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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71

신군부 세력과 5.18 광주(하) 가장 고통스러웠던 70-80년대 광주의 5월 광주 항쟁에 적극 가담한 사형수들의 구명을 위해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놓는 게 급선무였다. 사진은 청와대에서 윤공희 대주교님(오른쪽)과 함께 전 대통령을 만나고 있는 장면. 광주에서 계엄군과 시위대의 충돌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혈사태는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녀 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만나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국민 대부분은 정부 발표와 언론 보도대로 불순세력이 선동한 소요쯤으로 알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을 달래가면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님께 편지를 썼다. 혹시 도움이 될지 몰라 그 안에 돈도 좀 넣었다. 광주는 이미 외부와 완전 차단된 상태였는데 이 계엄사령관 협조를 구해 군종신부 편.. 2009. 5. 4.
신군부 세력과 5.18 광주(상) "무장군인, 시위대 충돌 참극 반드시 막았어야..." 계엄군은 무차별적으로 연행해온 젊은이들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1980년 정월 초하루, 새해인사차 방문온 전두환 소장(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에게 '쓴소리'를 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12·12 사태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고 온 모양인데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79년 12월12일 밤에 발생한 12·12 사태는 전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내 강경소장파가 상관(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을 장악한 군사반란이다. 전 소장은 "정 총장이 10·26 사태에 관련된 혐의가 있기 때문에 연행조사가 불가피했다"고 변명했지만.. 2009. 5. 4.
유신 종말과 서울의 봄 "박정희를 불쌍히.." 내 기도에 신자들 깜짝 놀라 김수환 추기경이 중앙청앞 광장에서 엄수된 고 박정희 대통령 국장 영결식에서 천주교 대표로 나가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1979.11.3) 1979년 10월19일, 바티칸 인류복음화성 회의와 추기경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내 나라, 내 국토. 가난과 혼란으로 얼룩지고, 유신정권의 철권통치에 숨 죽인 국토가 그날 따라 유난히 슬퍼 보였다.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부마사태)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출국하는 길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신현준(요아킴) 교황청 한국대사 관저에 머물렀다. 26일(현지시각) 늦은 밤이었다. 신 대사님이 갑자기 방문을 두드렸다. "긴히 드릴 말.. 2009. 5. 4.
한달 동안의 피정 "모든 것이 당신 것이오니 그대로 당신께 맡깁니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자 되고 싶다. 가난한 자 중에서도 가난한 자. 모든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을 만큼 가난한 자…" 1979년 1월 한달 피정 중에 남긴 김 추기경 육필 원고. 수도자 피정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에서 가끔 방한하는 에반젤리스타 신부(예수회)는 70년대 중반부터 나를 볼 때마다 한달 피정을 권유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미뤄놓고 한달이나 자리를 비우는 게 부담스러워 대답을 못하다가 79년 1월 큰 맘 먹고 수원에 있는 말씀의 집에 들어갔다. 난 그때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평온한 얼굴로 영성적 얘기를 하면서도 스스로는 기도에 침잠(沈潛)하기 힘들 정도로 영적 빈곤에 시달렸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는 심정.. 2009. 5. 4.
두 번의 교황선거 베드로 사도 후계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출 처음 교황선거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오른쪽에서 두번째). 김 추기경은 "성령께서 우리 추기경들을 매개로 역사하셔서 하느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보았다"고 회고한다.(1978년 8월 26일) 1978년 8월7일 아침, 교구청에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교황 바오로 6세 서거 소식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1897~1978)는 내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촌티나는 시골 신부였던 나를 주교, 대주교, 추기경으로 임명해 주신 데다 한국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다. 로마 회의장 같은 곳에서 나를 만나면 항상 반갑게 맞아주시고 따뜻한 격려를 빼놓지 않으셨다. 부음을 듣고 남달리 슬펐던 또다른 이유는 고인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교회 현실에 이식하는 과정에서 .. 2009. 5. 4.
오원춘 사건 오원춘 사건은 유신정권의 파렴치한 농민운동 탄압 김수환 추기경이 안동성당(현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오원춘 사건 관련 강론을 하고 있다. 아래는 성당 정문에 걸린 시국기도회 현수막. (1979년 8월 6일) '차라리 내가 감옥에 가는 게 낫겠다.' 1970년대 후반 정부와 교회가 충돌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아 무척 고달펐다. 신부 연행과 시국기도회가 악순환처럼 반복되고, 추기경 직분상 그 한가운데 서다 보니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 속이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교회와 정부는 언제 파열될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관계였다. 1979년 여름에는 오원춘 사건이 교회 안팎을 뜨겁게 달구었다. 사건 전말은 이렇다. 경북 영양에서 농사를 짓는 신자 오원춘씨는 군(郡)에서 알선한 불량 씨앗감자 때문에 피해.. 2009. 5. 4.
동일방직 노조탄압 사건 '기계' 취급 받는 노동자 인권유린 방관할 수 없어 김수환 추기경이 단식농성 중인 동일방직 노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상품은 공장에 들어가 값진 물건이 되어 나오지만 인간은 공장에 들어가 폐품이 되어 나온다." 교황 비오 11세가 발표한 회칙 '사십주년'(1931년)에 있는 구절이다. 요즘은 '노동귀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고, 기업주들은 "노조 무서워서 공장을 중국으로 옮겨야겠다"고 불평할 정도로 노동자 권익이 향상됐다. 그러나 1970년대 노동자들은 교황 비오 11세가 지적했듯이 상품을 생산하는 기계 취급을 받았다. 오죽했으면 그들 구호가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것이었을까. 1970년대 노동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농촌에서 올라온 앳된 소녀들은 먼지구덩이 작업장에서 장시간.. 2009. 5. 4.
유신정권의 교회 탄압 교구 곳곳서 신부 연행, 구속, 시국기도회 반복 유신정권 종말 1년 전인 1978년은 교구 곳곳에서 신부가 연행되고 시국기도회가 열리는 등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사진은 시국기도회 장면. 3·1 명동사건 이후 민주화 진영은 유신반대 차원을 넘어 박 정권 퇴진구호까지 외치면서 전면 투쟁에 나섰다. 정부당국도 위기 징후를 포착했는지 전보다 더 무지막지하게 탄압 철퇴를 휘둘렀다. 나에 대한 정보기관 감시도 한층 강화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정보기관 감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내 전화는 24시간 감청된다는 게 상식처럼 여겨졌다. 누군가 숨어서 24시간 전화통화를 엿듣고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면 얼마나 소름끼칠까. 그러나 나는 그게 하도 익숙해져서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정보기관원들도 수시로 주.. 2009. 5. 4.
3.1 명동사건 유신정권 퇴진요구 '민주구국선언문' 발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과 신자들이 1976년 3월 중순 서울 명동 성모병원 마당에서 `3.1 명동사건` 구속자 석방과 헌정질서 회복을 촉구하는 시국기도회를 열고 있다. 유신정권은 1975년 5월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유신체제를 비방하거나 반대하는 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영장없이 체포해 1년 이상 징역형에 처한다는 초강경 조치였다. 정부는 국민의 입과 귀를 더 단단히 틀어막고 순종을 강요했다. 언론은 물론 민주화 진영조차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듬해 3월1일 무거운 침묵이 깨졌다. 3·1절 기념미사와 천주교·개신교 합동기도회가 열린 명동성당에서 유신반대를 넘어 유신정권 퇴진까지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됐다. 천주교와.. 2009. 5. 4.
내가 만난 저항시인 김지하 첫 인연은 거침없는 그의 문학만큼 순탄치 못해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지 주교 오른쪽 한복 차림) 시인이 석방 환영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원주 원동성당으로 향하고 있다.(1975년 2월 19일) 시인 김지하(프란치스코)는 1970년대 반독재 민주투쟁의 상징적 인물이다.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한국사회의 거짓과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 그의 저항문학에서 숨통을 틔웠다. 하지만 그와 첫 인연은 순탄하지 않았다. 1972년 4월 서울대교구에서 발행하는 종합월간지 룗창조룘에 그의 장편 풍자시 '비어(蜚語)'가 실리는 바람에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삼백예순날 하루도 뺀한 틈없이 이놈 저놈 권세좋은놈 입심좋은놈 뱃심좋은놈 깡좋은놈 빽좋은놈 마빡에 官짜 쓴놈 콧대위에 吏짜쓴놈, 삼삼구라, 빙빙접시웃는눈 날랜 입에 사짜.. 2009. 5. 4.
교회 정치참여 논쟁과 분열 약자 편에서 그들 존엄성 지켜주는 것이 정의 김 추기경이 가톨릭의대 산업재해병원(현 평화방송 평화신문 사옥) 개원식에 참석한 육영수 여사에게 병원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1971년 11월 27일) 1974년 10월, 지학순 주교님이 감옥에 계실 때 일이다.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서 전국 성년(聖年)대회가 열렸는데 약 5000명이 참석했다.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님은 강론에서 유신정권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입각한 신자 의무에 대해 역설하셨다. 성년대회는 이내 유신정권 규탄시위로 변했다. 주교단은 주교관을 쓴 채 시위대 맨 앞에서 거리 진출을 시도했다. 신부들과 신자들은 '지주교를 석방하라', '헌정질서 회복하라'는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뒤따랐다. 난 그때 회의차 로마에 체류했는.. 2009. 5. 4.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 사건(3) 민청학련 사건 관련 젊은이들 감형조치까지 요청 1975년 2월15일 출감하는 지학순 주교를 모시고 나오는 김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왼쪽). 박 대통령은 지학순 주교님을 풀어달라는 내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알겠습니다. 오늘 밤에 풀어드리겠습니다"하고 시원스레 대답했다. 내 말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 수긍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내친 김에 한가지 더 요청했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젊은이들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죽이면 안 됩니다. 국민과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칠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시오. 그러면 국민의 존경심도 한층 커질 것입니다." "…그건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정말 다행이었다. 며칠후 국방부장관 이름으로 감형조치..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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