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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66] 츠빈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

by 세포네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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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스뮌스터 성당(왼쪽 쌍둥이 탑)은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츠빈글리가 이 곳에서 설교한 이유로 「종교 개혁의 어머니 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서만이 원칙” 급진 개혁 전개

영세 중립국 스위스의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도시들은 방문객들로 연중 북적거린다. 그 중에서도 취리히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곳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성당과 교회들이 즐비하다. 1100년부터 1250년 사이에 지어진 그로스뮌스터 성당은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취리히를 상징하는 명물 가운데 하나인 쌍둥이 탑이 있는 이 성당은 스위스의 대표적인 종교 개혁가 가운데 한 사람인 츠빈글리가 1519년부터 이 곳에서 설교한 이유로 「종교 개혁의 어머니 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츠빈글리의 흔적은 도시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리마트 강변에 있는 바세르 교회는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로 교회 앞에는 츠빈글리의 동상이 있고 근처에는 그가 살았던 집이 있다. 아름다운 풍광, 한가롭고 여유로운 취리히는 그러나 15세기말부터 격렬한 종교 개혁의 바람이 잦을 날 없었고 그 한가운데 츠빈글리와 재세례파들이 자리하고 있다.


취리히에서 발단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츠빈글리와 재세례파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 이 둘은 루터가 「광신자」로 형용했듯이 모두 심령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츠빈글리와 칼빈, 재세례파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서 중심, 신앙과 의화의 개념, 새로운 교회상, 반가톨릭 등의 공통된 기본 원칙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각기 고유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츠빈글리는 단순히 루터의 아류로 취급될 수는 없다.


츠빈글리는 1484년 토겐부르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성직자인 숙부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494년부터 1498년까지 바젤과 베른의 학교에 다녔고 1502년까지 빈에서 공부한 후 끝으로 바젤의 인문주의 학교에서 1506년에 수학을 마쳤다.


그는 바젤의 인문주의자들과 항상 교분을 나눴고 그들과 함께 에라스무스에게서 인문주의적인 영향을 받았다. 인문주의자들과 사귀면서 그는 스콜라 신학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고 인문주의적 사고방식을 신학의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1506년 콘스탄츠에서 신부가 되어 글라루스의 본당 신부로 지내는데 그 기간 동안 군종신부로 스위스 용병들을 따라 두 차례 전장에 파견되기도 했다. 1510년부터 스위스 용병제도를 비판해왔던 그는 주요한 수입원이기도 했던 용병수출에 대한 비판 때문에 아인지델른으로 전임하게 된다.
그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아인지델른에서 불륜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페스트로 인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경험과 1518년 취리히 대성당의 주임사제를 맡게 된 것이 그를 종교적, 교리적 문제에 있어서 개방적인 인물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성서주의」는 새로운 유행이었다. 취리히 시의회는 유행을 따르려 했고 그를 채용하면서 성서에 적합한 설교를 할 임무를 주었다. 인문주의자로서 그는 이 요구에 기꺼이 응했고 1522년까지 그의 성서 주해는 완전히 에라스무스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19년 라이프치히 토론회가 있은 후 그는 처음으로 루터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루터의 영향은 사실 미미한 것이었다.


1522년 그가 제시한 개혁안은 루터와 같은 깊은 개인적, 종교적 투쟁과 탐구에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재계 규정과 사제의 독신제를 반대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부유한 한 과부와 함께 살았고 1524년에는 공개적으로 결혼했다.


콘스탄츠의 교구청이 그를 고발했을 때 그는 주교와 긴장 관계에 있던 시의회의 지지를 유도해냈다. 시의회는 두 차례의 공개토론회를 열어 츠빈글리가 수도자들과 성서 원칙, 성화상 공경, 미사에 관해 토론을 벌이도록 했다. 츠빈글리는 이제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원칙을 개혁과 관련해 새롭게 해석했다. 성서적 생활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면서 그는 급진적인 개혁안을 전개해 모든 예식과 축성의 폐지, 성당 성화상의 제거, 미사 폐지, 수도회 해산, 시립 혼인재판소의 설치 등을 주장했다.


1523년 그가 미사 대신 루터파의 성찬식을 도입하려 했을 때 시의회는 중지를 명령했다. 2차 토론회 이후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고 1524년 1월 26일 스위스의 12개 동맹주들이 가톨릭 신앙의 수호를 내걸고 취리히에 대항해 나섰다. 시의회는 이러한 압력에 의해 더 이상 개혁적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고 츠빈글리가 시의회의 지시를 따르자 자신의 신봉자들 중 과격한 이들로부터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게 됐다.


게다가 유아세례 문제를 둘러싸고 츠빈글리와 그의 신봉자들 사이에는 급격하게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과격파들은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유아들에 대한 세례가 거짓이고 무익하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때까지 세례를 주지 않았고 마침내 유아세례 받은 모든 이들의 은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재세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츠빈글리는 유아세례를 고수했고 이들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츠빈글리는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 시의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 조치들을 추진해나갔고 1525년 4월 당국에 의해 미사가 폐지됐다. 같은 시기인 1524년 4월 5개주에서는 가톨릭의 수호를 위해 연합 체제를 형성했고 이듬해 1월 동맹을 맺어 취리히에 대항했다.
스위스 의회는 1526년 바덴에서 종교 토론회를 개최해 성체성사, 원죄, 연옥, 성화상 공경, 성인 공경, 계명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의회는 가톨릭을 절대 다수로 옹호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츠빈글리의 영향 하에 있던 취리히는 판결을 거부했다.


취리히는 영향력을 다른 주로 확대시켜 1528년 베른을 개혁 정책으로 이끈데 이어 콘스탄츠, 상트 갈른, 바젤, 스트라스부르크까지도 이에 가세했다. 가톨릭의 5개 주도 프라이부르크, 발리스와 더불어 프로테스탄티즘을 저지하기 위해 연합했고 결국 1529년 6월, 1531년 10월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가톨릭이 승리했고 츠빈글리는 1531년 10월11일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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