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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71

갈등과 유혹 부산의 한 여인에게서 '청혼'받고 고민 대구시 중구 남산동 대구교구청내 성모당에는 예나 지금이나 기도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 성모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막내아들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나 같은 사람은 누구와 언성을 높여 싸워본 일이 한번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어머님을 찾아뵙기 위해 도착한 대구에서 경찰관과 대판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부산항에서부터 조국의 혼란스런 현실에 실망해 마음이 언짢았던 것이 사실이다. 형님 자전거를 타고 부산항으로 짐을 찾으러 갈 때도 경찰관의 고압적 검문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 대구행 열차는 유리창이 모두 떨어져 나간 데다 시트도 성한 것이 없었다. 해방 후의 어수.. 2009. 5. 4.
고달픈 귀국길 어렵사리 밟은 고국 땅 '실망 투성이' 며칠 동안 굶은 채로 부산항에 내려 형님 김동한 신부(오른쪽)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51년 형님 신부가 해군 군종신부로 입대하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다. 해방된 내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멀고 고달펐던가. 괌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원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싶었으나 대구 교구장님의 승낙서가 좀체 도착하지 않는 데다 이래저래 일이 꼬여서 3개월 더 일본에 머물다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재일교포들의 분열과 다툼이었다. 36년간 남의 나라 밑에서 설움을 겪다 해방됐으면 이제 한마음이 되어 조국의 미래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재일교포들은 툭하면 좌우로 갈라져 싸웠다. .. 2009. 5. 4.
전쟁터에서(하) 무모했던 탈출계획 끝내 '물거품' 남의 나라 전쟁터에 끌려온 학병이었기에 종전 소식은 더할나위 없이 감격스러웠다. 사진은 1945년 9월2일 시게미쯔 일본외상이 미국 미조리 항공모함에서 항복조인서에 서명하는 장면. 탈출의 날이 밝았다. 아침에 미군 B-29 폭격기가 포탄을 쏟아붓고 돌아가면 곧바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작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몸을 숨기고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각에 나타나는 폭격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날 따라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폭격기가 보이질 않았다. 폭격기가 돌아간 후에 출발해야지 만일 바다 한가운데서 폭격기를 만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기다리면 기다릴 수록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냥 부대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태평양 한가운데서 죽을 각오를 하고 출발하느냐의 선택만.. 2009. 5. 4.
전쟁터에서(上) "내 영명축일에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1944년 결국 학병으로 입대해 일본 중부 나가노 부근 마쯔모도라는 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고된 훈련이 연일 계속됐다. 얼마나 잠이 부족하고 배가 고팠던지 그때 소원은 딱 두가지였다.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고, 허리가 뻐근할 때까지 드러누워 실컷 자는 것. 요즘은 밤마다 잠이 안 와서 고생을 하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잠이 쏟아지던지…. 훈련소에서도 입바른 소리 잘하는 성격이 불거졌다. 어느날 나이 많은 고참상사가 나와 친구를 부르더니 허심탄회한 대화를 제의했다. 그는 우리가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 자리에서 고지식하게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 부당성 같은 얘기를 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까지만 해도 훈련병들 가운데 훈련점.. 2009. 5. 4.
일본 상지대학 유학시절(下) 강제 입영 앞둔 친구가 누이동생 부탁 일본 상지대학 유학 시절 절친했던 친구 박철(왼쪽). 학병에 나갈 무렵 헤어진 연변 용정 출신의 이 친구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여태껏 재회하지 못했다. 건강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소중한 것은 잃어버린 후에야 그 가치를 안다. 유학 시절에 무슨 식(式)을 할 때마다 군가 비슷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전쟁 기간이어서 더 그랬던지 일본 학생들은 그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면서 뜨거운 조국애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 같은 유학생들은 입만 놀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언제쯤 내 조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힐 일이다. 일본에 적개심을 품고 있는 한.. 2009. 4. 5.
일본 상지대학 유학시절(上) 일본에 대한 반감에 유학길이 '고생길' 일본 상지대학 유학 시절의 김수환(뒷줄 가운데). 앞줄 왼쪽 안경 쓴 이가 김정진, 그 옆이 최석우, 뒷줄 김 추기경 왼쪽이 최익철 신학생이다. 맨 오른쪽은 한공렬(제2대 전주교구장) 신부. 2. 김 추기경의 '영적 스승'이자 서강대 설립자인 게페르트 신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내 연배 신부들 중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은데 유독 일본 유학동기 4명만은 지금도 건재하다. 김정진(은퇴)·최석우(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최익철(은퇴) 신부가 나와 함께 1941년 일본 상지대학으로 함께 유학을 떠난 신부들이다. 최석우 신부는 지금도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교회사 연구에 전념하고 있고, 최익철 신부는 평생 모은 우표로 하느님 사업에 여력(餘力)을 보태고 있다. 나 .. 2009. 4. 5.
"어머니 내 어머니" 당신의 깊은 신앙심 말로 표현할 수 없어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수환 추기경이 어머니 서중하 여사를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 추기경은 어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성직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라는 교구장님의 명령은 정말 뜻밖이었다. 아마도 교장신부님이 우리 주교님(대구대목구 무세 주교)께 나에 대해 좋게 말씀해주셔서 그렇게 된 것 같다. 교장신부님은 버릇없이 말대꾸한다고 내 뺨을 때리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찮은 녀석인데'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잠시 어머니(서중하 마르티나, 1955년 작고)에 대한 얘기를 하고 넘어가고 싶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성직자가 혈육의 정에 연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자기 어머니가.. 2009. 4. 5.
동성상업학교 시절(下) 시험답지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김 추기경이 갈등 속에서 사제의 꿈을 키운 동성상업학교(현 서울 혜화동 동성중고등학교) 옛 교사(校舍). 담임이었던 공 신부님께 신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도둑'이 되기 싫어서였다. 사건의 발단은 공 신부님 강론이었다. 공 신부님은 미사 강론 중에 '착한 목자'(요한 10, 7-21)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서에 나와있듯이,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도둑은 양을 훔쳐다가 죽이려고 울타리를 넘는다. 하지만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간다. 너희들 중에도 이런 도둑같은 심보를 갖고 신학교에 온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녀석은 지금이라도 보따리를 싸는 게 낫다." 공 신부님이 나.. 2009. 4. 5.
동성상업학교 시절(上) 신부되기 싫어 꾀병 부리다 진짜 축농증 걸려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예비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는 갑조(甲組)와 을조(乙組)로 편성된 5년제였는데 갑조는 일반 상업학교였고, 을조는 나처럼 신부가 되려는 학생들이 다니는 소신학교였다.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1921~1993), 전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1920~1988)가 입학동기다. 지학순 주교는 도중에 결핵에 걸려 중퇴했다가 몇년 후에 함남 덕원신학교로 편입했다. 그 때문에 동기들 가운데 '꼴찌'로 사제품을 받았다. 하지만 1965년 가장 먼저 주교직에 올랐다. 그때 동기들이 그의 주교서품식장에서 "하느님 말씀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2009. 4. 5.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시절 5학년 마치고 5학년으로 입학...'낙제'한 셈 1. 1993년 폐허가 된 경북 군위 옛집을 찾아가 유년시절의 추억에 잠긴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은 성유스티노 신학교(예비과) 입학 직전까지 이 집에서 신앙과 꿈을 키웠다.2. 성유스티노 신학교(예비과) 시절의 소년 김수환(앞줄 가운데). 사제품을 1951년에 받았으니까 성직의 길로 들어선 지 올해로 53년째가 된다. 반세기 넘게 걸어온 성직자의 길. 하느님께서 부족한 나를 도구로 쓰시기 위해 넘칠 정도로 많은 영광과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첫 걸음을 되돌아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스님들은 머리깎고 출가를 한다지만 난 '가출'을 해서 신부가 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군위에서 5학년을 마칠 무렵이었다. 난 곧 동한 .. 2009. 4. 5.
유년기의 추억 "신학교 갔지만 신부될 생각은 없어" 2009.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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