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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70] 공의회 이후 성인시대

by 세포네 200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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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는 깊은 신비 사상과 무한한 사랑으로 가르멜회를 쇄신했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신앙 교리의 혼란과 교회 관습, 전통의 극심한 혼돈 상태에 빠져들었던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거치면서 교도직에 의해 신앙 교리의 명확한 선언을 이룸으로써 쇄신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그리고 공의회의 성과로 교령들이 반포되고 실시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개혁 작업은 비로소 충만하게 된다.


이 개혁의 과정은 아주 오랜 시간을 요했으며 집요할 정도로 철저하고 개혁적인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었다. 가톨릭 신자 대중을 마치 패전한 군대처럼 침체시켰던 체념은 서서히 새로운 투쟁 정신과 다시금 각성된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극복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과 분열의 충격이 점차 극복됐고 교회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한때의 좌절과 혼돈을 넘어서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기쁨을 새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종교 개혁가들은 너무나 자주 옛 전통과 지혜와 가르침을 하등의 경외심 없이 마구 대했다. 약간의 기술적 개선을 통해 교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부 개혁가들은 광신적인 신도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참된 역사적 감각이 결여돼 있었다. 그럼으로써 다소간의 폐해를 제거할 수는 있었지만 거룩함과 내적이고 영적인 회복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트리엔트 공의회 후기에 있어서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위대한 성인들을 배출한다. 이를 일컬어 「성인들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이들은 대부분 일정한 시대적 사명을 지니고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시대적 요청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성인 교황 비오 5세

 

교회사 안에서 무려 300년만에 비오 5세(1566~1572)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금 성인 교황을 만난다. 성인으로서 비오 5세 교황의 존재는 당시 「머리의 개혁(reformatio in capite)」을 통해 교회 쇄신의 진지함을 엿보게 한다.


그는 공의회의 방침을 따라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교황의 과제로 여겼고 따라서 추기경단의 개혁으로부터 시작해 전임자인 비오 4세에 의해 시작된 공의회의 성과를 실천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해 힘 있게 개혁을 추진했다.


쇄신의 정신에 따라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주교들도 많았다. 베로나의 마태오 지베르티, 볼로냐의 가브리엘 팔레오티,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밀라노의 대주교인 가롤로 보로메오(1560~1597)와 같은 주교들이 그들이다.


특히 가롤로 대주교는 교황 비오 4세의 조카로 교황을 보좌하면서 개혁의 의지를 굳게 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에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의지를 아주 강력하게 실현함으로써 밀라노를 넘어 다른 교구에까지 개혁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수도회 영적 쇄신에 노력

 

종교개혁을 전후해 엄청난 동요와 혼란에 휩싸였던 수도회의 개혁이 이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베네딕도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등 역사가 오랜 수도회들은 대부분 15세기부터 이미 개혁의 노력을 지속해왔다.


개혁된 수도회들과 새로 창설된 수도회들은 모두 교회의 개혁을 위한 작업에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으며 사도직의 소명이 어떤 것이든 자신들의 활동에 내적이고 영적인 생활의 쇄신을 결합시켰다. 그럼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빈민구제, 병자 간호, 성직자 양성, 교육 등 수도회 카리스마가 어떤 것이든 그 바탕에는 내적으로 쇄신된 영성생활이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1515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1551년 사제가 된 성 필립보 네리(1515~1595)는 사제가 된 이듬해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했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친구로 함께 로마에서 활동하던 매혹적인 사도였다.


스페인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는 깊은 신비 사상과 무한한 사랑으로 가르멜회를 쇄신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스페인과 프랑스의 정신과 신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르멜회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이 그녀를 도왔으며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1535년 우르술라회을 창설했다.


천주의 성 요한(1495~1550)은 1572년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를 창설했고 성 가롤로 보로메오(1538~1584)는 1578년 재속 사제회를 설립했고 렐리의 성 가밀로 신부(1550~1614)는 1584년 중환자와 임종자를 위한 가밀로회를 창설했다. 샹탈의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프레미오(1572~1641)는 1610년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세웠다. 17세기 중엽에는 엄격한 트라피스트회가 탄생했다.


심오한 신비사상가이며 기도하는 사람이자 성인인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는 1540년 예수회를 세웠다. 파리에서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창설한 예수회의 모토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이다. 이냐시오 성인이 저술한 「영신수련」은 이 목표를 위한 수행의 지침이 되고 있다.
예수회는 교육과 학문을 통한 봉사와 선교를 목표로 하고 특히 일반 교육사업을 일상적 업무에 넣은 최초의 수도회이다. 수련과 활동에 있어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성취는 중요한 힘이 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16세기 이후 유럽의 고등교육의 융성과 교황을 보좌하여 가톨릭 개혁운동에 기여한 바 크다.

 

내적 쇄신으로 참된 면모 갖춰

 

트리엔트 공의회와 그 이후 시대는 쇄신된 교회와 개혁의 시대 정신이 발휘된 위대한 시기였다. 내적 개혁에 봉사하기 위해 짐꾼처럼 고된 삶을 살았던 그들은 참된 개혁가였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쓰라린 실패와 좌절, 심하게는 악의적인 중상모략까지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가톨릭 교회는 역사상 유례없는 위대한 성인들을 배출했고 이들의 깊고 심오한 영성과 내적 쇄신을 통해 『항상 쇄신되어야 할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로서의 참된 면모를 지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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