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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101

[76] 한국교회 창립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신앙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구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은 지난 1984년 한국을 방문, 축하의 말을 전했다. ‘이 땅에 빛을’ 『여러분의 사랑하는 나라에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온 200주년 맞이를 기쁨과 고마움으로 경축하면서, 여러분은 하느님 은총으로 「이 땅에 빛을」 가져오기로 결의했습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 전국 사목회의 개회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교회가 창설된지 200주년을 맞은 지난 1984년 한국을 방문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평신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신앙을 찾아 나섰던 한국 교회에 경축의 인사를 했다. 「이 땅에 빛을」이라는 주제로 열린 200주년 기념행사들은 한반도에 복음의 빛을 비추게 .. 2005. 11. 8.
[75 ] 아시아 선교, 인도와 일본 ◀ 인도와 일본 선교 역사의 첫 장을 연 것은 위대한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서 였다. 사진은 1549년 하비에르가 첫발을 디딘 일본 나가사키항. 위대한 선교사 하비에르 등장 인도와 일본 선교 역사의 첫 장을 연 것은 위대한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에 의해서였다. 교황사절이자 포르투갈 왕 요한 3세로부터 위임을 받아 해외선교에 나선 그는 1542년 인도 고아에 가서 말라카에서 성공적으로 포교 사업을 펼쳤고(1545~1547) 1549년에 새로 발견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이어 중국으로 가던 도중 세상을 떠났다. 인도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1460~1514)가 1498년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유럽과 처음 접하게 됐고 이후 포르.. 2005. 11. 8.
[74] 갈릴레오 갈릴레이 ◀ 갈릴레이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신앙과 과학의 대표적 갈등 불러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 회의에 참석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고통스러운 오해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가톨릭 교회와 과학 사이의 비극적인 상호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앙과 과학 사이에 벌어졌던 역사적 분쟁의 종지부를 찍은 이 선언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사건을 두고 한 것이다. 359년 만에 이뤄진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편견과 선입견, 편협한 교조주의가 일궈낸 부끄러운 교회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돼 지동설 포기.. 2005. 11. 8.
[73] 중국 선교와 적응 논쟁 ◀ 유럽주의의 근시안적인 승리는 아시아 선교지의 사멸을 의미했다. 오늘날 보편교회는 중국 선교를 가장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사진은 중국 교회의 모습들. 서양 학문 기술 문물 앞세워 선교 예수회 “제사는 민속”…신자수 27만까지 교황청 ‘적응주의’ 단죄로 선교지는 사멸 인류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가톨릭 교회가 고유의 전통 종교와 문화를 지닌 동양인에게 어떻게 선포돼야 하는지는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세계 선교의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 이래 지금까지도 여전히 큰 과제로 남아 있다. 마태오 리치(1552~1610)가 적응주의를 채택하고 놀라운 성공을 거뒀던 중국의 선교는 비극적인 운명을 겪었다. 이탈리아의 예수회 회원으로 천문학자요 수학자였던 리치는 1585년 미켈레 루이지에리(1542~1607)와 함께 중국 .. 2005. 11. 8.
[72] 지리적 발견과 식민지 포교 ◀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식민 정책과 강제적 개종은 원주민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착취자와 압제자의 종교로 보이게 했다. 사진은 달리의 작품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교회, 원주민 강제 개종시켜 지난 2000년 대희년 3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인 교회 구성원들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용서를 청하는 예식을 거행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교회의 커다란 과오 중의 하나로 중세 종교 재판에서 이교도들에 대한 박해, 십자군 전쟁과 함께 「폭력을 동원한 원주민들의 강제 개종」에 대해 「진리의 이름으로 행한 폭력」이라고 고백했다. 불순한 동기의 선교 17세기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시작된 서구 열강의 영토 점령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동기 외에도 .. 2005. 10. 29.
[71] 반종교 개혁 ◀ 30년 전쟁. 가톨릭은 1631년 마그데부르크에서 승리함으로써 개신교 잔당들을 소탕했다. 전투는 중부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는데, 이는 그곳의 교회가 영적으로 계속 불안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도.조직 정비’등 개혁 추진 쇄신운동의 일환…교회 영향력 회복 도모 독일 중심, 반가톨릭적 개혁 확산 저지 한몫 16세기 가톨릭 교회는 한편으로는 시대적인 혼란과 신앙 교리, 교회 관습과 전통의 혼돈으로 점철됐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개혁과 쇄신의 노력이 빛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15세기초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는 서구 대이교 사건(1378~1417)을 종결지었지만 교회의 쇄신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이는 세속적인 정치 권력의 간섭과 영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세.. 2005. 10. 29.
[70] 공의회 이후 성인시대 ◀스페인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는 깊은 신비 사상과 무한한 사랑으로 가르멜회를 쇄신했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신앙 교리의 혼란과 교회 관습, 전통의 극심한 혼돈 상태에 빠져들었던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거치면서 교도직에 의해 신앙 교리의 명확한 선언을 이룸으로써 쇄신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그리고 공의회의 성과로 교령들이 반포되고 실시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개혁 작업은 비로소 충만하게 된다. 이 개혁의 과정은 아주 오랜 시간을 요했으며 집요할 정도로 철저하고 개혁적인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었다. 가톨릭 신자 대중을 마치 패전한 군대처럼 침체시켰던 체념은 서서히 새로운 투쟁 정신과 다시금 각성된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극복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과 분열의 충격이 점차 극복됐고 교회에 .. 2005. 10. 29.
[69] 트리엔트 공의회 『항상 쇄신되어야 할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2천년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가톨릭교회는 이를 언제나 자신의 소명으로 인식하고 실천해왔다. 15세기와 16세기, 교회를 거슬러 괴롭힌 종교개혁의 바람 역시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거대한 쇄신의 바람이 몰고 온 풍랑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교회를 거슬러서만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다시 말해서 교회 내부로부터 터져 나오는 쓰라린 참회와 불만이 당시 교회 안에서 봇물처럼 쏟아졌다. 종교개혁 자체도 이러한 교회의 개혁 요구의 한 표현이었다. 교회 안에서 진행된 개혁운동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흐름이었다.교회 개혁운동 급물살 교회 내적 개혁운동은 이미 15세기 초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문예부흥기의 교.. 2005. 10. 29.
[68] 헨리 8세와 영국의 교회 분열 가톨릭 교회 권위에 도전‘국왕 이혼과 결혼’ 다분히 개인적 문제가 발단39개항 신조 인준, 성공회의 국교회 체제 확립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다른 지역의 종교개혁들과는 달리 그 기원에 있어서 종교적이라기보다는 국왕의 개인적인 문제와 교회 정책적인 문제에서 시작됐다. 즉 튜더왕조의 헨리 8세 국왕의 이혼과 결혼 문제를 둘러싼 다분히 개인적인 문제가 발단이 됐다고 할 수 있다.헨리 7세(1485~1509)에 의해 시작된 튜더 왕조(1485~1603)는 강력한 정부의 힘을 바탕으로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누렸다. 그러나 헨리 8세(1509~1547)에 와서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의해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영국교회는 이미 14세기 무렵부터 교회의 국교화 추세가 나타났다. 원칙적으로는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2005. 10. 29.
[67] 칼빈의 개혁 운동 “사도시대의 순수로 돌아가자”만년설의 알프스, 아름다운 호숫가 도시,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세상 어떤 불화와도 어울리지 않을 듯한 여유 있는 사람들…. 스위스를 거론할 때면 떠올리는 모습들이다.하지만 그런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스위스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제네바이다. 지리적으로는 스위스에서 삐죽 얼굴을 내밀고 프랑스령 내에 파묻혀 있는 형상, 그래서인지 불어가 통용되고 전체적인 도시 분위기도 프랑스 문화의 흔적을 안고 있는 듯하다.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이곳은 연중으로 전세계의 굵직한 외교적 활동들이 이뤄지는 곳이고 16세기에는 루터 이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칼빈이 활동함으로써 스위스의 종교개혁운동에 중심이 됐던 지역이다. 교회와 갈등 칼빈은 1509년 프랑스 느와용의 중산.. 2005. 10. 29.
[66] 츠빈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 “성서만이 원칙” 급진 개혁 전개영세 중립국 스위스의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도시들은 방문객들로 연중 북적거린다. 그 중에서도 취리히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곳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성당과 교회들이 즐비하다. 1100년부터 1250년 사이에 지어진 그로스뮌스터 성당은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취리히를 상징하는 명물 가운데 하나인 쌍둥이 탑이 있는 이 성당은 스위스의 대표적인 종교 개혁가 가운데 한 사람인 츠빈글리가 1519년부터 이 곳에서 설교한 이유로 「종교 개혁의 어머니 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츠빈글리의 흔적은 도시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리마트 강변에 있는 바세르 교회는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로 교.. 2005. 10. 29.
[65]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 가톨릭과 루터교 화해 시도1530년 황제 카알 5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화해를 위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한다. 신앙의 대립은 평화적인 담판에서 토의되고 개혁이 협의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루터는 이미 파문을 당해 제국의 법익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의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고 코부르크(Coburg) 성에서 프로테스탄트들과 빈번하게 서신을 교환하면서 배후에서 협상을 조정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루터의 동료이자 친구인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제출했고 그것이 1530년 6월 25일 의회에서 낭독됐다.종교 개혁가 중 인문주의자였던 멜란히톤은 타협의 자세를 견지하던 인물이었고 자신이 ..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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