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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마산교구장 재직시절

by 세포네 200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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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정 각별히 쏟은 교구로 2년 동안 혼신의 노력

 

마산교구장이 되어 진해본당(현 진해 중앙동본당)으로 첫 사목방문을 나간 김 추기경. 신설교구 초대 교구장의 첫 사목방문이라서 그랬는지 시민들까지 거리에 나와 환영해 주었다.

 신부는 아무리 고달퍼도 신자들과 희노애락을 나누면서 살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다.

 지금은 늦어서 단념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자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아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안동본당(현 목성동본당), 성의중고교, 가톨릭시보사, 대구 희망원 등에서 사람들과 가깝게 호흡했던 시절이다.

 마산교구장이 되어서도 본당 사목방문을 나갈 때가 가장 즐거웠다. 시내에 있는 본당이야 한나절이면 다녀오지만 시내를 벗어나면 하룻밤을 묵고 와야 했다.

 당시 교구는 마산 진주 진해 등 5개시와 13개군을 관할했는데 먼 성당은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서너시간 달리고, 때로는 산넘고 물건너야 하는 곳도 있었다.

 시골 성당에 가면 신부들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사목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밤이면 산새와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드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교우들과 대화하다 보면 교구장이긴 해도 그들과 가까이서 호흡하는 사목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당을 가급적 자주 찾아다니면서 신설교구의 기초를 잡아 나갔다. 기초작업이라고 해봐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평신도가 참여하는 사목협의회를 결성하거나 사제평의회를 조직하는 일 정도였다.

  사제와 평신도간 대화 창구를 만들기 위해 신자 강습회를 열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 나는 신자들에게 평신도도 신부, 수녀와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을 일깨워주려는 생각이 간절했다.
 
   또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어떻게 기초를 놓아야 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때만 해도 교회가 세상과 대화하거나 삶을 나누는 일은 전무하다시피했다. 세상 한가운데 있음에도 세상사에는 무관심한 채 교회를 위한 교회에 머물러 있었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면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펼쳐나가야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세속적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은 교회가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적응해서 세상 한가운데로 나가 봉사하는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쇄신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교구장 재직 시절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후 처음 열린 세계 주교대의원회의(1967년)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주교대의원회의(주교시노드)란 지역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들이 교황과 함께 교회와 신앙에 관한 제반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다.

   그런데 '주교대의원회의'라는 용어는 가톨릭시보사 재직 시절에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로마에서 '주교시노드'가 열릴 예정이라는 외신을 받아들고 이걸 독자들에게 어떻게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궁리하다 '주교대의원회의'라는 용어를 만들게 되었다.

 주교대의원회의에는 원래 서울교구장 서리로 계시던 윤공희 대주교님이 참석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윤 대주교님이 사정이 있어 참석하실 수 없게 되자 내가 대신 뽑혀 가게 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주재한 교황 바오로 6세가 소집한 제1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주 의제는 가톨릭 신앙을 보전하는 문제였다. 그 회의에서 나는 신자와 비신자간 결혼 문제에 대해 강한 어조로 발언했다.

 대의원들은 신앙보전 차원에서 신자와 비신자간 결혼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그러나 한국처럼 신자수가 적은 전교지방에는 적용할 수 없는 얘기였다. 그 당시 한국 신자들만 하더라도 비신자와 결혼하는 이들이 더 많았는데 그런 결혼을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발언 기회를 얻었다.

 "대의원님들은 성서 말씀을 편협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고린토 전서 7, 12-14)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교우에게 교인이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해서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은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또 믿지 않는 아내도 믿는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와 비신자의 결혼 문제는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주장은 다행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래서 시노드 교부들은 나중에 그 부분을 내 의견대로 손질했다.

 한달간 꼬박 열린 주교대의원회의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마산교구장 생활은 2년밖에 하지 못했지만 주교가 된 후 첫 정을 각별하게 쏟은 교구임에는 틀림없다. 남녀간에도 첫사랑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2년 동안 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서 교구 기초를 닦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세울 만한 치적이 없다. 아마 마산교구에서 「교구사」를 쓴다면 '초대 교구장 김수환 주교(1966.5∼1968.5)'라는 한 줄 외에는 달리 기록할 만한 사항이 없을 것이다.

 난 마산교구를 떠나올 때 첫 정이 얼마나 깊이 들었던지 신부님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나와 헤어지는 게 섭섭하다고 눈물을 보이는 신부님은 없었다. 첫사랑은 대부분 짝사랑으로 끝난다고 하던가.

 그 무렵에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를 겸임하고 있었다. JOC는 청년 노동자들의 성화와 노동현장 복음화를 위해 벨기에 카르딘 신부가 창설한 신심운동단체로 한국에는 1960년대에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마산교구를 떠나기 4개월 전, 그러니까 1968년 초에 JOC와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길고 험난한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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