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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1972년 8.15 시국 담화문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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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정치 시대, 교회까지 침묵할 수는 없어
 
김수환 추기경이 1972년 8월9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1972년 한국 사회는 혼미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다 어두운 터널로 들어서는 것 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인 장기집권의 발판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었다.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사채에 짓눌린 기업들의 부도위기에서 보듯 무리한 경제개발계획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 명령'이라는 두가지 큰 이슈가 나라를 흔들었다.

 7월4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통일 3대 원칙을 천명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통일은 ▲외세 간섭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무력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실현하며 ▲사상과 이념, 제도를 초월해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갈라진 민족이 하나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원칙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훌륭한 정신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이면에 가려져 있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국민적 합의는 고사하고 아무런 공감대도 없이 남북 당사자들이 비밀회담을 통해 도출한 원칙이다. 당시 상황으로는 사상과 이념까지 초월한다는 파격적 원칙이 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1인 장기집권체제의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보았다. 민족적 과업인 통일을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려한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또 박 대통령은 8월3일 사채동결과 재벌에 대한 금융조세 특혜를 목적으로 하는 비상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사채를 무리하게 끌어 써서 파산위기에 몰린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한 전형적 정경유착이었다. 경제성장을 빌미로 자본주의 기본원리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약자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재벌보호 정책은 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탄압이 두려워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입바른 소리를 하려면 퇴학·퇴직·구속,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서슬 퍼런 공포정치의 시대였다. 정의를 외쳐야 하는'시대의 양심들'은 울분을 달래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체제에 무릎을 꿇고 순응하든지, 목숨을 걸고 꼿꼿이 서서 항거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던 때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까지 침묵할 수는 없었다. 복음정신에 비추어서 정의롭지 않은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8월9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광복 27주년에 즈음한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우리는 7·4 남북공동성명이 전쟁수단을 영구히 포기하고 대화로써 조국 통일을 달성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이것을 평화 위장의 전쟁준비 수단이나 권력정치의 기만전술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8·3 긴급재정명령으로 야기된 현실 앞에서 정부 보호와 특혜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제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책임있는 기업인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문책함과 동시에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한 정부가 국가를 파산 지경에 이르도록 무책임하게 영도해 온 데 대해 모든 애국 시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항의하고 맹성(猛省)을 촉구한다… 또한 언론 출판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실현을 촉구하고, 사회 안정과 질서를 흔드는 비상조치를 난발하는 권력의 폭주를 엄계한다…."

 이 성명에서 남북공동성명과 8·3 비상조치를 거론하기는 했지만 강조하려 했던 것은 우리나라가 어떤 일이 있어도 1인 장기독재 체제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날 오전에 성명을 발표하고 오후에 곧바로 아프리카로 떠났다. 우간다에서 열리는 아프리카 및 마다가스카르 주교회의연합회(SECAM) 총회에 아시아 대표로 초청받았기 때문이다. 도중에 홍콩에서 하룻밤 묵고 비행기를 갈아탔는데 동행한 장익 비서신부(현 춘천교구장)가 "외신들은 성명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면서 일본신문과 홍콩신문을 보여주었다.

 외신들은 한국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보도할 것은 보도했지만 국내 신문방송에서는 언론통제 때문에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는 내용은 보도할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김 추기경이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몇 줄짜리 단신이었다. 나중에 언론계에 있는 몇몇 사람으로부터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답답한 시점에서 꼭 필요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성명에서 드러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신개헌을 비밀리에 추진한 박정희 대통령은 10월17일 오후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헌법의 일부 효력이 정지되고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됐다. '통일을 위해서'라는 구실로 단행한 10월 유신(維新)이다. 북한도 그해 12월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해 독재권력 기반을 더 굳건하게 다져 놓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북한은 그때 이미 남침용 땅굴을 파고 있었다.

 아무튼 아프리카에서 돌아와보니 박 정권이 서울대교구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세무조사 요원들이 들이닥쳐 성모병원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정부와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그 골이 쉽사리 메워질 성질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에 대한 정부 감시가 심해졌다. 10월 중순 로마에 가려고 공항에 나갔는데 중앙정보부 요원이 아예 내 가방을 기내 좌석까지 들어다 주었다. 전에는 공항 로비에서 출국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로 서비스가 극진하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그들이 "추기경님이 멀리 가시는데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이죠"라고 하는 게 아닌가. 뭔가 좀 수상쩍었다.

 로마공항에 내렸더니 유학 중이던 함세웅 신부가 마중을 나왔다.

 "추기경님, 여기 오시는 걸 우리 공관에 통보했어요?"
 "내가 여기 오는 걸 그 사람들한테 왜 보고하겠나"
 "공관 사람들이 추기경님을 위해 VIP룸을 예약했다고 하던데요"
 "……."  

 내가 해외 인사나 외국언론과 접촉해서 엉뚱한(?) 소리를 못하도록 밀착감시를 할 작정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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