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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101

[88] 파티마의 성모 발현 ◀ 파티마 성모 발현을 목격한 3명의 목동 어린이들. 맨 오른쪽이 발현 사실을 기록한 루시아 수녀. 죄인들 회개 위해 기도 당부 세 어린이 앞에 수 차례 성모님 발현 파티마 제3의 비밀은 교황 암살기도 지난 1997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포르투갈 파티마의 세라핌 데 수자 페레이라 주교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파티마 성모 발현 8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이 편지에서 교황은 인류에게 보낸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묵주기도 바칠 것을 권고했다. 교황은 포르투갈어로 쓰여진 이 편지에서 『동정 마리아가 인류에게 보낸 메시지는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내적 쇄신과 함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도 씻어내도록 기도하라』고 말.. 2005. 11. 12.
[87] 제1차 세계대전과 교회 ◀ 제1차 세계대전은 3700만명의 사상자를 낸 참혹한 전쟁이었다. 평화 중재.후유증 최소화 노력 바티칸에 포로-가족 상봉사무소 설치 전례쇄신.성서보급.평신도 운동 시작 20세기에 접어든 세계는 이전까지의 역사상 어느 전쟁보다도 참혹한 대규모의 전쟁을 겪게 된다. 무려 3700만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을 겪으면서 인류는 인간성에 대한 회의와 인간 이성에 대한 불신을 가슴 속에 품을 수 밖에 없었다. 1914년부터 4년간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가톨릭교회는 나름대로 국제 평화를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쟁의 체험이 교회 안팎에서 놀라운 변혁의 동기가 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발발한 당시의 교황.. 2005. 11. 12.
[86] 루르드 성모 발현 “회개하라!” 내적치유 이끌어 ◀ 루르드는 무엇보다도 회개와 보속을 통한 내적 치유라는 참된 의미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순례지이다. 요즘도 루르드에는 매년 400만명에 달하는 순례객들이 찾아온다. 1858년 2월 11일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조그만 도시 루르드. 정오께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14세의 벨라뎃다라는 한 어린 소녀가 나무와 짐승의 뼈를 줍기 위해 강둑을 따라가고 있었다. 다른 두 명과 함께 마을에서 서쪽으로 1㎞ 가량 떨어진 가브 강변의 동굴 근처로 간 벨라뎃다는 강을 건너기 위해 신발을 벗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방은 고요했고 나무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벨라뎃다는 마사비엘이라 불리던 동굴의 움.. 2005. 11. 12.
[85] 노동헌장(Rerum Novarum) 반포 사회교리 분야의 대헌장산업혁명후 자본가.사회주의 기승노동자 권익과 사회구조 개선 강조교황 비오 11세의 「사십주년」과 함께 가톨릭 사회 회칙의 초석을 놓은 문헌이 바로 교황 레오 13세의 「노동헌장」(Rerum Novarum)이다.문헌의 첫 머리를 따 「레룸 노바룸」(새로운 사태)이라고 불린 이 회칙은 산업혁명 이후 사회발전에 있어서 자유 방임적인 자본주의와 집단주의적 사회주의가 갖는 문제점들을 함께 지적하면서 복음적 시각에 바탕을 둔 대안을 모색한 혁명적인 문헌이다.특히 「노동헌장」이 제시한 사회적 전망의 예언자적인 면모는 오늘날에 와서 더욱 분명해졌다. 자본주의 체제들은 이미 지난 세기 초에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강화하면서 노동조합을 합법화했다. 그런가 하면 사회주의 체제들은 최근에 와서.. 2005. 11. 12.
[84]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 승인공의회 우위설 사라지고 교황의 영적권위는 강화1869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소집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초부터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의 신조화가 이뤄질 역사적 배경 속에서 시작됐다.트리엔트 공의회(1548~63) 이후 3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교회는 중대한 시점에 도달했다. 프랑스 대혁명은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났으나, 계몽주의와 함께 혁명이 가져온 자유주의의 이념은 전 유럽에 전파됐다.교회는 혁명과 자유주의에 대한 혐오로 보수적 전제 군주들과 제휴했는데 프랑스의 2월 혁명과 오스트리아의 3월 혁명으로 보수적 전제 군주제가 무너지면서 유럽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시대로 들어섰다.자유주의자였던 교황은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 2005. 11. 12.
[83] 교황령의 소멸과 바티칸 시국 ◀ 바티칸 시국은 1929년 라테란 조약에 의해 세워졌다. 1천년 부침하다 도시국가로 프랑스혁명으로 교황령 침탈 시작 통일추구 이탈리아에 마침내 병합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이자 교황의 세속적인 권한과 영적인 권한이 일치되어 행사되고 있는 유일한 장소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의 로마 시내 테베레강 서쪽에 있다. 성 베드로 광장이 있는 남동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성벽으로 둘러싸인 0.44㎢ 규모이다. 이 작은 나라는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 사이에 맺어진 라테란 조약에 의해 세워졌다. 바티칸 시국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1천 여년에 걸친 교황령의 길고긴 부침의 역사가 깔려 있다. 교황의 세속적인 지배권이 미치는 영토였던 「교황령」(Papal states)은 8세기 .. 2005. 11. 12.
[82] 나폴레옹과 교회 파문 빌미로 교황 납치 감금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일어난 프랑스 교회의 박해는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함으로써 비로소 막을 내렸다.1799년부터 1814년까지의 유럽사는 프랑스의 역사였다. 그리고 유럽의 중심 국가였던 프랑스를 나폴레옹이 장악한 이 시기는 「나폴레옹 시대」라고 불러도 될 만큼 나폴레옹과 프랑스는 당시 유럽의 중심이었다.나폴레옹은 종교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단지 하나의 정치적 요소로 간주됐다.나폴레옹의 시대에 가톨릭 교회의 중심은 교황 비오 7세였다. 1742년 이탈리아 체세나에서 태어난 비오 7세는 전임 교황 비오 6세가 1799년 8월 프랑스에서 사망한 뒤 그해말부터 오스트리아의 보.. 2005. 11. 12.
[81] 프랑스 혁명과 교회 프랑스 교회 봉건질서 붕괴넓은 광장 한가운데 단 위에 높이 세워진 기요틴(guillotine 단두대), 작두처럼 시퍼렇게 선 날이 덜컥 하고 떨어지면 겹겹이 둘러싼 군중들의 함성 소리는 더 높아진다. 18세기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거론하면 떠올려지는 이러한 광경은 프랑스 혁명이 얼마나 혁신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서양의 역사에 미쳤는지를 알아차리게 한다.혁명의 바람은 온 프랑스를 휩쓸었고 이어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혁명은 교회에도 일대 전환기를 초래했다.산업자본가의 권력 장악1789년부터 1799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일어난 혁명은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과정이면서 동시에 앙생레짐(anciem regime 구체제) 아래에서 꾸준하게 성장해온 산업 자본가가 봉건 영주와 성.. 2005. 11. 12.
[80] 계몽주의와 교회 대결속 교회 개혁의 단초 얻어『계몽이란 인간이 자기 탓으로 초래한 미몽(迷夢) 또는 미성숙(未成熟)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미성숙이란 자기 자신의 이성을 남의 도움 없이는 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자기 이성의 결함 때문이 아니고 다만 자신의 결단과 용기의 결함 때문인 경우이다』칸트는 「계몽주의」라는 말이 혼란을 일으키는 무의미한 개념이라는 개탄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그는 따라서 계몽의 목표는 『첫째, 인간을 그 후견인(後見人)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둘째, 인간이 자기 이성을 스스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라고 말했다.그가 간결하지만 핵심적으로 지적한 것과 같이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성은 그 자체로 진리의 척도이며 종교의 신성함까지도 계몽의 대.. 2005. 11. 8.
[79] 얀센주의(Jansenism) “선택 받은 자 만이 구원” 주장극도로 엄격한 신앙생활과 윤리 강조교회 “극단적인 원리주의” 공식 단죄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와의 관계는 오랫동안 신학의 대상이었고 정통 신앙과 이단적인 사상과의 많은 논쟁을 야기했던 주제였다. 인간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나 또는 인간의 의지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벨기에 루뱅대학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얀센(C. O. Jansen, 1585~ 1638)에 의해 비롯된 얀센주의는 원죄로 타락한 인간은 죄와 욕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그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주장함으로써 칼뱅파.. 2005. 11. 8.
[78] 에피스코팔리즘 “주교단이 교황보다 우위” 주장로마의 중앙집권주의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반대와 저항은 프랑스로부터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갈리아주의는 「프랑스 교회를 위해」 교황의 수위권을 크게 제한하려고 시도했다.갈리아주의와 함께 국가절대주의, 얀세니즘, 에피스코팔리즘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이같은 저항은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까지 교회를 격렬하고 끈질지게 괴롭혔다.주교주의그 중에서 에피스코팔리즘(Episco palismus)은 세계의 전체 주교들, 또는 공의회에서의 주교들이 교황보다 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운동을 지칭한다. 「주교주의」 또는 「주교단 우위설」로도 불리는 에피스코팔리즘은 13세기 절정을 이룬 교황권의 정치적 발전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것으로 평가된다.이러한 반동에는 아우구스티노까지 거슬러.. 2005. 11. 8.
[77] 갈리아주의(Gallicanism) 태동 ◀ 태양 왕 루이 14세.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의 절대주의적 통치 아래 반로마적이고, 국가주의 교회적인 경향이 그 절정에 도달했었다. 신앙의 분열이 가져 온 붕괴의 시기에 이어 트리엔트 공의회를 거친 뒤 다시금 교회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시기가 시작됐다. 종교개혁은 교황직에 위기를 가져왔으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전기가 되기도 했다. 공의회 통해 교황직 강화 갈등과 분열의 어렵고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교황직은 공의회를 통해 쇄신되고 강화됐다. 공회의에 참석한 교부들은 교회를 쇄신하고 개혁하는 작업을 교황에게 명확하게 일임했다. 그로써 가톨릭 교회 안에서 교황의 지도적인 위치는 분명하게 인식됐고 이에 따라 교회의 모든 생활에서 교황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게 행사될 수 있었다. 이후 교황청은 개.. 2005.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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