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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101

[52] 종교재판 - 이단심문제도 스페인 이단법정에서 화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이단자들. 지옥불이 삼키는 그림이 있는 고깔모자와 죄수 이름이 적힌 삼베가운을 걸치고 있다   사회질서 유지위한 시대적 산물2000년 3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구성원들의 지나간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화해의 예식을 거행했다. 교황은 이러한 과오 반성을 위해 97년부터 대희년 준비위원회 안에 역사신학위원회를 두고 소위 종교재판 등의 문제와 관련해 연구하도록했고 97년 10월에는 종교재판과 관련한 국제회의가 열리기도 했다.종교재판이라는 말은 라틴어 인퀴지시오(Inquisitio)의 오역이다. 인퀴지시오는 찾다, 조사하다, 물어보다라는 뜻을 지닌 인퀴레레(inquirere)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조사, 탐문, 심문.. 2005. 9. 28.
[51] 제4차 라테란 공의회 라테란 공의회가 개최된 로마의 라테란 대성당.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시 사용했다고 하는 식탁이 보존되어 있어 교황의 성 목요일 만찬미사는 이곳에서 봉헌된다    교회개혁 위한 70조항 반포영원의 도시 로마 순례의 백미는 역시 4대성당이다. 중세 건축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이들 4대성당들은 로마를 순례하는 개신교 신자들이나 가이드들에 의해 그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인해 가톨릭 공격의 좋은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당시 신앙의 열정과 예술로 승화된 신앙심을 볼 수 있는 걸작들이다.그중에서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증한 라테란 대성당은 1309년 교황이 아비뇽으로 옮겨갈 때까지 1000년간 모든 교황들의 대관식과 착좌식이 거행된 곳이며 선종후 이곳에 묻힘으로써 「교황의 성당」으로도 불린다. 라테란 대성당은 32.. 2005. 9. 28.
[50] 인노첸시오 3세와 교황의 세계지배 교회가 세상의 중심에 선 절정기유럽의 역사도시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도시의 상징은 항상 주교좌 대성당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성당들이 1100년대에서 1500년대 사이에 지어진 것들이다. 이 무렵에 무려 500개가 넘는 대성당과 무수한 수도원들이 건축되었다. 또한 대성당들은 문맹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눈으로 보는 교리서 역할을 성당 자체가 했기 때문에 하나같이 화려한 조각과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꾸며져 있으며 크고 웅장하다. 지금의 경제력이나 기술로도 지어지기 힘든 대성당들이 이처럼 건축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문화와 사회의 중심이 교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서구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지배적 상황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그 절정의 시기가 중세의 가장 위대한 교황 중의 한 명이었던 인노첸.. 2005. 9. 28.
[49]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귀 옆의 비둘기는 성령의 속삭임을 표현하고 있다.    근대를 열어가는 사상 전개 중세 하면 우리에게 가장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일까? 아마도 「암흑기」란 말일 것이다. 이런 오해는 중세시기의 모든 문화와 학문이 신 중심적, 교회 중심적이었던 것에 대한 인문주의자들의 반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사상이란 없다.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중심적 세계관으로 넘어가는 근대 서구적 사상도 200~300년에 걸친 총체적인 사회변화였다. 이는 근대의 뿌리가 찬란한 중세 문명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이 개국 후 고려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불교를 버리고 유교를 새로운 지배 사상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들의 왕조 찬탈을 위한 당연한 명분이지만 그렇다고 고려불상의 .. 2005. 9. 13.
[48] 대학의 시작과 스콜라학의 전성 소르본 대학 전경. 소르봉 신부가 수업료와 서적 구입, 숙식 등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해 세운 기숙사가 토대가 됐다.   자주적 학문활동의 욕구로 탄생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이르면 소르본 광장 주변의 노천카페에서 많은 학생들이 차 한잔을 시켜놓고 레포트 등을 작성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모습들을 흔히 대하게 된다. 소르본 대학은 1257년 프랑스왕 루이 9세의 궁정신부였던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이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을 위해 세운 일종의 기숙사(collegium)이다. 이것이 후에 파리대학의 신학부 문학부 이학부를 지칭하는 대학이름이 된 것이다.대학의 시작12세기 이전 유럽의 모든 교육은 수도원 학교와 주교들이 성직자의 소양교육을 위해.. 2005. 9. 13.
[47] 대 탁발 수도회의 탄생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 대성당. 이 수도원은 성인의 무덤 위에 건립된 것으로 성당과 부속건물이 아씨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철저한 청빈 순명으로 헌신세속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맞서 싸워 온 교회는 이 투쟁의 과정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보다 부유해지고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교권의 독립을 이룩한 교회는 과거 권력에 휘둘린 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기존 체제와 재산관리에 몰두함으로써 스스로 권력화 세속화하는 자기 모순에 빠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것이 청빈운동으로 일컬어지는 12세기의 새로운 종교운동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운동들은 고유 단체로 결성돼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종파나 새로운 수도회로 발전하기도 했다. 교회의 책임자들은 새로 생겨나는 수도회의 수가 너무.. 2005. 8. 30.
[46] 12세기의 청빈운동 카타리파 활동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랑그도크 지방 알비시 전경. 가운데 주교좌 성당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있다.    영적 목마름 자구책에서 시작프랑스 남부 알비시를 찾은 것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었다. 십자군 운동 이후 열병처럼 일어난 청빈운동들의 대명사격인 카타리파의 중심지를 찾아 온 길이었다. 시내 초입부터 시야를 사로잡은 것은 언덕 위에 자리한 주교좌 대성당이었다. 종탑 높이 78m 건물 높이 40m로 800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도 알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성 체칠리아 주교좌 성당의 첫 인상은 길게 늘어진 그림자와 함께 어우러져 위압적인 풍모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도시의 군주처럼 보였다. 주변의 지세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고 창문마저 지상에서 20m 높이에 좁고 길게 나있어 철옹성 같은 인상을 .. 2005. 8. 30.
[45] 십자군 운동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라” 성도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최고의 성지인 이 곳은 일년 내내 순례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순례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무덤성전. 그러나 순례의 시각을 떠나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이곳은 생각만큼 그리 엄숙하고 평화스럽지 못한 곳이다. 성지의 소유권과 관할권을 둘러싸고 수많은 분쟁이 오고갔으며 지금도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교회, 에디오피아 정교회 등 6개 종파가 하나의 성전을 갈기갈기 찢어 소유하고 있다. 신앙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을 상징해주는 듯하여 기분이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다. 이 무덤성전을 중심으로 한 성지탈환의 대의명분 속에 교회역사상 가장 큰 종교간의 충돌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 2005. 8. 3.
[44] 동방 대이교 훔베르토 추기경이 파문교서를 놓은 성 소피아 대성당 내부. 사진 뒤편 가운데가 파문교서를 놓았던 중앙 제대 자리다. 1054년 동·서 교회 완전 결별 『하느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실지어다』(Videat Deus et judicet) 성직서임권 논쟁으로 교회 개혁이 시작될 즈음 교회는 또 하나의 아픈 상처를 입었다. 그리스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동방교회와 라틴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서방교회가 1054년 완전히 결별하게 된 것이다. 위의 말은 양교회의 화해를 위해 레오 9세 교황의 특사로 파견된 훔베르트 추기경이 1054년 7월 16일 콘스탄티노플 소피아 대성당 제대위에 콘스탄티노플의 첼룰라리우스 총대주교 등의 파문교서를 올려놓고 난 후 외친 말이다. 나흘 후 첼룰라리우스 총대주교도 교황사절을 파문함으로써 동서.. 2005. 8. 3.
[43] 보름스 정교조약 교회, 주교 선출 서임권 확보 독일 라인강을 끼고 있는 포도주 거래의 중심지 보름스는 독일내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이다. 부르군트 제국의 수도였으나 5세기 훈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재건된 유서깊은 곳으로 하인리히 4세와 적발왕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 2세 등이 결혼한 독일제국의 중심도시였다. 이곳에서 1122년 성직 서임권 논쟁의 결말을 짓는 보름스 정교조약이 이루어졌다. 그레고리오 7세 이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은 정치적으로나 교회 내부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가중 시켰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선종 이후 독일은 깊은 당파싸움에 빠져들어 수많은 내전에 휩싸였고 마침내 하인리히 4세는 1105년 자신의 친아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축출된 후 아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다 1106년에 사망.. 2005. 8. 3.
[42] 그레고리오 개혁과 서임권 논쟁 이 성문 앞에서 하인리히 4세 황제는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게 자신의 주교 서임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평신도의 성직 임명 금지 선포  1077년 1월 28일, 이탈리아 북부 카놋사의 성문 앞.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독일의 하인리히 4세 황제가 화려한 황제복 대신 참회복을 입고 3일째 맨발로 눈밭에 서있었다. 성직자 서임과 관련해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구하며 파문을 철회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놋사의 굴욕'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 사건은 11~12세기 성직 서임권을 둘러싼 교황권과 세속권력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황제들과 제후들이 자신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주교와 수도원장들을 임명하는 이른바 '평신도에 의한 성직 서임'은 2중의 큰.. 2005. 7. 27.
[41]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프랑스 동부에 있었던 클뤼니 수도원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위그노 및 프랑스 혁명 폭도들에 의해 거의 파괴되고 현재는 일부 벽과 기둥, 주춧돌만 남아있다.    폐단에 맞서 엄격한 수덕생활 영주제로 재편되는 중세 사회의 복잡한 발전과정은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에 걸쳐 왕이나 세력가들은 자신의 세력유지 수단으로 성직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봉토를 사여 했다. 또한 당시 교육과 학문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으며 귀족 출신들이 성직에 대거 참여했다. 이처럼 높은 출신 성분과 교육 수준, 막대한 부를 지닌 고위 성직자들은 일찍부터 국가로부터 정치적 특권을 얻었다. 세금이 면제됐고, 치외법권이 허용됐으며 재판권까지 행사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시장.. 2005.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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