨어요."
 "무슨 농담이세요"
 "아니라니까. 여기 신문에 당신 이름이 이렇게 났어요."
 "…… "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내가 한 첫 말은 "임파서블(impossible, 불가능한)"이었다.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장 신부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허허, 허허, 장 신부, 내가 추기경이 됐데"라고 겨우 한마디 했다. 수녀원 앞에서 택시를 못타고 100m 정도 걸어서 성심수녀원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한국 수련자들에게 얼굴이라도 비치고 갈 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일본 수녀와 한국 수련자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꽃다발까지 안겨주면서 축하해주었다. 수녀들이 그 짧은 시간에 꽃다발을 준비한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은사신부님이 내 숙소를 수소문하는 동안 얘기가 퍼진 것 같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교황님은 물론 인류복음화성장관 아가자냔 추기경님도 그에 대한 암시를 전혀 주시지 않았다. 그러니 어리둥절한 것은 당연했다.

 아무튼 김포공항에 도착했더니 노기남 대주교님과 주한 교황대사 로톨리 대주교님 등 300여명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 탄생'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신자들을 보고 나서야 조금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그 전날 외신보도를 통해 나보다 먼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은사 신부님이 출발 직전에 전화를 해주셨길래 다행이었지 그걸 모르고 공항에 내렸더라면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졌을 것이다.

 추기경은 알다시피 교황 다음가는 고위 성직자다. 그런데 난 추기경 임명통보를 받는 순간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그 인정은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순교자들의 도우심과 신자들의 희생봉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기에 감사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망갈 길이 정말 막혔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소신학교 입학, 일본유학, 사제수품, 주교임명 등 신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결국에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도망갈 방법은 없을까'라는 궁리를 떨치지 못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에서 추기경이 가장 먼저 탄생했고 이어 인도, 일본·필리핀, 인도네시아 순으로 추기경이 나왔다. 그러니까 아시아에서 그 다음 추기경이 한국교회에서 나온 것이다.(물론 대만의 폴 유핀 대주교, 필리핀 세부의 줄리오 로살레스 대주교도 나와 같은 시기에 임명됐다) 서울대교구 신부와 신자들뿐 아니라 지방교구에서도 이 사실에 함께 기뻐했다.

 주교가 추기경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임명된 후에 '추기경이 뭐하는 사람인가'하고 법전을 뒤져보았더니 복장이 순교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바뀌고, 주교도 들어갈 수 없는 일부 봉쇄수도원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정도였다. 추기경이라고 해서 어떤 특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교황선출권은 의미있는 권한이다.

 옛날에는 추기경을 '교회의 왕자(Prince of Church)' 또는 '교황의 왕자'라고 부르고 '전하(殿下)라는 존칭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추기경은 로마에 가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게 관례였다.

   나도 추기경이 된 직후 로마에서 바티칸 소유의 벤츠를 이용해보았다. 바티칸에서 내주는 벤츠 뒷좌석에 앉아 한껏 폼(?)을 잡기는 잡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공짜가 아니라 이용자가 요금을 내는 것이었다. 일반 택시요금보다 배가 비쌌다. 그래서 그 후부터 택시를 이용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하나씩 하나씩 실천하는 시기라서 바티칸도 얼마 안가 벤츠를 처분했다.

 추기경 서임행사는 4월28일부터 며칠간 로마에서 거행됐다. 나와 함께 추기경에 임명된 33명은 지정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교황특사가 들고 온 임명장을 받았다. 난 우르바노대학에서 유핀 추기경, 로살레스 추기경, 그리고 독일 유학시절 은사인 훼프너 추기경과 함께 임명장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훼프너 추기경님이 임명 순서상 내 뒤였다. 그래서 "교수님, 제자가 먼저 받아서 죄송합니다"라고 석고대죄(?)하면서 임명장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교황님이 수여하는 팔리움, 관(冠), 반지를 받고 6월1일 교황님과 다 함께 성베드로대성전에 모여 감사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했다. 새 추기경들이 대성전에 줄지어 입장할 때 길 양옆에서 박수를 치던 사람들 중에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이들이 많았다. 다들 연세가 지긋한 새 추기경들 속에 47세 앳된 동양인이 끼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당시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요즘 한국교회에 새 추기경이 탄생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 소망을 이미 여러차례 교황청에 전달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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